강원도/원주시

원주...치악산 상원사

임병기(선과) 2012. 9. 3.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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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출발하여 상원사 주차장에 6시40분에 도착 산행을 시작했다. 2.6 KM 족히 1시간 이상 더위속에 산행이 예상되었지만 연일 35도를 넘는 폭염도 비켜간 듯 등산로 초입은 한기가 느껴진다. 이른 아침 인적도 없는 한적한 길.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만이 정적을 깨운다.

 

 

지리산 법계사. 내설악 봉정암. 치악산 상원사 등 높은 산정에 위치한 가람을 찾아가는 길 자체가 청정한 마음을 갖게 하고,욕심을 버리게 만들며, 나를 찾아 가는 순례길이다. 결국은 다시 채우고 내려오기를 다반사처럼 반복하지만 오르는 한 순간 한 순간 한 발 한 발 참배길은 나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길은 유년에 가끔 꿈에 보였던 그래서 더욱 설레이는 길이다. 선친이 사다주신 어린이 잡지 책과, 방학책에서 읽었던 구렁이와 은혜를 갚은 꿩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그 유년의 꿈길을, 종각을 찾아 가는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다. 명경지수의 담속에 뛰어 들어 시간을 희롱하며 벗하고 싶지만 설레임과 그리움은 한가로운 여유를 앞서 먼저 산길을 오르고 있다.

 

 

신새벽의 신선한 산공기, 아무도 걷지 않은 처녀지 같은  산길을 제법 거슬러 올라 숨이 차고 땀이 송글송글 맺힐 즈음 절집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약수터가 보인다.  감로수 한 모금에 갈증해소를 넘어 행복감이 밀려온다. 한 시간 남짓 나홀로 산행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에 피로도 사라지고 성취감도 배가 되었다.

 

 

 멀리 벼랑위에 홀로 우뚝 선 상원사 종각이 먼저 반긴다.

 

 

종각을 눈에 담고 한굽이 돌면  마주하는 일주문

 

 

근자에 모신 삼존불

 

 

치악산 남대봉 아래에 있는 상원사는 신라시대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 무착(無着) 대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무착 대사는 경순왕의 왕사였는데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 보살에게 기도드리고 관법으로  절을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나옹 스님이 중창하였다.

 

조선에서는 왕실에서 국태민안의 기도처로 삼았었고, 월봉·위학·정암·해봉·삼공 스님 등이 중창하였다.  6.25전쟁 때 페허가 되었다가 1968년에 중창되었고, 1988년에 대웅전을 지으며 오늘에 이른다.

 

 

상원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통일신라  전형인 1금당 쌍탑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맞은편에 종각, 독성각, 심검당, 산신각,요사가 배치되고 있다. 산지 가람이면서도 산정에 위치한 까닭에 제법 평평한 터를 갖추고 있으며 부지런한 스님들의 원력으로 지형을 적절하게 활용한 계단식 밭은 상원사의 또다른 볼거리로 남아 있다.

 

 

대웅전은 고려말 나옹스님에 의해 새롭게 지어졌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1968년에 다시 지은 후에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낮은 기단 위에 조성되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민흘림 기둥의 전각이다.

 

 

어칸, 협칸은 4분합 창호이며 빗살문 창살이다.

 

 

측면에는 대칭으로 문을 달고 그위에 주악비천상을 두고 금강역사(?) 벽화를 모셨다.

 

 

벽에는 심우도 벽화가 있으며 한글로 설명문을 새겼다.

 

 

다음카페. 치악산 상원사에 올려진 중수기를 보자.

