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공주...계룡산 갑사.

임병기(선과) 2012. 7. 6.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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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목대신

 

갑사를 다녀온 뒤에 대학노트에 기록해 둔 답사기를 살펴보아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반신반의 하며 마누라에게 갑사 다녀온 기억이 있나? 라고 물었더니 저층 아파트에 살았을 때 두 가구가 아이들과 함께 다녀왔다고 정확하게 집어내어 혀를 내둘렀다.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아이들에 관해서는 한 치 오차도 없이 기억이 뚜렷했다. 정확히 17년전 일이어서 진입동선도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춘마곡추갑사라고 했지만 몇년전 가을에 마곡사를 다녀왔고 늦봄에 갑사에 들렸으니 이놈의 중생 하는 꼬락서니는 언제나 뒤틀려 있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자위하며 무임승차로 주차장을 통과하여 절집까지 진입했다.

 

공주 갑사 일주문밖 고사목.  이 나무를 ‘괴목대신(槐木大神)’이라고 부른다. 매년 정월초삼일 사찰과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불교와 유교식으로‘괴목대신제’를 올린다.

 

*갑사 괴목대신제의 유래 

갑사 입구에는 갑사의 창건과 역사를 함께한 수령이 1600년이 넘는 괴목(느티나무)이 한 그루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갑사 장명등의 기름이 자꾸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스님들은 어느 날 밤에 장명 기름이 없어지는 이유를 밝히고자 숨어 장명등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덩치가 큰 누군가가 기름을 훔쳐가는 것이었다.

 

놀란 스님들은 당장 그 물체를 찾아가니 바로 이 괴목의 당산신이었다. 기름을 훔쳐간 연유를 묻자 당산신은 사람들이 담뱃불로 이 나무의 뿌리에 상처를 냈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갑사의 장명등 기름을 훔쳐다가 발랐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를 알게 된 스님들은 마을 사람들과 괴목의 주위을 잘 정리하였다. 그 후 갑사의 장명등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마을에 돌았던 역병이 없어져 스님과 마을 주민들은 괴목의 당산신에게 매년 정월 초사흗날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나무는 18년 전 태풍으로 부러져 밑동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五嶽 中 西嶽, 고려시대엔 妙香山 上嶽, 지리산 下嶽과 더불어 三嶽中 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鷄龍山의 서편 기슭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갑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들로 하여금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북쪽을 관장하던 다문천왕(비사문천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봉안한 것이 지금의 천진보탑이다.

 

그 후 고구려 승려 阿道和尙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挑李寺를 創建하시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찿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拜臺)에서 예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이다.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天佛殿과 眞光明殿 大光明殿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國中大刹로 크게 번창되었다.

887년(진흥왕 원년) 무염대사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년) 寺僧 인호 경순 성안 보윤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1654년(효종5년)에는 寺僧 사정 신징 경환 일행 정화 균행 등이 중수하였으며,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1875년(고종12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고,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으며 1866년(고종3년) 개금불상한 施主秋가 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로써 그의 활약상은 범우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일주문을 통과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진입하여 처음 맞이한 천왕문.

 

                                                                                범종루

 

현재 갑사의 가람배치는 범종루를 통과하여 정면에 보이는 대웅전 영역, 우측 범종각 방향 공우탑을 지나 대적전 영역 그리고 사적비와 진영이 봉안된 표충원 영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나는 공우탑을 건너 대적전-다시돌아나와 대웅전-표충원 순으로 답사를 하였다.

 

갑사동종각

 

갑사 동종

 

 동종의 높이는 127cm, 구연부 지름은 91.5cm이다. 일제강점기에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에 갑사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음통이 없는 것이 한국 종으로서는 특이한 모습이다. 용뉴는 두 마리의 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머리와 발이 신체에 비해 매우 크게 묘사되어 있다. 종신은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중간부터 구연부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어깨에는 물결 모양으로 꽃무늬를 돌출시켰고, 그 바로 아래 수평선을 양각하여 상하로 나누고 그 속에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는 범자를 촘촘히 새겨 띠를 이루도록 하였다.

