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김제시

김제...모악산 금산사

임병기(선과) 2012. 4. 17.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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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주차장에서 금산사로 들어가는 초입. 많은 순례객과 탐승객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전각이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금산사 소속의 전각도 아닌듯 관리에서 벗어나 그을음이 가득하며 오늘도 비속비승의 집도로 보살님의 끊임없는 절이 이어지고 있어 차마 문을 열지 못했다. 사찰의 국사단도 아니며 사찰 입구에 자주 보이는 돌무더기인 조산탑 또는 성황당으로 이름하기도 마땅치 않다.

도굴단두목님 사진

 

우리의 사찰이 민속과 습합되어 고유의 전통을 수용했듯이 민속과 사찰의 연장선에서 이해가 된다. 전각에 봉안된 석불입상으로 미루어 더더욱 확신이 되지만 차라리 노출시키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모악산이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모악(母岳)이라고 불리고 있는 까닭에 기자신앙의 예배처로서 숭배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저런 상념을 접고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 금산사의  차량 출입 허가를 받아 쾌재를 부르며 가속기에 발을 올렸다.

 

견훤성문

 

여기서 2004.04.19일의 답사기를 뒤져보자. 미륵성지 금산사에 대한 신영복님의 글(답사기 끝부분 참조)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알짱한 답사기를 올리려니 눈속임 같고 말장난 같으며,우수마발 모든 것을 미사여구로 포장한들 그것은 전부 사족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금산사에 어린 역사의 자취와 사상을 배제하고 현존하는 문화재에 대하여 훗날 답사를 가시는 님들을 위하여 간략히 올리겠다.

월요일은 조용할 줄 알았는데 주차창은 관광버스로 만원이더니 역시 대낮부터 술에 취한 관광객들과 소풍나온 어린아이 들로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렇게 풍요로운 세상인데 도솔천에 계신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3회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하러 오시겠는가? 애써 그들을 외면하며 견훤이 쌓았다는 견훤성문(甄萱城門) 앞에서 신검을 비롯 본처의 아들에게 감금당했던, 미륵불을 자처했던 견훤을 떠올리며 만약에라는 역사의 가정에 몰입하며 후백제의 몰락을 되짚어 보았다.

화려하게 불사중인 일주문을 지나니 예전의 일주문이 해체중이다. 뭐! 복고창신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며 기단까지 완벽한 당간지주를 거쳐 금산사 중정에 올라서니 어지로운 가람배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건물에서 풍기는 중압감일까? 무의식적으로 발길이 미륵전으로 닿는다. 금산사가 미륵도량임을 알려주는 미륵전은 1층에 대자보전, 2층에 용화지회, 3층에 미륵전 현판이 걸려 있지만 미륵의 다른 표현일 뿐 모두 미륵을 상징한다.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는 3층 통층 건물로 미륵장육상을 주불로 법화람보살과 대묘상보살을 협시로 모신 불상은 크기로 인해 닫집마져 설치할 공간도 없다.

보살님의 허락을 받아 "한번 만지면 속세의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성취가 된다는" 주불 지하의 솥단지를 더듬으며(원래 미륵전의 주불이 철조이며 솥단지는 철조 연화대좌란 말도 있다) 미륵전이 용이 살던 연못이었다는 전해오는 설화 속으로 빠져 보았다. 백제의 역사와,피정복지의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며,미륵하생을 염원하는 민중의 바램으로 인해 호남지방에 미륵신앙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말 하지만,다른 각도로 보면 전국 많은 사찰에도 창건 설화에는 용,그것도 사악한 용이 등장하지 않는가?

 

용은 물을 관장하는 동물로 고대의 사람들,특히 평야가 넓은 호남,그중에도 김제지역 사람들에게 생활의 전부랄 수 있는 치수(治水)문제로 인해 불교도래 이전부터 용신앙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용의 고어(古語)가 "미르"임을 돌이켜 볼 때 미륵과 미르가 전혀 관련이 없을까? 밝힐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용신앙 위에 불교를 전파하는 과정에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면 억지에 불과할까?