 

산은 높고 물이 맑아 천하에 제일이다.  우리 조선에서 제일인 고로 중국 사람들이 지금도 고려라고 칭하는 것이 이러한 까닭이다. 일찌기 그대략을 논할때 즉 북쪽으로는 금강산과 오대산의 옹위함이 있고 남으로는 방장과 두류의 장관이 있다.학성의 동쪽에 흡사 용과 호랑이가 틀고 앉은 모습과 같은 산이 있어 치악 이라하니 5백년 전성기 때에 조정에서 특별히 복국 우세로 동악단에 매년 월일에 수령 방백으로 하여금 제관을 정하여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산의 정상에 상원사가 있으니 즉 신라 경순왕의 왕사인 무착조사가 창건하였다. 산의 명승과 절의 오래됨이 이로부터이니 즉 사람들이 말하고 이른것은 다시 군더더기의 말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관계로 처음 창건된 이래로 자주 일곱번을 중수 하였다.산의 영험으로 인연하여 고명선덕이 여기에 머물면서 이에 따라 무너진 것을 고치고 수습하여 천고에 조사의 자취는 계속  연이어저 황폐하지 아니하니 이것또한 대웅씨의 큰 신통스러운 조화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매양 중건할때에 밝은 신령스러움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도 축염선사의 일곱번째 세움에도 역시 뜰에 있는 탑의 뇌굉이 부딪친 곳에 순금 부처 1위를 받들고 나오니 그 신이한 조화의 도움이 이와 같이 명명하다.

 

아. 인연화복이 축념 선사가 내주한 이때에 있었고 마침 절이 폐하였으나 이와 같은 금불상의 신이한 징조로 인하여 많은 뜻있는 이를 모아 중건에 모을수 있었다. 이 아름답고 빛나는 갱신에 동참하는 화주들의 보시로 하여금 부처님의 인연을 심고

여래가 사람으로 하여금 끝없이 축념 선사를 돕게 하였다. 나에게 기문을 청하나 나는 본래 문사에 능하지 못함에도 깊히 선사의 믿음과 발원에 느낀바가 있어 거친 글을 엮어 그전말을 기록한다. 화주의 보시와 그꽃다운 이름을 왼편에 열록하니 천년에 불후할 공적이다

 

불기2960년 壬申8月 일에 창강거사 이인상이 기록하다.

이 글은 1932년에 쓰여졌다

 

독성각

 

옛날 한 스님이 치악산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꿩 두 마리가 멀찌감치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그 스님은 그대로 자신의 길을 갔다. 그런데 꿩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더 이상 날아오르지를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은 꿩들이 떨어진 곳을 짐작해서 찾아가 보았다. 그랬더니 커다란 구렁이가 똬리를 튼 채 꿩을 향해 독을 내뿜고 있고, 꿩들은 그 독 기운데 맥을 못 추고 조금 있으면 구렁이에 먹힐 참이었다. 그 광경을 본 스님은 짚고 있던 석장을 들어 구렁이를 쫒아내 버리고 꿩을 구해 주었다.

 

그 날 밤 스님은 폐사가 되어 있던 구룡사(龜龍寺)에 도착하여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잠든 속에서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을 느껴 눈을 떠보니 구렁이가 자신의 몸을 칭칭 감은 채 금방이라도 삼킬 들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구렁이는 오래 되어 말도 하였다.

 

“네가 내 먹을 밥을 살려주었으니 너라도 잡아먹으련다.”

 

“내가 네 먹이가 되어 네가 배 부른다면 이 몸이 아깝지 않다. 어서 먹어라.”

 

구렁이는 다소 주저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가 승려가 아니라면 이미 먹고 말았을 것이다. 네가 살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알려주겠다. 만일 그대가 나를 위해 오늘 밤이 새기 전에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면 나는 이고득락(離苦得樂)하여 환생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스님은 일단 구렁이에게서 풀려났지만 너무나 막막하였다. 구룡사는 폐사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다른 절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산위로 30리 가면 상원사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 밤길을 간다 해도 날이 밝기 전에는 도저히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은 모든 것은 인연에 따를 뿐이라는 생각으로 염불한 다음에 발길을 상원사로 향하였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새벽이 막 걷히기 직전 문득 먼 곳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뎅~뎅~”

 

종소리는 딱 두 번 울렸다. 그다지 큰 소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종소리였고, 그 소리를 들은 구렁이는 소원대로 그 자리에서 허물을 벗고 환생할 수 있게 되었다. 감격한 구렁이는 구렁이의 몸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의 몸뚱이를 화장해 줄 것을 부탁했다.