 

띠 아래로 4곳에 유곽을 만들고 속에 유두를 9개 씩 새겼다. 유곽은 안팎에 양각한 두 줄의 선을 그어 윤곽선을 마련한 속에 보상화문을 장식하였으며, 유두는 5엽의 연꽃을 바탕으로  가운데서 돋아난 모습이다. 종신 중앙부에는 4곳에 당좌를 마련하였고, 사이마다 석장을 들고 구름 위에 서있는 지장보살을 선각하였다. 당좌는 안팎 두 겹의 양각한 원형 윤곽 속에 연꽃을 조각한 모습이며, 아래를 구름무늬가 받치고 있다. 종신의 아래에는 구연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상하로 양각한 수평선을 돌려 구획한 속에 각종 꽃과 그것을 연결하는 넝쿨을 그려 넣은 띠를 새겼다. 종신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선조 17년에 만들어졌음과 이 절의 명칭이 당시 ‘岬士寺’였던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공사중이어서 들어가보지 못한 간선장. 전통찻집이라고 한다.

 

 

대적전으로 가는 도중 남쪽 계곡을 건너자마자 작은 규모의 삼층석탑이 있다. 공우탑이라 부르는 탑으로 백제 비류왕 4년(재위304~344년) 계룡산 갑사에 속한 암자를 건립할 때 자재를 운반하던 소가 군자 냇물을 건너다가 죽자 그 소를 이곳에 묻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2층과 3층 탑신에는 3층에 ‘功’, 2층에 ‘牛塔’이라는 글자를 음각해 탑명을 적고 있다.

 

 

대적전. 이곳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 갑사가 중창되기 전 원래의 갑사 중심 영역으로 금당터가 있던 옆이다.정면 어간의 현판에 ‘道光六年四月日牧岩書’라는 명문이 있는데, 건축양식으로 본 시대와 부합되므로 현판이 제작된 조선 1826년(순조 26)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청이 퇴락되어 있던 것을 최근에 새로 입혔으며, 1984년에 시도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현판과 달리 석가여래삼존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은 각각 수미좌 형식의 좌대 위에 모셔져 있다. 목조로 된 석가여래상은 결가부좌한 모습의 좌상이다. 상호는 원만하고 육계가 매우 약화되어 있다. 상반신은 빈약한 편이며, 양 어깨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으나 좁은 편이다. 반면에 결가부좌한 다리는 매우 넓게 과장되어 있다. 양 손은 모두 양 발 위에 올려놓고 있다. 범의는 통견이며, 군의(裙衣)는 상반신의 중앙까지 내려와 가슴을 많이 노출시키고 있는데, 법의의 주름은 형식화된 모습을 모인다. 전체적으로 조선말기의 불상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본존 좌우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화관을 쓰고 있으나 영락은 늘어뜨리지 않았고 양 손에 연꽃을 들고 있다. 보살상은 신체의 비례나 조각수법이 본존과 동일하다.

 

 

본존불 뒤에는 후불탱화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그린 탱화를 봉안하였다. 화면을 상하로 나누어 상부에는 신광과 두광을 갖춘 삼여래를 그렸고, 그 아래에 그 권속으로서 보살들을 배치하였다.

 

 

남쪽 측면 벽에는 중단으로서 별도의 불단을 마련하고 신중탱을 봉안했다. 불단은 최근에 새로 만든 것이다. 신중탱은 좌우대칭으로 상부에는 제석천과 대범천을 배치하고, 화면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여러 신중과 사천왕을 배치했다.

 

 

대적전 중정의 부도.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부도 주변에는 고려시대의 초석 몇 개가 산재해 있어  이곳이 창건 당시 갑사의 중심 영역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부도는 지대석과 하대석, 중대석 및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 탑신석, 옥개석 및 상륜부로 구성되며 전체가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신라 말 고려 초에 걸쳐 유행하였던 소위 ‘팔각원당형’ 부도의 기본 형식을 따르고 있는 부도이다.