미륵전을 나와 지대석,이층기단의 점판암으로 조성된,10.11층에만 몸돌이 있는 고려초의 6각 다층탑 앞에서 "6"의 의미를 새겨본다.석등의 간주,연화대좌의 팔(8)각은 피안에 다다르기 위한 수행자의 팔정도를 의미하듯이, 6이란 숫자도 6바라밀,육도윤회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헌데 눈 앞에 놓인 석련대는 또 무엇인고? 미륵전 지하의 철조대좌의 흔적으로 보아 철불이 미륵전에 있었는데,그럼 어느시점에서 석조 미륵불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맘이 편하지만,세월 속에 감추어진 사연을 알 수 없다.대장전 앞. 상대의 두터운 앙련이 인상적인 신라 팔각원당형 석등을 어루만지며, 대장전 용마루의 탑 상륜의 노반,복발,앙화 같은 장식물이 이채로워 안내문을 보았더니 대장전이 본래 가람 중정에 있었던 목탑을 상징한단다. 더욱이 대장전의 석가모니불의 협시불이 가섭,아난존자이며,일반적 협시보살인 문수, 보현은 벽화로 그려져 있어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금산사의 주불전이야 미륵전이겠지만 대적광전도 송광사의 대적광전에 버금갈 만큼 화려하고 장엄하다. 대적광전은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臻盧遮那佛)을 위시하여 노사나불(盧舍那佛)아미타불(阿彌陀佛) 석가모니불(釋迦毛尼佛)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5불과 문수(文殊)보현(普賢)관세음(觀世音)대세지(大勢智)일광(日光)월광(月光) 6보살(菩薩)을 모셨으며", 약사불 수인을 보면서 보살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법당밖에서 술에 취한 일단의 무리(?)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방등계단으로 향했다.

스님들의 수계의식을 했던 방등계단은 중앙에 석종형 사리탑을 모시고,우측에 적멸보궁 전각,특이하게 1층 몸돌의 방형받침으로 고려시대의 탑인줄 알겠으나,신라 초기의 양식도 상당히 간직하고 있는 오층탑이 있으며(혹 비보의 용도는 아닐까?),"사리를 모신 석종의 상륜부 용두 장식은 석가모니가 태어났을때 아홉 마리의 용이 불을 뿜어 목욕시켰다는 설에 착안한 것 같으며, 순천 송광사 벽암(碧巖) 선사 사리탑이나 선암사 향서당(向西堂) 사리석종과 같음을 알 수가 있었다".

산재해 있는 문화재 곳곳에 견훤과 관련된 설화,추측이 난무한데,자식에게 감금되었다가 고려군에 투항하여  결국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의 길로 이르게한 견훤은 황산벌이 내려보이는 논산 땅에 말없이 누워 있으니...  그나저나 3년 전인가? 견훤무덤에 단둘이 답사했던 익산에 사는 이쁜 처자가 보고접다!!!        [
2004.04.09]

 

일주문

 

모악산 일주문 현판은 일중 김충현의 글씨이다.

 

금강문과 뒷편 천왕문

 

산지형 사찰이지만 높낮이가 크게 없는 평지에 위치한 금산사의 출입동선은 호남의 평지형 사찰 진입공간과 차이없이 일주문-금강문-천왕문으로 전개된다.

 

견훤성문. 일주문.금강문.천왕문을 통과하면 보제루 중정 한쪽에 당간지주가 위치한다.기단부는 단층이며, 잘 다듬은 6장의 길쭉한 장대석을 조합한 지대석 위에 지주를 낀 기단석을 받치고 있는 형식이다. 기단석은 4매의 장대석으로 장방형을 이루고, 각 측면마다. 우주와 탱주를 두어 면을 둘로 구분하였으며, 중앙을 음각하여 위아래의 가장자리에 볼록하게 솟은 띠를 둘렀다.

