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공주...천태산 동혈사

임병기(선과) 2012. 7. 7.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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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중턱에 자리 잡은 동혈사에서 내려보는 풍광이 장관이다. 텅빈 줄 알았던 절집에 스님이 요사에서 가사 다리미질을 하고 있었다. 수없이 절집을 다녔지만 처음보는 그림이어서 슬며시 다가갔더니 미소지으며 법당을 가리킨다. 동혈사는 작은 터에 대웅전, 요사가 일자형으로 자리하고 있는 아담한 절집이었다.

 

대웅전

 

동혈사는 해발 392m의 천태산 중턱에 위치한 동혈사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동혈사에 대한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다.땅에서 7m 높이 쯤에 있는 거대한 바위의 중간에 굴을 뚫었으며, 바위 조각들을 떼어낸 계단을 따라 굴속에 다 다르게 되어있다. 굴의 높이는 2.2m로 몇 명이 들어앉을 수 있다. 동혈사를 구성하는 “혈(穴)”은 현 동혈사의 북서쪽 석괴 중에 위치하고 있다. 석괴의 높이는 약 10m 내외이며, 천태산의 남쪽부를 형성하는 암괴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오늘날 동혈사로 표기되는데 백제시대의 서혈사나 남혈사와 더불어 성립된 석굴사원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절 이름도 지금처럼 동혈사로 부른 것 외에『신증동국여지승람』•『공산지』에는 동혈사(東穴寺)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동혈사가 공주 지역의 혈사, 곧 풍수에 입각하여 창건된 사찰임을 알게 해 준다. 천태산은 ‘동혈산(銅穴山)’ 혹은 ‘동혈산(東穴山)’ 으로 부르기도 한다.

 

동혈사의 창건이 언제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앞서 말한 것처럼 『신증동국여지승람』과『공산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공주지성의 혈사가 방위에 따라 존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어 현존하는 동혈사(銅穴寺)를 동혈사(東穴寺)로 보는데 큰 무리가 없다고 여겨지며, 따라서 초창의 시기와는 다른 곳의 혈사와 같이 백제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현재 동혈사지에 유존하는 유물은 고려 내지는 조선시대의 것인바, 이들 유물로 미루어 동혈사는 백제시대에 조영된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법등을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뒷쪽 암반. 전설속의 바위처럼 보인다. 동혈사의 스님은 탁발을 하지 않고도 굶지 않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위 구멍에서 끼니 때마다 한 끼분의 쌀이 솔솔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스님은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정성껏 올리며 바위구멍에서 나오는 적당량의 쌀을 받아다가 밥을 지어 공양하곤 하였다.

 

바위구멍에서 쌀이 나온다는 소문이 월곡리 마을에 쫙 퍼지게 되었다. 월곡리에는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집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웃 부자침ㄴ구의 덕을 입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후원을 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그는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을 헐뜯고 또 다른 사람들을 모함했다. 그러나 속이 후련하지 못하였다. 빨리 부자가 되는 것만이 앙가품의 지름길이라고 생각이 미치자 그에게 구체적인 묘안이 떠올랐다. 그는 어느날 밤, 흉기를 들고 동혈사로 올라갔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스님이 문을 열고 나왔다.

 

검은 물체를 발견하자 스님은 두 손을 합장한 채 염불을 하였다. 그는 날쌔게 달려들어 스님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쌀이 나오는 바위 틈으로 달려가 다짜고짜로 구멍을 크게 후벼 팠다. 많은 쌀을 단숨에 얻어 벼락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왠일일까? 기다리는 쌀은 나오지 않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갑자기 천둥이 치더니 흉악한 그는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지장,관음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어느 비구니스님 말씀에 의하면 요즈음 작은 절집의 대웅전 석가모니 협시보살은 문수,보현이 아니라 지장과 관음을 모셔야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효자,효부가 찾아와 절집 살림살이가 운영된다고 했다. 아미타불을 새롭게 봉안하거나 불사를 하여 극락전을 세울 수 없는 작은 절집의 불가피한(?) 지혜(?)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동혈사 대웅전에는 4대강 사업 중지를 주장하며 소신한 문수스님 영정을 모시고 있었다. 주지스님과 문수스님이 도반이라고 했다.

 

 

나한전 길목의 석탑. 멀리 보이는 석등 옥개석의 귀꽃이 일본풍이다. 기왕이면 우리의 전통 양식이면 좋으련만.

 

나한전

 

동혈사지 삼층석탑. 본래의 위치는 대웅전 뒷쪽 벼랑끝에 있었으며 그자리에는 기단부만 남아 있다고 한다. 자연 암반을 지대석으로 삼고 8각 기단부를 세웠다. 탑신과 옥개는 각각 1매 부재이며  탑신에는 우주가 희미하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3단이다. 추녀에는 반전이보이고 우동은 약하다. 상륜에는 탑신처럼보이는 부재와 또다른 방형부재를 올렸지만 본래 부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탑신이 좁아 안정감보다는 세장한 느낌이 든다. 이형석탑으로 조성시기는 고려로 전한다

 

기단부

 

자료에는 부도가 남아있다고했지만 스님은 부도가 없다고 했다. 동혈사지는 동혈사에서 내려오면 길가에 안내문이 보인다.현재의 탑의 위치로 보아 풍수지리적 비보탑 성격이 강한 탑이다. 동혈사 역시 공주의 풍수지리적 비보사찰로 네방위에 창건된 사찰의 하나이었기 때문에 한층 더 개연성이 짙어 보인다.

 

 

2012.06.16

 

전통사찰관광정보.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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