 

 

탑신석은 각 모서리에 배흘림이 완연한 원주를 새겼고, 원주 상하에 창방과 하인방을 조각했다. 정면과 후면에는 문틀과 함께 자물쇠를 조각함으로서 문을 표현하였다. 문 양옆의 네 면에는 사천왕을 조각하였고, 나머지 면은 아무런 조각 없이 비워두었다. 지붕은 비교적 물매가 급한 편으로 기와골과 함께 막새기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내림마루 역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내림마루 끝에는 곱새기와까지 조각했던 흔적이 있으나 모두 깨져 나갔다. 옥개석 위에는 연봉을 올려 마감했는데, 후에 새로 만들어 올린 것이라 한다.

 

 

지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하나의 돌을 이용해 만들었다. 하대석은 2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부조의 조각으로 가득 채웠는데, 하단에는 팔각형의 각 면에 사자로 보이는 짐승과 함께 인물상을 새겼으며, 상단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채웠다.중대석 역시 2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은 지대석과 면석, 우주, 갑석의 형식으로 된 가구식 기단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상단은 팔각의 모서리에 꽃을 고부조로 새기고, 각 면에 주악천인과 향로를 새겼다.

 

상대석은 현재 위아래가 뒤집혀 있다. 1917년 옮겨오면서 위아래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뒤집히지 않은 상태로 생각하면 상대석 맨 아래는 두 단의 쇠시리를 둔 위로 각 면에 3개씩 모두 24개의 연꽃을 앙련으로 새겼다. 그 위에는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부분이고 그 위로 두 단의 쇠시리를 두었으며, 다시 그 위쪽에 우주와 갑석, 면석을 지닌 목조건축의 기단부를 표현하였다. 갑석 상면에는 복련의 연꽃을 조각한 위로 3단의 나지막한 쇠시리를 두어 탑신을 받칠 수 있도록 하였다.

 

 

답사 동선이 뒤틀렸다. 부도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철당간이 보인다. 지주는 지대석과 기단석 및 두 개의 지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간은 24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라 문무왕 20년(680년)에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양식상 신라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단부의 대석은 땅 속에 매몰되어 있다. 기단은 두 개의 커다란 장방형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과 후면에 각 3개, 양 측면에 각 2개의 안상을 음각했다. 안상의 모습은 신라의 안상 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기단석 상면에는 두 개의 돌을 잇기 위한 시설로 철제의 비녀장을 박았던 홈이 남아있다. 동서로 맞서 있는 두 개의 지주는 기단석 상면에 마련한 홈에 끼워 넣어 세워져 있다.

 

 

정면에서 보아 위의 너비를 아래에 비해 약간 줄였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맨 위는 평평한데, 바깥쪽으로 접은 모서리는 활 모양을 그리며 원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지주 상부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공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철제 당간의 다섯째 마디 철통을 철띠로 돌려 고정했다. 두 지주 사이 기단석 상면에는 원형 쇠시리 한 단을 두어 당간받침으로 삼았다. 철제 당간은 직경은 50cm 정도의 철통 24개를 연결한 것이다. 원래 철통은 모두 28개였으나 1893년(고종 30) 7월 25일에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석조약사여래입상

 

대적전을 돌아나와 대웅전 영역 전에 우측에 모셔진 불상이다. 불공을 드리는 보살님들이 계셔서 사진 촬영하기가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갑사 사자암에 있던 불상이라고 한다. 신체의 비례와 구성,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상호는 갸름하고 긴 편이며, 위에 커다란 상투 모양의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리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신체는 어깨가 상호에 비해 넓은 편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을 약간만 노출시키고 있으며,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강당

 