 

둘로 나뉜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겼다. 지주의 안쪽 면은 수직을 이루지만 바깥 면은 꼭대기 부분에서 안쪽으로 굽혀져 날렵한 느낌을 준다. 또 앞뒷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볼록한 띠를 둘렀으나 좌우의 옆면에는 중앙과 가장자리에 수직의 띠를 양각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들은 우리나라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뛰어나며,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이들의 조성시기는 모두 8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에는 조선 중기 만세루라는 12칸 규모의 누각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지금의 보제루는 아마도 이 만세루를 계승한 전각으로 1960년대에 건립되어 1980년대에 증축되었다고 한다.

 

대웅보전과 금강계단

 

금산사에 관한 역사기록으로는 우선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과 『금산사지(金山寺誌)』를 들 수 있다. 『금산사사적』은 1635년에 지은 것으로, 현재 1705년에 다시 적은 필사본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금산사지』는 1930년대에 편찬된 것으로 사적의 내용을 발췌해서 기록한 것이다.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백제 법왕(法王)이 그의 즉위년인 599년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명의 스님을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왕이 그의 즉위년에 살생을 금했다는 것과 이듬해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명을 득도시켰다고 했으나 금산사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사적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근거하고 있다면 내용상의 오류를 품고 있는 셈이다. 『금산사지』 역시 사적의 기록에 따라 백제 법왕 원년에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 금산사가 세워졌으나, 당시의 사찰은 규모나 사격의 면에서 큰 사찰이 못되었으므로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한 중창이 개산(開山)이라 기록하고 있다.

 

금산사의 창건주를 진표율사로 기록한 글로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나오는 「진표전(眞表傳)」이 있다. 이에 의하면 진표스님이 12세에 깊은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머리를 깎고 훗날 금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송고승전』의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진표전간(眞表傳簡)」이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의 기록과 어긋나는 점이 있는데, 이 두 기록에는 진표스님이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 문하(門下)에서 출가한 것으로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935년에 신검(神劍) 등이 그의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사실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또 1492년(성종 23)에 지은 「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金山寺五層石塔重修記)」에 금산사는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 때 있었던 옛 절터에 다시 중창한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금산사가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산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매우 다양하여 현재의 자료들로서 창건시기와 창건주를 알기는 힘이 든다. 다만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출가하기 이전에 이미 창건되어 있었고, 또한 금산사가 큰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율사가 중창을 이룩한 760년대 이후가 될 것이다...한국사찰관광종합정보

 

방등계단과 미륵전

 

금산사의 배치는 보제루를 지나 대적광전 구역이  중심 사역이다. 대적광전 동북쪽 낮은 언덕 위의 방등계단, 오층석탑 그 앞의 주전각인 미륵전이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맞은편에 대장전이 위치한다.  대적광전은 미륵전과 대장전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고 대적광전 서쪽에는 명부전, 뒤쪽에는 나한전과 조사전을 배열시켰다.

 

 

보물 제827호 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은 잘 다듬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정면 중앙의 어칸에는 2분합의 문을 달고, 아랫부분에는 안상을 조각한 판벽을 댔다. 『금산사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 대장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라고 한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은 산개형의 층옥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수문대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때문에 본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변화하였지만 전각 꼭대기에 복발과 복주가 남아있어 신라시대의 목탑양식을 알 수 있으며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목조로 조성한 석가여래좌상을 본존으로 좌우에 소조로 조성한 가섭과 아난을 협시로 봉안하였으며, 불단은 4단으로 구획하고 정교한 솜씨로 투각하여 수미단의 장엄을 나타내고 있다.

 

 

대장전 앞뜰 8각 석등이다. 불을 밝히는 부분인 화사석을 중심으로 밑에서부터 차례로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3단을 쌓고 그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어 놓았는데,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아 있다. 하대석은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새기고, 간주석에는 배흘림이 보인다. 상대석은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네 면에 창을 내었고 창문을 달기 위한 구멍이 있다. 지붕돌에는 귀꽃을 장식하였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전한다.

 

 

대적광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994년에 복원되었다. 「대적광전」 편액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이 1991년 쓴 글씨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황욱은 붓을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잡고 붓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쓰는 이른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하였는데,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이러한 악필법으로 황욱의 글씨로는 화엄사 일주문에 걸린 「대화엄사」와 「해동선종대가람」 편액 등이 있다. 창살은 중앙 어칸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다.

