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창원시/창원시

창원...백월산 백월암(북사지)

임병기(선과) 2012. 8. 2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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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암은 북면 월계리 산627번지 신라시대 북사지터로 알려진 곳에 위치한 암자이다. 최근에 불사한 대웅전, 2층시멘트 요사, 대웅전 윗쪽에 자리한 삼성각이 전각의 전부인 작은 암자이다. 차량 교행이 가능한 지점에는 익히 들어온 개인 사유지 철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 땀을 흠뻑 흘리며 백월암으로 향했다.

 

 

신발이 보였지만 불러도 불러도 요사에는 인기척이 없어 혼자 둘러보기로 했다. 백월암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통일신라시대

백월산 두 성인의 한사람인 달달박박이 상주했던 북사로 전해온다.현재  옛터에 지연스님이 요사를 철거하여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옛법당터에는 삼성각을 지었다고 한다.

 

 

대웅전 벽화."백월산 사자암 전래도" 이다. 디지털창원문화대전의 자료를 보자. 옛날 나라의 황제가 일찍이 궁중에 연못을 하나 팠는데 매월 보름 전에 달빛이 밝으면 그 연못 속에 사자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곤 하였다. 이러한 기이한 일이 계속되자 황제는 화공을 시켜 그 모양을 화폭에 그리게 하고 신하를 풀어 그 산을 찾게 하였다.

신하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찾아다니다가 해동의 북면 굴현고개에 이르러 더 이상 다닐 기력이 없어 휴식을 취하였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산이 화공이 그린 그림과 흡사해 신하는 단숨에 사자바위를 향해 뛰어올라가 바위 꼭대기에 신발 한 짝을 매달아 두고 나라로 돌아갔다. 신발을 매달아 둔 것은 황제에게 산을 찾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신하가 황제에게 “그 산을 해동국에서 찾았습니다.”라고 말하자 황제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신하는 자기가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을 산봉우리 바위 위에 놓고 왔다고 말하였다. 보름이 되자 황제와 신하는 연못가에 서서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밝은 달이 떠오르자 연못 속에 바위산이 비쳤는데 바위 위에 신하가 벗어 둔 신발 한 짝도 선명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이한 광경을 본 황제는 감탄하며 “보름달과 같이 연못 속에 하얗게 비친다.” 하여 백월산이라 부르게 하고, 정상 부근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 세 개는 “사자가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사자암’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후불벽화도,삼국유사에 전하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벽화로 남사, 북사의 창건 설화이다.

 

백월산에서 동남쪽으로 선천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두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그 생김새가 비범했고 생각이 높고 깊어서 함께 중이 되어 도 닦기에 열중했다. 이러던 중에 그들은 불법을 공부하려면 마땅히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간세상을 등지고 백월산 무등골로 들어가게 되었다. 달달박박은 백월산 북쪽 사자바위를 차지하여 작은 움막을 지어 지내고, 노힐부득은 동쪽의 바위아래 물이 있는 곳에 돌집을 지어 각각 불도에 정진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아름다운 낭자가 달달박박이 거처하는 북쪽 암자에 찾아 와서는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이 막히고
마을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하오니
자비로운 스님은 노여워 마오

이에 달달박박은 "절은 깨끗해야 하는 곳이니, 그대는 어서 다른 곳으로 가시오."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 불도에 전념했다. 발길을 돌린 낭자는 노힐부득이 있는 암자로 가서 똑같은 청을 하며 시를 읊었다.


첩첩산중에 날은 저물어
가도 가도 아득한 땅
송죽의 그늘은 더욱 깊어 가는데
골짜기의 물소리는 더욱 새로워라
자고 가길 청함은 길 잃은 탓도 아니요
스님을 성불하는 길로 인도할까 함이니
바라건대 스님께서 제 청만 들으시고
누구냐고 묻지마오

이 시를 들은 노힐부득은 깜짝 놀라서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들이 하는 착한 행동수의 하나인 것, 깊은 산속 밤이 어두운데 어찌 당신을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하며 낭자를 머무르게 하고 노힐부득은 정신을 맑게 하여 염불에만 전념했다. 날이 밝으려고 할 때 낭자가 아기를 낳으려는 기운을 보이면서 도움을 청했다.노힐부득은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짚자리를 마련하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켜주고 나니, 그 목욕물은 갑자기 진한 향기를 풍기면서 황금빛으로 변하였다. 노힐부득이 깜짝 놀라자 낭자는 노힐 부득도 목욕할 것을 권하였다.


노힐부득은 마지 못해 옷을 벗고 목욕을 하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고 살결이 황금빛으로 빛나면서 옆에 연꽃모양으로 조각된 좌대가 생겨났다. 낭자는 노힐부득을 그 좌대에 앉기를 권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인데, 스님을 도와서 최고의 진리를 깨닫게 하려 한 것입니다."하면서 사라졌다.