대웅전 구역에 있다. 원래 현재의 강당 자리에는 해탈문이 있었고 강당은 대웅전 쪽으로 더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중수불사로 앞쪽의 해탈문을 없애고, 그 자리에 강당을 옮겨지었다. 비좁은 대웅전 앞마당을 넓히기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 배치상의 변화로 보인다. 이렇듯 강당을 옮겨짓게 됨에 따라 강당은 그 하부 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원래는 사면 모두 동일한 높이의 마당과 접하고 있었고, 바닥의 높이가 낮았다. 그러나 옛 해탈문 자리로 옮겨오면서 강당 전면을 축대 바깥으로 돌출시켰고, 이에 따라 전면에 누하주를 첨가함으로서 누각형식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건에 따라 누하주가 첨가된 것을 제외하면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이나 양통의 전후 툇간을 좁혀 잡아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내부는 내주(內柱)를 사용하지 않은 통간으로 구성하였다. 전면과 후면에만 창호를 달았고 양 측면은 모두 벽을 쳐 막았다. 전면에는 어간에 사분합문을 달았고, 양 협간에 두 짝의 판문을 달았으나 사분합문은 개수로 원형을 잃은 것이다. 후면 - 대웅전 마당 쪽에서는 정면에 해당 - 에는 세 간 모두에 사분합문을 달았고, 이 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면의 외부를 향해서는 폐쇄적인 창호를, 후면의 대웅전 앞마당을 향해서는 개방적인 창호를 둔 것인데, 이것은 대웅전 앞마당을 중심으로 한 중정형의 배치구성에 따른 공간 이용의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정형 배치를 이루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영된 많은 사찰의 강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호 구성이다.

 

 

1887년(고종 24) 충청감사 홍재희(洪在羲)가 쓴 ‘계룡갑사(鷄龍甲寺)’ 현판

 

 

대웅전 중정. 문열린 전각이 강당 정면이다.

 

 

강당. 안내문에 표기된 석조보살 입상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종무소의 근무자도 스님도 약사여래입상을 거론할 뿐 보살입상의 존재유무를 알지 못했다. 돌아와서 자료를 검색해보았더니 보장각과 진해당에 모셔져 있다는 두 개의 기록이 보인다. 갑사 답사 기회가 있으면 직접 확인 바란다. 참고로 월인석보판본이 보관된  보장각에는 무서운 멍보살이 지키고 있다(전각을 말하는지 새롭게 조성한 보장각을 이르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보살입상이라고 했지만 사진으로는 여래상으로 보여진다.

 

*월인석보판본*. 1569년(선조 2)에 새긴 월인석보 판목은 우리나라에 남은 유일한 것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나서 한글을 이용해 처음으로 지어낸 글인만큼 국어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월인석보는 1459년(세조 5)에 세조가 세종이 지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 부분으로 하여 합편한 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공덕을 칭송한 것이다.

 

강당의 윤장대

 

갑사의 중심 지역은 현재 대적전 부근으로 대웅전도 그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갑사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후 1604년(선조 37)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중창하면서 대웅전을 이곳에 짓게 되었고, 그 이후 이곳이 갑사의 중심 지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사사적기에 1604년(선조 37)에 갑사를 중창하면서 대웅전을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건축양식이 17세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웅전은 이때 중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654년(효종 5)에 갑사에 중수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 대웅전도 중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1875년(고종 12)에 중수가 있었다. 최근에는 1991년에 보수공사를 실시한 바 있으며, 1984년에 시도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에는 어간과 그 좌우 협간에 4분합문, 툇간에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양 측면에는 전퇴에 쌍여닫이문을 두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후퇴에는 두 짝의 판문을 달았고, 후면에는 어간과 북쪽 툇간에 두 짝의 판문을 달았다. 나머지에는 모두 판벽을 들였다. 지붕은 겹처마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대웅전 현판에  ‘康熙八年己酉六月日書’라는 명문이 있어 1669년(현종 10)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소조삼계불

 