 

어칸

 

쌍계사의 꽃창살을 보는듯했다. 어칸 창살은 모란으로 꽃창살 본래의 진리와 화엄 공양의 의미 외에도 부귀와 영화를 상징한다.

협칸

 

국화꽃 창살

 

협칸

 

솟을연꽃 창살

 

협칸

 

솟을 창살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모셨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ㆍ석가모니불ㆍ노사나불ㆍ약사불이며, 6보살은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ㆍ관음보살ㆍ문수보살ㆍ보현보살ㆍ일광보살ㆍ월광보살의 순으로 봉안하였다.

 

 

노주

 

지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윗면을 평평하게 하여 1단의 높은괴임을 두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은 사각형으로 우주와 탱주가 있고 위아래를 구분하는 횡대를 새겼으며, 각 면에는 안상을 표현하고 그 안에는 아래에 꽃문양을, 위에는 복련을 조각했다. 하대석 윗부분은 두 단의 괴임과 몰딩으로 구성되어 중대석인 간석을 받치고 있는데, 중대석은 아무런 장식 없이 석탑의 탑신부와 같이 단순한 모습이다.

 

상대석은 복판의 앙련을 새겼는데 하대석의 그것과는 달리 좁고 긴 모습이며, 윗면에는 방형의 높은괴임 1단이 있어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원형으로서 보개와 연꽃모양의 보주로 이루어 있다. 상ㆍ하대석 각 면에 조각된 안상이나 연판의 양식수법 및 각부의 조성기법으로 보아 고려 초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어 현재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은 부도전 가는 길의 봉천원 구역에 있었던 탑을 옮겨왔다.. 점판암의 육각다층석탑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었다. 탑신부는 6각으로 몸돌과 지붕돌이이 모두 1매씩이지만 몸돌은 10층과 11층만이 남아있다. 몸돌에는 6각이며 각면에는 우주가 있고, 중앙에는 불상을 선각하였다. 옥개석 처마 끝에는 풍경 홈이 보이고 모서리는 반전된다. 옥개석 아래면 가운데에는 탑신받침이 있고  주위에 초화문, 용문 등이 선각되어 있다. 상륜부의 화강석 보주는 후대에 보수한 듯하다.

 

 

기단은 탑신과 달리 화강석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체감되도록 6각 3단으로 쌓았는데, 각 면에는 사자를 양각해 놓았다. 기단과 탑신의 사이에는 6각의 점판암으로 앙련석과 복련석을 두었다. 고려초의 탑으로 전한다.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石造蓮花臺座)를 말한다.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두 개의 구멍이 있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더욱 화려하다. 중대는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하대는 엎어놓은 연꽃모양이 출렁이는 물결무늬처럼 전면을 채우고 있다. 나말려초의 작품으로 전한다.

 

미륵전

 

금산사의 중심 법당으로 『진표율사진신장골탑비명』에는 '진표율사가 미륵장륙상을 3층전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의 모습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35년(인조 13년)에 수문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1748년(영조 24)과 1897년ㆍ1938년ㆍ1994년 등 중수 및 보수된 바 있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는데, 편액은 이름이 다르지만 모두 미륵불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건물은 팔작지붕의 3층 구조로 내부는 통층구조이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줄어들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막돌초석을 올리고, 여기에 기둥을 세워 창방과 평방을 올린 다포식, 겹처마이며, 활주를 세웠다.

어칸 창살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미륵전에는 762년(신라 경덕왕 23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원력으로 766년(신라 혜공왕 2년)에 완성된 불상이 있었으나, 정유재란의 병화로 1597년 불타버렸다고 한다. 이후 1627년 수문대사에 의해 지금의 미륵장육삼존불입상이 봉안되었는데, 중앙 본존불상은 1934년 화재로 불에 타버리고 1938년 당시의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다시 조성된 불상이다.

