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창원시/창원시

[스크랩] 창원...봉림사지

임병기(선과) 2008. 6. 14.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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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사지. 찾는 사람도 자취도 남아있지 않은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사지. 하늘엔 무심히 구름만 흐르고 땀에 젖은 탐승객의 마음은 허전하기 그지없다.윗봉림 마을에서 북동쪽 골짜기를 따라 600m정도 올라간 봉림산 중턱의 주머니 모양의 분지에 위치한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봉림사는 894년경 진경(眞鏡) 심희((審希) : 854∼923)가 창건하여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융창하였으나, 이후의 내력에 대하여 상세히 전하는 바가 없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사찰의 규모나 구조 등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사지에는 건물지, 연못지, 탑지 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경복궁내에 있는 진경대사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탑비(보물 제363호)는 물론 상북초등학교내의 삼층석탑이 이곳 봉림사지에서 반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익히 잘 알고 계시겠지만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유입배경을 가져온다(패러디한 내글도 카페에 있지만 건방이 넘쳐 이제는 부끄럽다)
 
101 한국불교에의 선의 유입과 구산선문...출처 오솔길( http://blog.daum.net/yangsooan/1463887)

 

오늘날 한국불교(韓國佛敎)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선사상(禪思想)입니다. 신라 후기 우리나라에 선사상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후 선은 수많은 역사적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거치면서 현대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특색을 선불교에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선이 우리나라에 유입될 당시에도 많은 불교적 전통들이 있었습니다. 그 전통들을 교학(敎學)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적 전통이었으며, 교학(敎學)은 국가의 신임을 얻으면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신라의 사회 상황은 많은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불교는 왕족과 귀족 중심의 불교였으며, 귀족내부의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신라시대 선이 들어 온 것은 외국인의 전래가 아니라 신라인 자신이 입당하여 선을 전수받고, 돌아와 산문을 열어 선을 전수한 것입니다. 신라시대에는 당나라와의 일반적인 교역이 활발한 때였으며, 이러한 교역은 승려들이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의 불교를 전수하게 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의 유입을 입당전심(入唐傳心)이라고들 합니다. 즉, 외국인이 아니라 신라인 자신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선을 가져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중국의 선은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종선은 그 맥이 끊어지고 남종선의 혜능 조사의 법을 받아 돌아왔기 때문에 대한불교조계종의 법맥이 육조 혜능조사를 잇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라에 선이 유입될 당시에 선의 형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신라의 왕자 김화상(金和尙, 無相大師)이 당나라로 건너가 귀화하여 중국선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과 원효(元曉)스님이 쓰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도 달마(達摩)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선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학자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선의 유입은 가지산(迦智山) 도의(道義)가 당으로 건너가 마조(馬祖)의 법사(法嗣) 서당(西堂)으로부터 선을 전수하고 돌아와 가지산(迦智山)에 산문(山門)을 연 것을 시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 말에 선종이 들어오면서 지방의 사찰을 중심으로 선문이 형성되는데 이것을 구산선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선의 유입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어려우나 신라시대에 들어 온 선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다른 나라의 불교와는 다른 한국불교만의 전통을 지니고, 그 흐름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선을 전수하고 돌아 온 승려들은 자신들이 전수해 온 선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 신라는 선종을 받아들이기에는 교종의 자리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들의 제자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절을 짓고 선문(禪門)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산선문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선종은 중국에 있던 남종선을 받아들인 것이며, 중국의 선종(禪宗)이라고 하는 것은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종은 경전의 해석이나 말, 문자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종(宗)의 강격(綱格)으로 하고, 좌선(坐禪)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는 수행을 함으로써(내관자성(內觀自省)) 자성(自性)을 깨닫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경(妙境)을 요달함을 종요(宗要)로 하는 종파(宗派)입니다.

 

또한 선종(禪宗)이란 부처님의 교설(敎說)을 소의(所衣: 의지할 바 대상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로 삼는 교종(敎宗)에 대하여 좌선(坐禪)을 닦는 종지라는 뜻입니다. 선종(禪宗)은 부처님으로부터 정법(正法)을 유촉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있고, 28조(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중국에 건너와 2조 혜가(慧可, 487-593)에게 법을 전함으로부터 제 5조인 홍인(弘忍, 602-675)에 이르러 그 문하(門下)에서 혜능(慧能, 638-713)을 제6조로 하는 남종(南宗)과 신수(神秀, ?-706)를 제6조로 하는 북종(北宗)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북종(北宗)은 오래지 않아 맥(脈)이 끊어지고 혜능(慧能) 남종만이 5가(家) 7종(宗)으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선종(禪宗)이 들어 온 것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5년(784)에 당나라의 서당지장사(西堂智藏師)에게서 법(法)을 받은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돌아와 법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그 초조(初祖)로 하고 있습니다.