석가여래. 넓적한 얼굴에 반개한 눈으로 당당한 어깨에 법의는 우견편단이다. 결가부좌, 수인은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무릎의 두께가 상체에 비하여 얇아 안정감을 상실하였고 옷주름도 형식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뒤에는 석가후불탱 모본이 이 걸려 있고 좌우에는 문수와 보현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삼계불 후불탱(문화재청을 비롯 모든 자료에는 삼세불로 명기되어 있다). 영조 6년(1730)에 영산회상도와 아미타회상도, 약사회상도 등 3폭으로 조성되었으나 우측에 봉안되었던 약사회상도는 분실되어 영산회상도와 아미타회상도 2점만 남아있다. 2폭 모두 대형의 작품으로 직지사 대웅전 삼세불화(1744), 쌍계사 대웅전 삼세불화(1781)와 더불어 조선후기 삼세불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화기에 '의겸 비구, 취상비구, 명선비구' 등 제작에 참여한 금어들의 명단이 남아 있다.

 

약사여래. 방형의 긴 얼굴에 반개한 눈으로 통견의 법의에 결가부좌하였다.

 

 

아미타여래

 

현왕탱

 

대웅전 측면과 후벽에 삼장탱.신중탣.현왕탱 모본이 걸려 있다. 이러한 것은 조선후기 열악한 환경의 사찰에서 불전이 그 본래 목적 외에 다양한 예불의식을 모두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생긴 경향이라고 전한다.

 

 

대웅전 업경대. 업경대도 명부전이 제자리이다. 목조의 동물상 위에 커다란 연잎을 새겨 받침을 만들고 위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한 타원형안에 징 모양의 철제 거울을 걸어 놓았다.

 

 

괘불함

 

갑사 삼신불괘불탱...출처/문화재청

 

국보298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그림은 길이 12.47m, 폭 9.48m의 크기로 전체적으로 상·중·하 3단 구도를 이루고 있다. 맨 윗부분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제자상, 금강역사상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비로자나불, 석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묘사되어 있고, 맨 아래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 사천왕상, 사리불 등이 있다.

가운데부분의 비로자나불은 등뒤로 광배를 가지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 두 어깨를 감싼 옷을 걸치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큰 얼굴과 큼직한 손에 비해 몸은 다소 왜소하며 어깨에 비해 무릎 폭이 넓은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의 왼쪽에 있는 노사나불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석가불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손모양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은 기둥처럼 솟은 특이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맨윗부분은 붉은 색의 두광을 가진 관음·세지보살과 십방제불, 나한 등이 화려한 빛깔의 구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천상세계를 만들고 있다. 비교적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맨아래부분은 사천왕과 문수보살·보현보살, 사리불이 배치되어 있다. 채색은 녹색, 홍색, 황색과 같은 중간 색조와 금으로 채색하여 화면 전체를 밝고 화려하게 나타내었다.

 

이 괘불은 효종 원년(1650)에 제작되었는데 중단의 삼신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그림에 괘불 조성에 필요한 많은 물품의 시주자를 적어놓고 있어 17세기 중반의 생활상과 사찰의 재정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중사자암지 삼층석탑. 갑사 대웅전의 향적당에 자리하고 있어 까차발로 바라보았다. 갑사에 딸린 암자인 사자암에 있던 것을 대적전 뒷면에 옮겨 세웠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긴 탑이라 한다.

 

탑신은 각층 모두 우주만 새겼을 뿐이며, 2층에서 그 높이와 폭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옥개석은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아래에 3단의 층급받침이 있다. 처마는 모서리로 가면서 완연한 곡선으로 반곡되어 있고 지붕면의 물매는 완만한 편이다. 탑신과 옥개석에서는 신라계통 석탑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규모가 매우 작고 특히 기단부가 약화되었다.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한다.

 

 

대적선원 옆 부도

 

 

표충원.휴정.유정.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이다.