 

 

본존불상은 오른손을 들어 외장하고 왼손은 앞으로 내밀어 손가락을 조금 오므린 모습인데, 시무외여원인의 모습을 변형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상호가 원만하고 거대한 체구이나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이루어진 불상이다. 당당한 가슴과 이를 덮은 통견의 법의는 어깨에서 배를 거치며 유연한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과 양다리 위의 간략한 옷주름, 양팔에 걸쳐져 아래로 흘러내리며 이루는 옷주름 표현의 기본적인 양식은 8세기 이후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양식과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두 손의 위치만 반대일 뿐 모두 같은 모습이다. 얼굴은 신체에 비해 다소 큰 편이고 풍만하지만 네모난 형태이다. 머리 위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얼굴모습이나 보관의 형태는 조선 후기 보살상의 보편적인 표현양식이다. 어깨를 덮고 팔을 돌아내린 천의와 배ㆍ다리 위로 유(U)자형의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옷주름은 화려하지만 완만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가슴 위의 천의 양쪽에는 보주형의 장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 불화의 보살상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장식과 유사한 형태이다. 삼존불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보이는 본존불과 조선후기 보살상의 양식을 갖춘 협시보살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흔하지 않은 거대한 소조불의 예라는 데 주목된다.

 

 

금산사를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견훤이어서 익히 인지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즉, 견훤이 후궁소생의 넷째아들 금강에게 후백제의 왕위를 물려주자  큰 아들 신검이 격노하여  두 동생의 동조를 구해 왕위 금산사에 머물고 있는 금강을 죽이는 골육상쟁으로 왕위에 오른다. 

 

계속해서 신검은 아버지 견훤과 첩 고비의 소생 능예를 금산사에 가두어 버리는 패륜을 범하여 후백제 멸망의 길을 자초하게 된다. 훗날 견훤이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자 왕건은 관직을 주어 예우하게 된다. 왕건은 견훤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해 후백제를 멸망케 한 것이다.(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지만 슬픈 한을 간직한 금산사이다) 

 

 

 금산사에는 미륵전 북쪽 송대에 오층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방등계단이 있고, 그 중앙에 종 모양의 부도(사리탑)가 있다. 계단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인 모습이고 그 위에 부도가 세워져 있는데, 형태를 따서 석종형 부도라 부르기도 한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있어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케 하며, 난간 네 귀퉁이마다에는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으며, 꼭대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방등계단은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 계법을 전수하는 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기도 하다.계는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따라서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현재 보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방등계단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탑의 기단부는 10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조립하였는데,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는 양쪽 우주와 중앙에 탱주 1주가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의 1층은 여러 개의 석재로 조립되었으나 2층 이상은 각 1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층별 체감비율은 완만한 편이며 각 옥개석 상면에 1단의 각형 괴임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부터 정상부의 보주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노반이 크고 넓으며 그 위에 특이한 형태의 복발이 있다. 복발 위에는 앙련이 새겨진 앙화석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보륜과 보주가 있다.

 

1971년 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母岳山金山寺五層石塔重創記)』에 의하면 이 탑은 979년(경종 4)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또한 탑 속에서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보살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들이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유물들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이 탑은 보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모악산의 미륵...신영복

모악산의 길고 부드러운 능선은 언제보아도 그 푸근함이 어머니의 품같았습니다. 교도소의 하루가 저무는 시각에 우리는 곧잘 창가에 다가가 모악산을 바라보며 한가닥 위로를 얻던 기억을 당신도 가지고 있겠지요. 그러나 전주교도소에서 바라보던 모악은 어머니를 등뒤에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말했습니다. <등>은 거부의 의미가 아니다. 좌절의 밑바닥에 사는 사람을 모악이 거부할 리가 없다고.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등에 업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이제 어머니의 앞가슴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눈발이 시작되는 밤길을 달려와 금산사입구의 여관에 들었습니다. 밤새 눈이 내리면 내일 아침에는 하얗게 눈덮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세상을 보게 되리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눈뜨자마자 창문을 열었습니다. 서해안 쪽으로는 10센치가 넘는 눈이 내렸다는데 땅도 채 덮지 못할 정도의 적은 눈밖에 내리지 않았습니다. <미완의 강설>이었습니다. 미완의 부처인 미륵의 고장 모악산 금산사의 아침은 이렇게 미완성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미륵불은 석가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마저 구제하기위하여 오는 부처입니다. 석가의 완성을 위하여 오는 부처이며 반드시 와야할 부처 당래불(當來佛)입니다.