 

서당지장 스님은 마조도일 스님의 법을 이었고, 마조도일 스님은 조계 혜능 스님의 법을 이었으므로 우리나라의 조계종은 육조 혜능의 법맥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하나의 종파이며, 구산문으로 불리운 이유는 선문 가운데 선법을 널리 알린 아홉개의 선문이 있고, 이 선문을 말할 때 구산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선법을 크게 떨친 아홉개의 사찰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를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기존의 기반을 잡고 있던 교종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침체되어 말기에 이를 무렵 불교의 새로운 풍조라고 할 수 있는 禪이 중국에서와 山門을 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며, 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라말부터 고려 초의 선종계(禪宗界)를 망라하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구산문은 구산선문이라고도 하며,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가지산(迦智山): 도의(道義)의 법손인 체징(804-880)이 보림사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쳐 가지산파를 이루었습니다.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며, 북한부 사람으로 그 법호는 처음 명적(明寂)이었으나 나중에 원적(元寂)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라 37대 선덕왕 5년(784)에 당으로 건너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도의라 호를 고쳤다고 합니다. 헌덕황 13년(821)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魔說)이라 비방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雪岳山) 진전사(陳田寺)에 칩거하여 그 법을 제자 렴거(廉居)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렴거는 그 법을 다시 체징(體澄)에게 전하였습니다.

 

체징은 당으로 건너가 떠돌아다니며 고승을 찾았으나, 그의 조사(祖師)인 도의(道義)가 물려 준 것 이외의 법(法)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문성왕 2년(840)에 돌아왔습니다. 돌아 온 체징은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道義)의 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습니다.

 

(2)실상산(實相山): 전북 남원의 실상사가 실상산문의 근저가 되었습니다. 홍척(洪陟)이 흥덕왕 원년(826)에 귀국하여 실상사에서 선법을 일으켜 실상산파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홍척(洪陟)은 일찍이 입당하여 도의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문하에서 법을 얻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홍척은 지리산 실상사에 있으면서 선법을 일으켜 많은 제자와 신도들이 귀의 했고, 그 중에서도 흥덕왕과 태자 선강(宣康)이 홍척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실상사에는 홍척의 제자였던 편운(片雲)의 부도와 수철(秀澈, 817-893)의 탑비가 남아 있으며, 편운(片雲)의 부도에는 그가 홍척의 제자라고 되어 있으며 수철의 탑비에는 실상사에서 스승 홍척에게 법을 얻었으나 심원사(深源寺)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홍척은 가지산문의 도의와 같은 스승인 서당지장에게 법을 받았으나 도의(道義)보다 늦게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산문(山門)의 터전은 가장 먼저 닦아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선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3)동리산(桐裡山): 혜철(惠哲784-861)이 귀국한 후 문성왕 원년(839)에 태안사에 선지를 펴 동리산파를 이루었습니다. 혜철도 도의, 홍척과 더불어 서당(西堂)에게서 법을 받아 돌아와 선지를 펴는데 힘썼습니다.

 

