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공주...공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임병기(선과) 2012. 7. 8. 06:56
728x90

 

 

공주박물관은 현재 위치로 이관전에 들렸었다. 도로변 좁은 공간에 주차를 하고 계단을 통해 진입했던 기억이 또렷하건만 유물은 대통사 석조 외에는 기억이 전혀 없다. 신축박물관은 2004년에 준공하여 새롭게 개관했다고 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실,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 야외정원의 3곳의 상설전시공간과 1곳의 특별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2004년 5월 신축 개관하여 보다 나은 전시환경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1층 무령왕릉실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으며, 2층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은 원삼국시대부터 사비(부여)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웅진(공주)을 중심으로 한 백제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고, 야외정원에서는 공주 일원에서 출토된 많은 석조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문화재 설명문은 박물관 홈페이지, 디지털공주문화대전, 한국문화유적총람, 폐사지 총람에서 가져 왔다. 

 

 

대통사 석조. 석조[石槽]란 돌을 파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물통으로, 절에서 큰 행사가 끝난 뒤 그릇을 씻을 때, 또는 물을 담아두거나 연꽃 등을 기르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석조는 백제 성왕 5년(527)년에 세워진 대통사지에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한 가닥 띠를 돌리고 몸 중앙에는 약간 가는 두 줄의 띠가 새겨져 있다. 백제문화의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지닌 이 석조는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각각 반죽동 석조(보물 149호)와 중동석조(보물 148호)로 불리운다..

 

 

서혈사지 석불좌상. 공주시 웅진동 서혈사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물 제979호 불상과 비로자나불과 함께 발견되었다. 서혈사(충청남도 기념물 제37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장하는데, 1929년 이후 몇 차례의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사찰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항마촉지인과 양 무릎 사이에 부채꼴 옷주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석굴암 본존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다.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때 맺었다는 손갖춤으로, 지신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라 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로써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979호 불상은 둥근 얼굴, 아담한 신체, 대좌에 별도의 중대석받침을 끼워 넣은 것으로 볼 때 9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이다. 이 석불은 머리가 없고, 대좌의 일부가 없긴 하지만 전체적인 조각 수법 등이 보물 제979호 불상과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불상 역시 9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개석(금학동 우물뚜껑)

 

 

12지상

 

 

공주 삼각리부도

 

 

아산 아산리 부도

 

 

석탑군

 

 

공주 봉학동 석탑

 

 

공주 반죽동 석탑

 

 

일명사지 석탑

 

 

불상군

 

 

공주 소학동 여래입상

 

 

공주 신흥리 보살입상. 높이 232㎝의 거불로 신체는 거의 원통형이다. 마멸되어 옷주름과 신체의 세부 특징을 파악하기 어렵다. 얼굴은 둥근 편이며 이목구비가 선명하다. 지나치게 과장된 높이 20㎝의 육계는 머리 전체를 덮고 있다. 가슴은 볼륨감 있고 당당한 편이며 가슴 위로 삼도 중의 한 가닥만 선각되어 있다. 불상의 뒷면은 조각되지 않아 거칠며, 석불의 세부 실측치는 얼굴 55㎝, 어깨 너비 64㎝, 하단부의 너비 60㎝이다.

 

큰 규모에 비해 원통형의 신체 표현과 신체 각 부분의 비례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합장한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어서 특정한 수인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규모에 비해 조각 기법이 뒷받침되지 못한 토착화된 석불상으로 존명이나 조성 시기를 단정하기 어렵다.

 

 

연기 반곡리 약사여래좌상.  1983년 금남면 반곡리 산 32번지의 밭에서 밭주인 진종하가 발견하여 신고한 것이다. 이 곳은 낮은 구릉의 서쪽으로 계단을 이루며 밭으로 이용되는 곳인데, 불상은 밭의 끝부분 언덕 바로 밑에서 비스듬하게 눕혀진 채 발견되었다. 주변지형에 비추어 조그만 사찰이 있을만한 곳이나 사찰로서의 뚜렷한 흔적은 발견하기 어렵고 다만 주위에서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기와편들이 간간히 보일 뿐이다.

 

불상은 화강석재로 높이 70㎝, 어깨폭 40㎝인 좌상인데 머리와 왼쪽무릎 일부가 결실되었다. 비교적 평면적으로 다듬어진 자세로 결가부좌한 위에 오른손은 가볍게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왼손은 중앙으로 발위에 올려놓아 약함을 받치고 있다. 의습은 통견의로 양쪽 어깨로부터 옷자락이 팔목까지 흘러 내리게 하였으며 허리부분에서는 매듭없는 띠를 돌렸다. 목부분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이나 뚜렷하지는 않다. 불상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진열 전시되고 있는데, 전체적인 조각 솜씨와 의습의 표현 및 주위로부터 발견되는 기와편 등으로 비추어 고려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배례석

 

 

공주 금학동 보살입상

 

 