 

구렁이를 화장한 스님은 날이 밝자마자 상원사로 향했다. 어젯밤 종소리는 분명 상원사 쪽에서 났기 때문이다. 상원사에 간 즉시 종각으로 향한 스님은 종 앞에 떨어진 꿩 두 마리를 발견했고, 또한 종에 묻은 핏자국도 함께 보았다. 그제야 스님은 자신이 어제 낮에 구해준 꿩 두 마리가 종에 온 몸을 던져 소리를 냈던 것을 알았다. 스님은 너무나 감격하여 꿩들이 다음에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기도하고 염불한 다음 산을 내려왔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구해 준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은 꿩을 기리는 뜻에서 상원사가 자리한 산을 꿩을 뜻하는 ‘雉’를 써서 치악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범종을 치기 전에 가볍게 두 번 치는 전통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 전설에 나오는 스님은 바로 무착 대사였다고도 한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로 유명했던 무학(無學) 대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으면서 꿩과 무착 대사를 기렸다.

 

蛇沒雉岳兩鮮空  뱀이 죽은 치악의 맑은 하늘가로

大小盤音四更中  크고 작은 종소리 사경에 울려

雉蛇兩寃半宵鮮  꿩과 뱀의 두 원혼이 한밤중에 풀렸으니

正知無着報酬鐘  무착 스님은 보은의 종소리임을 비로소 알았네

 

동.서탑

 

대웅전 중정에 나란히 선 쌍탑은 한국 전쟁당시 많은 부분이 훼손 되어으나 1964년 보수하여 보존되어 있다. 사찰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에는 1100년 일행 .도선 두사람의 선사가 조성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두 탑의 형식은 비슷하며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되어 있다. 1964년 석탑 보수때 탑신에서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보살상.인왕상 불립상 2구 등 4구의 금동 1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성시기는 나말려초로 느껴진다.

 

 

동탑.지대석위에 이중기단을 두었다.하기단 면석에는 우주가 보이고 4매로 된 갑석 상부에는 상기단 받침을 조출하였다.상기단 갑석 낙수면 물매는 얕은. 탑신에는 우주를 조출하였고 옥개석은 받침없이 사선으로 처리하였다. 초층에 비하여 윗층 탑신의 체감이 급격하다.옥개 낙수면의 물매는 급하다. 처마는 나란히  평행이다가 전각에서 약간 반전이 보인다. 상륜에는 보개와 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품이 남아 있다.

 

기단부

상륜부

동탑

서탑

 

서탑. 동탑과 거의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왜소하여 균형미를 잃었다. 상륜부에는 2개의 노반이 있다. 한 기는 동탑의 노반으로 보여진다. 고증을 거쳐 옮겼으면 좋겠다.

 

서탑 상륜

동.서탑

 

광배. 거신주형광배의 형태이나.불상은 사라지고 광배만 남아 있다. 신광은 훼손된 듯 보인다.  두광. 중앙에는 연꽃과 넝굴문을 돋을 새김하였고, 겹동선 밖에는화염문을 양각하였다. 석탑과 동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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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과 광배를 찾아 상원사를 찾았지만 그길. 유년의 꿈길은 데자뷰로 다가왔다. 신심이 약해 대웅전 삼존불 전에 짧게 예를 갖추었지만  마음만은 푸근했다. 언제 다시 인연을 지을지. 오랫동안 기억속 한 편을 차지할 참배길이었고 절집이었다. 치악산 상원사는 마치 꿈꾸듯 참배했지만 돌아보니 내려 가야할 산아래는 아득하다. 참 잘난 중생이다!!!

 

 201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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