(4)봉림산(鳳林山): 현욱(玄昱787-868)의 제자 진경 심휘(854-895)가 경남 창원에 봉림사를 세워 봉림산파를 이루었습니다. 현욱(玄昱)의 속성은 김씨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헌덕왕 때 당나라로 가서 마조(馬祖)의 문인(門人) 장경(章敬) 회휘(懷暉)에게 배워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현욱은 희강왕 2년(837)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지리산 실상사에 안거(安居)하다가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로 옮겨 그의 법을 펼쳤다. 그래서 현욱(玄昱)을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고 합니다. 현욱이 크게 선풍을 떨치다 경문왕 8년(808)에 82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진경 심희(眞鏡 審希, 854-923)가 봉림사(鳳林寺)를 세워 봉림산의 선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5)사자산(獅子山): 도윤(道允800-868)의 제자 징효 절충(831-895)이 헌강왕 때 강원도 영월에 서자산사를 세워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도윤은 헌덕왕 17년(825)에 입당하여 남천 보원(南泉 普願)에게서 법을 얻고 돌아와 동악(棟岳)에 머물다가 다시 쌍봉사(雙峯寺)로 자리를 옮겨 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고, 그래서 도윤을 쌍봉화상(雙峯和尙)이라고 합니다. 문경왕 8년(868)에 71세로 세상을 입적하셨고, 익호(謚號)를 철감(哲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징효 석중(澄曉 析中, 831-895)이 흥령사(興寧寺)를 세우고 수 백 명의 제자와 더불어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6)성주산(聖住山): 무염(無染, 800-888)의 속성은 김씨이며 태종 무열왕의 8대손입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처음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 득도(得道)하였고,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에게서 화엄경을 배웠습니다. 821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마곡보철에게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동방대보살이라 존경하였으며, 귀국 후 성주사에서 법을 펴다가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가 되었으며 무설토라는 독특한 선법의 법문으로 2천명의 문하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심광, 현휘, 대통, 여엄 등이 뛰어 나다고합니다.

 

(7)사굴산: 사굴산문은 문성왕 때 범일(810-889)선사가 강릉의 하구정면에 굴산사에서 개창한 선문입니다. 범일은 태어날 때부터 육계가 정수리에 있었다고 합니다.(육계란 부처님의 정수리가 솟아 상투모양을 이룬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15세에 출가하여 831년 당나라로 가서 염관제안의 법을 전수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굴산사에서 법을 폈습니다. 이곳에 살면서 40여년 동안 한번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하며, 역대 국왕의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범일은 특히 특이한 진귀조사설을 남겼는데 그것에 의하면 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나왔으나, 선법(禪法)은 진귀조사로부터 부처님이 받아서 전하였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설(說)이며, 그 사실도 인정되고 있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청허휴정이 이를 인정한 후 조선후기 선논쟁의 근거가 되었고, 여래선보다 보사선을 우위에 두는 조사선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로는 개청(835-930), 행적(832-916)등이 유명하고 고려 때까지 번성하여 구산선문 중에서 가장 위세를 떨쳤다고 합니다.

 

(8)수미산(須彌山): 이엄(利嚴, 870-936)의 속성은 김씨이며, 12세 때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습니다. 그 뒤 진성왕 10년(896)에 입당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문하(門下)에서 6년을 수행하고 법인(法印)을 얻었습니다. 그 후 널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보고 효공왕(孝恭王) 15년(911)에 귀국하였습니다. 고려 태조가 그의 법이 높음을 듣고 궁중으로 맞아 들여 법을 받았으며, 태조 15년에는 수미산(須彌山, 황해도 해주군 귀산면)에 광조사(廣照寺)를 지어 그를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그의 휘하에 모이는 많은 학인(學人)들을 가르치며 도화(道化)를 떨치다가 태조 19년(936)에 6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는데 그의 시호(謚號)를 진철대사(眞澈大師)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문하(門下)에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능(貞能), 경숭(慶崇)등 수 백 명이 있어 그의 법을 전승하였는데 수미산(須彌山)에서 선의 일파(一派)를 이루었으므로 수미산이라고 합니다.

 

(9)희양산(曦陽山): 경북 문경의 봉암사, 도헌(道憲)이 봉암사를 창건하고 법손인 경양(競讓, 878-956)이 봉암사를 중건하고 희양산문을 이루었습니다. 경양(878-956)은 속성이 왕씨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공주(公州) 남용원(南 院) 여해(如海)에게 득도하였습니다. 효공왕 4년(900)에 중국으로 가서 곡산의 도연(道緣)에게서 크게 깨달은 뒤 고려 태조 7년(924)에 돌아왔습니다. 강진 백엄사에사 법을 펼 때 경문왕이 글을 보내어 그 덕을 칭찬하고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그 뒤 법을 닦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가 두 호랑이의 안내로 도착한 곳이 희양산이었고, 이 곳이 그의 법사(法師)인 도헌(道憲)이 창건한 봉암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제자들과 선의 일파(一派)를 이루었으며, 이 산문을 희양산문이라 합니다.

