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스크랩] 공주...마곡사

임병기(선과) 2008. 6. 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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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춘마곡추갑사라 했거늘 봄날 마곡사는 인연이 아닌듯 하다. 시절연이 맞은들 뒷짐지고 즐길 여유는 고사하고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놈이 꽃피고 새우는 봄날 마곡사의 정취를 알기나 하겠는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런 일란성 멍청이와 동행이라면 가던 길 팽개치고 개울가 바위에 걸터 앉아 사춘기 소녀 가슴 모양의 꽃봉우리에 젖어 '상춘곡'의 정극인이 되어 보련만, 아지랑이가  저 산을 넘어 왔더라도  이내 심사는 춘래불사춘이다.


해탈문

 

알다가도 모르겠다. 속세의 풍진을 떨칠 마음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해탈문이다. 사천왕도 금강역사도 소임을 다하고 극락왕생해버렸나?

 

마곡사는 크게 두권역으로 구별된다. 극락교로 연결된 개울을 중심으로 대웅보전 영역과 영산전 영역이다. 산지 중정에서 주어진 자연환경을 활용한 선택으로 팔공산 동화사, 두륜산 대흥사등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영역을 이해하더라도 진입공간은 의아스럽다. 대웅보전은 전각 뒤로가 아니고는 진입이 불가하여 영산전 영역의 해탈문을 거쳐야 한다. 구태여 길게 돌아서 진입동선을 조성한 이유가 있었을까?

그 단초로 마곡사는 명당 길지가 아닌 지리산 자락 청학동 형국처럼 전란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우리나라 십승지 풍수와 관련이며, 다른 이유로는 영산역 영역이 먼저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싶다.

 


천왕문

 

오~잉????????? 연타를 가한다. 이래도 니놈이 갖고 있는 알량한 밑천 버리지 않을래?라며 사천왕이 눈을 부아리며 위협을 가한다. 해탈의 경지에 든 몸인데 사천왕의 불심검문이 왠 말일가?

지붕 위계도 해탈문 보다 한 수 꺽이면서...

 


영산전

 

마곡사 수행공간의 중심 영산전이다. 해탈문, 천왕문, 극락교,  대웅보전으로 연결되는 중생교화 공간과 선을 구획하기 위해 높은 지형에 자리하지만 담장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세조(世祖:1417∼1468)가 잠시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일화가 전해지는데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 이곳에 은거하였으니 그를 만나고자 행차한 길이었다.

 

그러나 김시습은 세조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곡사를 떠났으며 세조는 ‘김시습이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 연을 타고 갈 수 없다' 하여 소를 타고 떠났다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세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세조의 친필인 영산전 편액과 세조가 올 때 타고 온 세조대왕연(世祖大王輦)이 그것이다"라고 한다.


명부전

 

처마선이 눈에 쏙 들어오는 수행공간에서 유일하게 참배 가능한 공간이다. 엄격하게 구분된 마곡사 공간배치에서 교화영역에 자리할 명부전이 수행공간에 위치한 까닭은 뭘까?

 

처음부터 이 위치에 있었거나, 교화공간의 부족으로 판단되지만 참선 영역을 철옹성처럼 구축하는 것 보다야 은근 슬쩍 드러내고, 명부전 중정에서라도 바자울 너머 참선 공간을 기웃거리라는 배려로 생각하면 굿 아닌가?

 


범종루

 

참 편한 세상이다. 거친 풍파 이겨내고 반야용선에 몸을 싣지 않고 극락교 다리를 건넜다. 최근까지만 해도 十자 범종루는 완주 송광사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통영 미래사를 비롯 마곡사에도 불사를 마쳤다. 하지만 좌체우용에 의거 반대방향에 자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오층탑

 

대광보전 중정에 자리한 오층탑은 다른 탑과 달리 상륜부의 형식으로 인해  원나라 영향을 받은 라마교 양식 고려말기 탑이다. 신라탑에 익숙한 놈에게는 멀쑥한 옥수수대처럼 보여 바람불면 날릴 듯 불안하다. 

3단 지대석, 2기단, 한쪽면에 문비를 새긴 1층 몸돌에는 고려 특징인 방형 받침이 보인다. 지붕돌이 좁고 물매가 얕으며 반전이 심하다. 

 

 

이층 탑신에 새겨진 불상이다. 멀쑥한 미스 고려 탑이라고 멋이 없겠는가? 

 

 라마교식 상륜부와 처마 끝 풍탁(風鐸) 하나. 

대광보전

 

 현판은 표암 강세황(1712~1791년) 글씨라고 한다.  건물은 대웅보전  낮으며 막돌허튼쌓기 기단,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처럼 불단을 서쪽에 배치했다.

 

부석사처럼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미처 모든 전각이 복원되지 못 한 상태에서 불보살을 한 전각에 모신 후 예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전해진다.


오층탑, 대광보전, 대웅보전

 

사진 좌측 대광보전 옆에는 예사롭지 않은 향나무 한그루가 있다.  백범이 명성황후 시해범을 살해 후 이곳에서 은거하여 지낸적이 있는데 해방 후 찿아와 심은 나무라 한다. 


대광보전 비로자나불

 

동향하고 계시는 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불. 보살님의 성화로 사진촬영을 못했지만 바닥 참나무 돝자리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않은뱅이 하나가 이곳에 와서 ‘참나무로 정성을 다해 자리를 짜 드리겠으니 다리를 낫게 해주십시오' 하며 비로자나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한다. 기도를 드리며 참나무껍질로 정성스레 자리를 짜다보니 마침내 백일이 되었고 그날 않은뱅이는 자리짜기를 완성 했으며 마침내 걸어나갔다는 전설 이다."


심검당

 

심검당은 외벌 기단, 덤벙 주초석 위에 방.원형 기둥,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심검당의 정확한 건립은 모르지만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년에 고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전해진다.

고방

 

 一자형 구조인 고방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사세가 번창했던 시절의 장면장면을 추측해 볼 수 있는 2층 창고 이다. 아랫층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룻바닥이라 한다.  담넘어로 보이는 고방. 쌍으로 걸쳐진 이층계단이 눈길을 끈다. 

 

사진에 보이지 않지만 옆에 있는 굴뚝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에 은거한 신자들이 옹기를 굽던 가마굴뚝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대웅보전

 

마곡사 교화공간의 중심건물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모든 전각을 품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 글씨라 한다. 17세기 건물로 알려진 다포식  중층건물로 아랫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윗층은 3칸 2칸 건물이다. 


 

대웅보전 삼존불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협시불이다. 내부에는 무량사 싸리기등처럼 전설하나 간직하고 있으니 "기둥을 얼싸안고 한바퀴 돌면 수명이 6년 연장된다는 것이다."


 

대웅보전에 들려서도 기둥을 돌지 못 했으니 주어진 생명 열심히 살면 6년 연장 보다 낮지 않겠는가?

긴 하루 일정을 정리해야 할 시간에 바라본 지붕선이 이런저런 상념에 젖은 내마음을  안온하게 침잠시킨다.

 


2007.03.12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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