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김제시

김제...월촌 입석

임병기(선과) 2012. 4. 20. 07:41
728x90

 

 

 

마을 입석에 대해서 우리카페 님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월촌 입석 역시 풍요, 경계석 역활 외에 백제시대 벽골제를 시축한 기념으로 세웠다는 설이 전해 내려온다. 윗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확실치는 않으나 사람 얼굴 형상 같은 것이 표현되어 있다. 매년 음력 1월 15일에 당산제를 지낸 뒤 남녀로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줄다리기가 끝난 뒤에는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는데, 줄에 손을 대면 불행이 생긴다 하여 다음 제사가 있는 1년간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민속신앙에서 암줄과 숫줄를 끼워 편을 나누어 진행되는 줄다리기는 성행위로 묘사된다. 행위 자체는 마을사람들의 즐거운 한바탕 축제의 장이된다. 하지만 승리자는 항상 땅=음(陰)=여성=풍요의 상징성으로 여성이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민속이지만 예전에는 모든 마을에서 행해졌던 정월초하루부터 시작된 세시풍속의 피날레로 일년중 음의 기운이 가장 강한 정월대보름날 동제와 함께 우리민족의 풍속이었다.

 

 

2004년 4월 19일 벽골제 답사기를 가져온다.

귀신사를 나오면서 보령의 무영탑 이모님께 전화를 올렸더니 "어디냐? 빨리 오라시며" 전화를 받으신다. 맘이야 내쳐 달려 가고프지만 김제평야를 달려서 벽골제를 가야하기에 맘의 분주함으로 일망무제의 들판은 물론,호남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농민의 꿈과 한이 어린 모정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3인 딸이 초딩 시절에 3박 4일의 여정 중 이곳을 들렸으니 족히 10 년이 된 듯한 추억 -- 지자체 축제가 "지평선"이라는 고운 이름, 소달구지 타기와 메뚜기 잡기 체험"--이 떠오르는데 지금도 존속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애달프다.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지와 더불어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벽골제는 당시에 김제평야의 원활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어쩌면 국가의 중요 기반시설에서도 최우위를 점했겠지만 이제는 옛시절의 전설과, 수문의 흔적만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지자체의 노력이 돋보이는 시설을 복원하여 나그네의 발길을 머무르게 한다.

김제의 옛지명이 백제 땅이던 시절에 벽골군이었으며 벽골은 벼(稻)의 골<벼골의 둑<벽골제라는 지명으로 변천되었다는 안내문을 읽으며 들어서니 "김제 들판은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 내고 있는 곳이다."라는 글을 새긴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비가 맞이해주지만 일제강점기의 수탈의 역사가 떠올라 울화가 치민 것은 나만의 감정일까?

맞두레, 무자위 등 이름도 생소한 농업기구를 눈에 담으며 둑위를 거닐어 보지만 어디에도 벽골제의 흔적은 없고 "장생거"라는 수문만이 그시절의 민초들의 삶을 담고서 외로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어찌 벽골제를 조성하기 위해 동원된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흔적이 없을거야는 나의 맘을 꿰뚫은 듯이, 인부의 일일점검 용도로 만던 "되매미"라는 논, 인부들이 닳아서
버린 짚신이 산을 이루었다는 "신덜미"라는 지명, 제주장정이 일하던 곳 이라는 "제주방죽"이 현재도 남아 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둑밑 길은 음력 9월 유시,술시에 청춘남녀가 이 길을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짐은 물론, 세세손손 만세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단야로이다.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 단야의 전설속으로 들어가 보자. 예로부터 국가적 사업을 비롯 주요행사에는 꼭 처녀를 바친다는 전설이 방방곡곡에 전해오듯이 벽골제 축성과 관련해서도,둑의 완공 싯점에 제방이 자꾸만 붕괴되는 것이 처녀를 용추에 바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 동원된 인부를 비롯 모두들 태수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자 김제 태수 유품은 자신의 15살 된 딸을 바칠려고 딸인 단야 낭자 몰래 계략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이런 국가적 공사에 서라벌에서 파견온 토목 감리자인 원덕랑은 단야와 사랑에 빠져 있어서 태수의 계략을 거부하며 단야를 보호하던 차에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낭자가 서라벌에서 김제로 오게되고, 단야 낭자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계략을 인지하게 되어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기를 제물로 바치면 간접살인을 하게 되는 부모의 살인을 막고,또한 사랑하는 원덕랑이 약혼자인 월내낭자와 백년 가약을 맺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스스로 용추에 몸을 던지게 된다. 단야의 희생으로 벽골제는 무사히 준공을 마치게 되자 사람들은 단야의 혼을 달래기 위해 단야가 죽은 날에 제사를 모시게 되며. 그 기간중에 단야의 혼을 위로하며 길을 걷는 이들은 사랑을 이루고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전설이지만 아름다운 자기 희생 아닌가? 물론 전설의 이면은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인부들을 달래기 위한 방편의 일환이었을 것이며, 둑을 후세까지 붕괴를 막고 보존하기 위한 농민들의 벽골제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 이라고 여기면 좋을 듯하다. 단야낭자를 모신 단야각 앞에도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민속놀이인 줄다리기에 사용했던 줄이 월출입석에 칭칭 감겨져 있지만,고향을 떠난 월출마을의 입석이  싫지 않는 것은 단야낭자에 이미 빠져버린 나의 심사 때문이리라!

젊은 청춘남녀여!
사랑을 이룰려거든 어이어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김제벌 벽골제 단야로를 거닐 지어라!!!  [2004.04.19]

 

2012.03.11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