 

영규대사

 

영규대사는 갑사에서 출가하여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어 항상 이절에서 주석하고 있었는데,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해 여름에 왜구가 청주지방까지 이르러 청주가 점거 당하자 이에 영규대사는 승려 700명을 엄격히 선발하여 승군을 일으켰으며 청주지방의 승려 300명도 참여한 1000명의 승군으로 홀로 싸웠다. 8월에 영규대사의 승군이 청주를 쳐들어가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왜병과 싸워 청주를 되찿았다. 한편 금산에 있던 초토사 고경명 군대가 고바야가와의 왜군에게 패전하여 왜군이 창궐하고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려 하자 영규대사는 조헌과 함께 진군하여 곧바로 금산의 외곽에 진영을 갖추고 있을 때 왜병이 쳐들어와 조헌이 먼저 전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와 의병들이 전의를 잃고는 의병장 조헌이 이미 죽고 적은 더욱 기승을 부리니 물러섬만 같지 못하다고 패퇴를 간청이 있었으나 오히려 영규대사는 그들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게 되면 죽는것이거늘 어찌 홀로 살겠다고 하겠는가라고 크게 호통을 치고는 흐트러진 전력을 다시 가다듬어 사력을 다해 종일 토록 싸웠으나 그 또한 전사하였다. 이로써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왜병과 싸움으로써 왜군의 호남침공을 끝내 저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을 일으킨 것은 영규대사가 처음으로 그 뒤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그의 충의를 포상하여 복국우세기허당일합대선사를 추증하고 당시의 뜻을 기리도록 갑사에 표충원을 세워 휴정과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영규대사비

 

 

팔상전

 

 

팔상전에는 석가모니불과 팔상탱화, 그리고 신중탱화를 모시고 있다. 팔상탱화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며, 신중탱화는 불교의 호법신을 묘사한 그림으로 호법신은 대개 우리나라 전통의 신들이다.

 

 

팔상전 신중탱화

 

 

조선 현종 원년(1659년)에 세운 것으로 갑사의 창건과 역사를 적고 있다. 비문은 여주 목사 이지천이 짓고 전 공주목사 이기징이 글씨를 썼다. 전체 높이는 337cm이고, 비신은 높이 225cm, 너비 133cm, 두께 49cm이다. 천연의 바위 위에 홈을 파고 바로 비신을 세웠으며, 위에는 지붕형의 옥개를 올렸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에는 사면에 비문을 새겼다. 정면과 후면 상부에는 전면에 6자, 후면에 5자로 나누어 ‘公州鷄龍山甲寺' 문장 속에서는 '岬寺'라 적고 있다.

 

 

'事蹟碑銘’이라는 비명을 전서체로 써서 새겼다. 비문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나 일부 손상된 부분이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비석 속에 금이 들어 있어 그것을 파내기 위한 소행이었다고 한다. 비의 좌측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시주자, 석공, 각공 및 야장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사적비 옆. 부도전

 

 

답사가 아니더라도 가족들과 여행 기회가 있다면 만추에 이른바 갑사구곡을  찾으면 좋을 듯하다. 갑사구곡은 계룡면 국립공원에 있는 계곡으로 용유소, 이일천, 백룡강, 달문담, 군자대, 명월담, 계룡오암, 용문폭포, 수정봉을 말한다.

 

갑사(甲寺) 입구...나태주 

내가 사람들 데리고 와
거짓말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소나무 푸른 솔 이파리 바늘은 시들고

내가 또
욕지거리 한 마디씩 지껄일 때마다
소나무 푸른 솔 이파리 바늘은 병들고

또 내가
나쁜 생각 한번씩 할 때마다
소나무 푸른 솔 이파리 바늘은 땅으로 떨어져

이제는 바람이 몰려와도
쏴쏴 저승의 바다 물결소리
받아 외울 줄도 모르는
갑사 입구의 소나무

팔다리 내어준 민둥 몸으로
술 취한 노을에 기대어
다만 속울음 삼키고 있음이여.

 

2012.06.16

전통사찰관광정보.갑사 홈페이지.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를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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