 

구산문의 완성은 종래 이엄의 수미산문 개산(태조15년,932)으로 여겨져 왔으나, 도헌을 개산조로 하는 희양산문이 경양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산문의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보아(태조18,935) 희양산문의 개산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미산문과 희양산문의 성립에 의하여 비로소 구산선파가 형성되었던 당시 나말여초에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9산으로 이루어진 선문가풍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것은 구산선이 신라말에 다 형성이 된 것이 아니라 고려 초에 걸쳐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나 구산선이라고 하면 신라의 선문을 말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성격은 모두 육조 혜능의 법을 잇는 남종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산문은 아홉군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두 조계(曹溪,<혜능(慧能)>)을 조(祖)로 삼고 그 선법(禪法)인 조계선(曹溪禪)을 참구(參究)하였으므로, 고려 초에 확립된 조계(曹溪)를 조(祖)로 하는 해동(海東)의 선종(禪宗)이라는 것입니다.

 

선종의 등장은 단순히 중국의 선불교를 옮긴 차원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우리 민족과 한국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선종은 고려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며, 오교양종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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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북초교내 봉림사지 삼층탑. 일제강점기에 시대에 반출되었다가 되찾은 것이다. 관리 소홀로 많이 부서진 것을, 1960년 창원교육청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탑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은 2층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여러 차례 옮겨 다니면서 많이 깨져나가 위층 기단의 일부만 남아있다. 

 

낙수면 경사가 심하다. 몸돌과 옥개석도 조화롭지 못하다. 다른 구산선문 사찰의 탑과 비교하면 너무도 왜소하고 장식이 없어 봉림사와 동시대에 조성된 탑일까라는 의구심도 든다.몸돌에는 우주가 보이고 상륜부 노반 복발은 후에 조성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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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탑과 달리  2층 몸돌에 문비(?)를 조성하였고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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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지공원에 복원한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진경대사의 사리탑으로, 탑비와 함께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1919년 경복궁으로 옮긴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전형적인 8각 부도이지만 표면의 조각은 적은 편이어서 재료의 빛깔과 아울러 청초한 느낌을 준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있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 또한 8각으로,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무늬의 바닥선이 불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시대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북모양으로 중앙의 곳곳에 꽃송이를 새긴 후 이를 도드라진 띠장식으로 연결시켰다. 윗받침돌에는 연꽃 8송이를 조각하였다.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높고 큰 편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은 8각의 굵직한 지붕선이 꼭대기에서 아래로 이르렀으나, 끝에 달려있던 꽃장식은 모두 부서졌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이 있는데, 한 돌로 조각하였다.

만들어진 때는 진경대사가 입적한 해인 신라 경명왕 7년(923)으로 추정되는데, 아래받침돌의 안상에서 이미 고려시대의 특색이 보이고 있다. 기단 가운데받침돌이 낮고 작은 것이나 탑신의 몸돌이 가늘고 긴 것에 비해, 지붕돌이 지나치게 커서 비례의 균형을 잃고 있다. 조각수법이 강하지 않고 전체 형태가 길쭉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등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곳곳에서 엿보인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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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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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지공원에 복원한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 심희(審希)의 탑비로, 원래 경남 창원의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191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심희(855∼923)는 9세에 출가하여 명산을 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경남 창원에서 봉림사를 창건하니, 이때부터 선문9산 중 하나인 봉림산문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궁으로 들어가 경명왕에게 설법을 하기도 하였고, 그 후 다시 봉림사로 돌아와 제자들을 지도하다 6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시호를 ‘진경대사’라 하고, ‘보월능공’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유난히 크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뿔이 있던 작은 구멍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마련하였는데, 주위에 구름무늬가 가득하다. 비문이 새겨져 있는 비몸은 분실된 부분이 있어 옛 탁본을 참고로 복원해 놓았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에 둘러싸인 두 마리의 용이 모퉁이에 각 한 마리씩 표현되어 있다.

통일신라 경명왕 8년(924)에 세워진 비로, 왕이 직접 비문을 짓고 행기(幸期)가 글씨를 썼으며 성휴(性休)가 새겼다. 각 조각들이 얕아지고 형식화된 경향이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쇠퇴하던 기풍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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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만 우거진 사지. 기와조각만 지키고 있다.

 

덧없는 세월인가?

 

제행무상이라 했거늘..

 

2008.05.17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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