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김제시

김제...승가산 흥복사

임병기(선과) 2012. 4. 22.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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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복사는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온 보덕이 창건하여 승가사라 하였다. 한때는 도교가 성행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당시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도교를 도입해 한창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그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은 곧이어 불교도량으로서의 기반이 확고해지면서 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한다. 아쉬운 것은 창건 이후 조선중기까지의 연혁이 거의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뒤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절은 완전히 불타버려 절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1625년(인조 3) 김제에 살던 흥복(興福)처사가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이 절을 기원도량으로 삼아 극락전을 중건하면서 다시 법등을 잇게 되었고, 절의 이름을 흥복사라 불렀다. 또한 전통사찰관광정보 자료에 보면 흥복사는 1954년 불교정화운동 본부가 된 후 월주 스님과 전강스님 등 많은 선승이 주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절집에 빗장이 걸린 대문을 달았을가? 비록 낮지만 죽담은 무슨 연유일까? 화기에 약한 가람을 비보하기 위한 비보책으로 대문과 담을 건 사찰은 경북 군위 수태사가 있고, 구례 천은사 일주문 담장도 역시 화기를 누르기 위한 비보책의 일환이다. 비보책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담과 대문으로 인해 평지가람이면서도 산지가람의 안온함을 풍긴다.

 

 

빗장이 걸린 대문은 사천왕문이었다. 지물이 결실, 훼손되었고 얼굴에도 검은 색깔이 묻어 있다. 마치 춤추고 있는 허수아비 모습의 서방광목천왕과 북방다문천왕 이다. 왜 이런 유례가 없는 모습일가?

 

 

대부분 사찰 사천왕 배치에 따랐으며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이다. 역시 얼굴에는 검은 색조가 묻어있다. 그연유는 나중에 알았다. 다른 절집과 달리 사천왕 뒷편에 불기 2521(내나이 21살 때이다. ㅎㅎ)년에 제작한 사천왕 탱화를 봉안하였다.

대웅전

 

옛스런 멋이 떨어지는 대웅전.

 

 

대웅전 앞 문화재 안내문과 달리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지장과 관세음 보살을 모셨다. 내가 만나러 온 삼계불은 어디로 갔을까? 대웅전도 불상도 근자에 새롭게 모신듯 보인다. 대웅전을 나와 요사에서 스님을 찾아 그 연유를 물었더니 들어오라며 인법당 문을 열어 주었다.

 

 

 뒤로 넘어 갈 뻔했다. 숨이 막히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내가 찾았던 삼계불을 이런 모습으로 뵙다니. 나도 모르게 예를 갖추고 삼배를 올린 후 겨우 마음을 잡고 물었더니 7년전 화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정 문화재 복원은 쉽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말씀인가? 그럼 숭례문은? 낙산사는? 문화재청의 지원이 없다면 성공한 지자체 행사로 회자되는 지평선축제 예산의 일부를 전용하면 될텐데..  1,2년도 아니고 무려 7년을 배짱 좋게도 이런 모습으로 방치하고 있단다!!!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상을 모셨는데, 가운데 주존불은 석가모니불좌상이고 좌우에는 중생의 고뇌를 구제하는 약사여래상과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여래상을 봉안하고 있다. 제작한 연대는 1676년(숙종 2)이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이다. 각 불상의 높이는 1m 내외이다. 석가모니불은 몸체에 비해 머리와 손이 유난히 큰 편이며 투박한 모습이다. 석가모니 좌우에 있는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는 크기는 비슷하지만 옷과 손의 모습이 서로 대칭을 이룬다. 조선후기 불상양식을 고찰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불상들이다."

 

이제 천왕문 사천왕 얼굴의 그을음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가?

 

 

"석불입상은 머리 위에 사각형의 얇은 판석재 보개가 탑 모양으로 올려져 있는 석불로, 보관이 없고 머리와 보개가 직접 맞닿아 있어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하층의 보개 모서리에는 운문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후에 보수된 것이다. 머리와 신체의 비율이 1:1에 가까울 정도로 과대한 얼굴 크기와 아기 모습의 수인, 그리고 투박한 조각기법 등에서 민예적인 작풍이 역력하다. 얼굴은 머리에 비하여 턱이 넓고 목이 짧아 둔중한 느낌을 준다.

 

 

 양미간 사이에 양각된 백호가 강조되었으며, 긴 코와 짧은 턱, 뚜렷한 인중, 두툼한 입술 표현 등에서 조선후기적인 특징이 엿보인다. 얼굴 크기에 비해 귀가 지나치게 작게 표현되어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짧은 목에는 층단식으로 삼도를 표현하였다. 볼륨이 없는 괴체적인 신체에는 통견으로 걸친 사다리꼴 모양의 대의깃과 수평적인 내의 자락, 띠매듭, 손가락을 펴서 맞댄 아기 모습의 두 손, 폭이 일정한 치마의 수직 주름 등이 도식적으로 새겨져 있다"...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설천

 

<전북고적>에 의하면 경내에는는 수령 500년이 넘었다는 신단목(神壇木),  김제로 부임한 수령마다 길러다 마셨다는 설천(雪泉)이라는 맑은 우물,  청자기와를  흥복사의 3대 보물로 꼽았다고 한다.  1960년에 편찬된 <전북고적>에는 창암 이삼만이 쓴 현판 1매가 극락전에 걸려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대구에 있는 어느 사찰에 있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온다고 한다.

 

설천과 신단수

 

화마를 피해가지 못한 신단수. 세월에 묻혀버린 극락전과 청기와는  얼마나 많은 인연이 오고간 후에 출현할지 모르지만  삼계불은 한시바삐 제모습을 찾아 제자리에 모셨으면 좋겠다. 더이상의 방치는 우리모두의 무성의 무관심이 낳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다!!!

201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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