 

한편, 달달박박은 저녁에 낭자를 물리쳤으니, 낭자가 반드시 노힐부득을 파계시켰을 것이라 믿으며 비웃어 줄 작정으로 노힐부득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노힐부득은 연화대에 올라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명을 내뿜으며 온통 황금빛으로 변해있었다. 달달박박은 자신을 찾아 온 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름다운 여자로만 본 것을 후회하며 자비로운 미륵존상이 된 노힐부득에게 자신을 이끌어 줄 것을 청하자 노힐부득은 이제까지의 내용을 자세히 말해주며, 그를 남아있는 목욕물로 몸을 씻게 했다. 그러자 달달박박 역시 무량수불이 되었다.

 

 이때 백월산 아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와서 우러러 보며 설법해 줄 것을 청하자 두 부처는 불법을 설명하고 나서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덕왕이 절을 창건했는데, 바로 이 절이 남사라고 하며,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백월산을 중심으로 남쪽 계곡 언저리에서는 기와조각이 출토되고 있는데, 기와 조각에 "남사"(서기757년에 창건됨)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탑재와 석등들이 주위 논바닥에 박혀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 곳이 절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북쪽에서도 많은 기와조각과 삼층석탑, 불상 등이 출토되어 여기에도 절이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대웅전 뒷편 불상 부재. 중앙 부재는 석불좌상 왼쪽팔 부분이다. 어깨 부근과 손목은 결실되었고, 유려하게 흘러내린 법의 자락이 보인다. 좌측 부재는 앙련과 복련이 한 돌에 표현된 상대좌로 판단되고 우측은 하대좌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대좌는 상,중,하대석을 갖춘 연화대좌로 팔각원당(?)형 중대석이 결실된 대좌 아니었을까?  중앙 부재로 보면 손은 가슴으로 향해 있어 어쩌면 지권인처럼 생각도 된다.

 

생각나는 불상이 없는가? 괴산 각연사 비로자나불,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 성주 금봉리 비로자나불, 그리고 성주 심원사, 창녕 사리의 화려한 광배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백월암 북사지 석불도 통일신라시대의 비로자나불일텐데.

 

 

요사 2층에 모셔진 석탑 상륜과 불두이다. 아래의 삼성각옆 마애불상을 뵙고 내려오는 길에 요사에서 스님이 나오셔서 2층으로 안내하여 뵈었다. 스님의 말씀으로는 1m만 파면 석조부재가 무수히 발굴된다고 했다. 주변이 사유지여서 사찰 주관으로 발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북사는 고의적인 훼손, 화재, 전화가 아닌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로 폐사된 절로 추정된다고 했다.

 

 

불두.마모가 심하여 상호 구분이 어렵다. 재질로 미루어 대웅전 뒷편 석불 부재의  불상으로 판단된다. 나발과 백호공만 분명하게 보인다. 요사로 들어가서 시원한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권했지만 고마움을 표하고 돌아섰다. 스님께 삼층석탑 위치를 탐문했더니 대웅전 정면 멀리 오동나무와 대숲을 가리키며 대숲에 있다고 귀띰하셨다.

 

 

 

대웅전 뒷편 삼성각

 

 

삼성각 옆 비스듬히 기댄 자세의 마애불이다. 앞의 배례석은 석탑 탑신석이다.

 

 

 자연암반을 주형거신광배로 표현한 듯 보이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자료이다. " 마애불은 높이 87㎝, 너비 85㎝ 규모의 안산암에 새겨져 있다.  불두는 양쪽으로 귀를 약하게 나타내고 눈과 입은 음각으로 짙게 표현하였으나 뚜렷한 형체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상체는 왼쪽 어깨와 가슴 부분이 결실되었는데, 양팔을 가운데로 모은 형태이다. 수인은 마모로 인해 현재로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맷돌, 석탑 탑신석

 

 

 

 

백월암에서 스님의 설명을 듣고 석탑을 찾아가는 길에 사유지 주인으로 보이는 집주인을 만났다.  약초를 씻던 어르신에게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석탑을 찾는다고 말씀드렸더니 스님 설명대로 찾아 가면 헛탕친다고 상세하게 안내해주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석탑이 자리한 대숲은 협소하여 사진 촬영하기도 어려웠으며 사단병력을 능가하는 모기떼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애로가 심했다.

 

 

삼층석탑으로 기단부는 매몰 또는 결실되었다. 탑의 지붕돌, 2층 옥신은 본래의 부재로 보인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우동이 뚜렷하며 전각의 반전도 분명하다. 옥개받침은 4단이며  상부에 1단의 탑신 괴임을 두었다. 2층 탑신에는 양우주를 표현하였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통일신라시대 북사에 있었던 석탑은 아닌듯 보이며 후대에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2층 탑신을 보면 백월암 삼성각옆 마애불 배례석은 이 석탑의 초층 탑신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요사채 2층의 석탑 상륜부재도 이 석탑의 상륜이 제자리처럼 여겨진다. 문화재청. 창원시청, 조계종, 백월암 그리고 사유지 주인이 만나 좋은 결과를 도출하여 석탑의 본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하여 새로운 자리에 세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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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암 스님. 사유지 주인 어르신 고맙습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답사하였는데 그건 기우였습니다. 제자신이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백월암 답사는 나를 돌아 볼 좋은 기회였습니다. 부지런히 마음 공부 다시 하겠습니다. ()()()

 

201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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