공주 서혈사 비로자나불좌상. 머리, 대좌의 일부가 결실되어 있다. 불상의 현존 높이는 64㎝이며, 어깨 너비는 24.5㎝, 무릎 너비는 75㎝로, 양감이 풍부한 신체 표현을 볼 수 있다. 통견의 대의를 착용하고 있는데, 목에서부터 동심원을 그리며 신체를 타고 내려가는 옷주름 표현이 특징적이다. 지권인인 수인은 가슴 정면에 적당한 크기로 표현되어 있어 신체를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기 쉬운 조형적 한계를 잘 극복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대좌는 원래 3단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상대석과 중대석은 결실된 채 팔각의 하대석만 남아 있다. 하대석 밑엔 역시 팔각의 지대석이 높여져 있는데, 5면엔 사자 및 향로를, 나머지 3면엔 안상을 한 구씩 조각해 놓았다. 불상의 뒷면엔 광배를 꽂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광배공이 하나 있다. 신체의 양감 표현이 뛰어나다. 신체의 굴곡을 어느 정도 드러내면서 전신을 감싸고 있는 통견의 대의는 이른바 우드야나식 착의법의 전형을 따랐다. 가부좌한 하체도 폭이 넓고 볼륨이 있어 불상 전체가 안정감이 있다.

 

공주 반죽동 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은 머리가 없어졌으며, 신체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어 보인다. 오른손을 가부좌한 무릎 밑으로 곧게 내려 촉지인을 맺었으나 어색한 느낌이 들며,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의는 통견 형식이지만 어깨에서 드리운 옷자락을 오른쪽 가슴 쪽으로 약간 여며 넣어 내려뜨렸으며, 가슴을 가로지르는 내의 자락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각각 다른 돌에 조각된 팔각의 지대석과 복련이 새겨진 하대석 위에 안치되어 있다. 한편 폭이 넓고 간엽이 있는 8잎의 복판복련 양식과 사자와 비천 등의 장식 무늬가 새겨진 지대석의 안상 양식은서혈사지의 것과 동일하다. 신체는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에서 보이는 긴장감 넘치는 탄력성이 약화되었고, 숭고미를 찾을 수 없으며, 통견으로 걸친 대의의 옷주름도 얕다. 또한 곳곳에 선각이 나타나는 등 전반적으로 퇴영화 경향이 현저한 통일신라 9세기의 석불이다.

 

 

공주 금학동 석불좌상1. 광배가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둥근 얼굴에 변형 편단우견의 착의법을 보이며, 왼손은 선정인을,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한 모습이다. 소발의 머리에 둥글고 낮은 육계, 양감이 남아 있는 불신, 이에 비해 단순하면서도 도식화된 일률적인 옷주름 등이 특징이다. 결가부좌한 무릎 사이로 옷주름이 꽃잎처럼 모아져 있어 통일신라적인 특징이 남아 있다. 


공주 금학동석불좌상2. 광배가 없는 석조여래좌상 2는 나발이 있는 머리에 육계는 낮고 편평하며 얼굴은 동그란 형상이다. 불신은 밋밋한 편이며, 통견의 대의에는 고른 간격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특징이다. 가슴에는 수평으로 가로지른 내의가 보이며, 그 밑으로 군의의 띠 매듭이 보인다. 반원형의 옷주름이 무릎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금학동 출토 석조여래좌상 두 구는 같은 지역에서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비례나 착의법 등에서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때인 9세기의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형식화가 뚜렷한 점에서 고려시대 지방에서 다수 제작되었던 지역적 특성을 보인다.

 

 

공주 금학동 광배. 화강암 대판석 한 매로 이루어졌다. 현재 잔존 높이는 209㎝로 광배로서는 대형에 속한다. 광배의 중앙부에서 윗부분으로 두광부를 두고 그 둘레에 아홉개의 연판으로 이루어진 연화문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연화문의 외면에는 다시 당초문이 시문되어 있다. 이와 같은 당초문은 신광부에도 같은 수법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당초문의 바깥으로 다시 화염문을 선으로 조각하였다.

 

 

홍성 홍북면 상하리 석불입상. 석불은 가마밭골사지의 불당지 동편 골짜기에 넘어져 있던 것을 주민이 임의로 반출한 것으로 당시 홍성군의 협조로 국립공주박물관에 이전 전시한 것이다. 어두운 색의 화강암 석재에 조각한 이 불상은 머리 부분이 결실된 채 몸체만 남아있다. 따라서 현재의 높이는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 205㎝, 어깨 폭 75㎝이다. 목에는 삼도의 표현이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앞뒤면 모두 U자형의 옷주름으로 표현하였는데 매우 두꺼우며 무릎 밑까지 표현하였다.

 

수인은 홍성지역의 다른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른팔은 곧게 펴서 손바닥을 허벅지에 붙이고, 왼손은 바로 굽혀 왼쪽 어깨에 붙여 손등이 보이도록 하였다. 불신의 아래 부분에는 방형의 촉꽂이(가로 40㎝, 세로 20㎝, 두께 10㎝)가 있어 별도로 만들어진 좌대에 꽂아 세우도록 만든 불상으로, 별석의 좌대에 발을 조각하는 것 역시 홍성지역의 다른 예와 같다. 현재는 불두와 함께 좌대도 전하지 않는다.

 

보문산 약사여래좌상(고려시대 석불)

 

 

보살(?)입상

 

 

주초석 외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2012.06.16

728x90
728x90

'충청남도 > 공주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주...가척리 삼층석탑  (0) 2012.10.05
공주...송학리 마애여래좌상  (0) 2012.10.04
공주...천태산 동혈사   (0) 2012.07.07
공주...계룡산 갑사.  (0) 2012.07.06
[스크랩] 공주...구룡사지 당간지주  (0) 2008.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