등뒤에서 볼 때와는 달리 모악산은 나즈막한 산봉우리들을 많이 품고 있었습니다. 산이 높아 엄뫼가 아니라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밑에 거두듯이 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있어서 모악이었습니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패망한 백제유민들의 비통함을 거두어 그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구원의 미륵불을 바로 이곳 금산사에 세운 까닭을 알 것같았습니다.

나는 미륵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온 셈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연면히 이어져 미륵의 모습이 자못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미륵상을 마주대하고 나서 갖게 되는 느낌은 나의 기대와는 매우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그 당황스러움은 나 스스로도 놀라을 정도였습니다. 36척 높이의 거대한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은 물론이고 좌우의 보살상까지 모두 금빛으로 화려하게 개금(改金)이 되어 있었습니다. 철불이나 석불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가졌던 미륵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큰 거리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미륵이 고난받는 중생의 부처라면 현란한 금동여래상과는 분명 다른 것이어야 했습니다. 금동여래상에 대하여 도전적일 정도로 청년적 진취성과 민중적 단순의지가 표상화되어 있으리란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미륵전을 나와 절마당의 잔설을 비추는 아침햇살에 눈감고 생각하였습니다.
금산사의 미륵을 찾아간다는 나에게 당신이 당부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논두렁 밭두렁 백제땅에다 거대한 미륵입상을 세운 이유에 대하여 주목하고 주의하라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논두렁 밭두렁 산골짜기에 있는 백제땅의 모든 미륵들은 빠짐없이 이 미륵장륙상 앞에 와서 절하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패망한 백제인의 부흥의지를 결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민중적 미륵신앙을 체제내로 수렴하려는 통일신라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의심하라던 당신의 충고가 떠올랐습니다.

나로서는 개금된 미륵상에서 미륵이 실현하리하던‘인간이 타인에게 인간적인 세상’을 읽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용화세계(龍華世界)>의 이상이 고작 고봉쌀밥이라는 풍요의 세계였던가. 57억년후에 출현하리라던 미륵을 현재로 앞당겨왔던 그 환상의 치열성을 읽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천불산 계곡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세상을 띄우기 위하여 도끼로 돌을 찍어 만든 운주사(運舟寺)미륵에서 분출되는 자력신앙의 힘이 없었습니다.

나의 미륵 여행은 역시 미완의 여행으로 끝난 느낌이었습니다. 민중의 미적 정서가 상투화(常套化)되어버리는 것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습니다. 소망의 세계마저 제도화되어버린다면 미륵은 영원히 미완인 것으로 완성되어버릴 것같은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최후의 그린벨트가 바로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침햇살을 등에 지고 금산사를 나오면서 모악산의 그 눈부신 능선을 다시 돌아보는 순간 나의 이러한 생각이 참으로 단견이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떠한 것도 내부로 깊숙히 안아들여 자기 것으로 육화(肉化)시키는 그 우람한 역량에 대한 신뢰가 내게 부족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백제땅은 비록 미륵이 좌절한 땅이지만 그 곳은 동시에 희망의 땅이라던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습니다. 생각하면 우리의 역사는 한마디로 미륵의 좌절로 점철된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륵화신임을 자처했던 궁예와 견훤이 비록 모든 패배자가 뒤집어 쓰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오명에도 불구하고, 고대사를 청산하고 중세사의 전기를 만들어내었다는 당신의 긍정적 평가마저도 잊을 번 하였습니다. 묘청, 신돈, 녹두장군에 이르기까지 미완성은 또다른 미완성으로 이어져 역사가 되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금산사를 돌아나오는 나의 <등>을 모악산의 아침햇살이 따뜻이 품어주었습니다.
세상의 지도에 유토피아라는 땅이 그려져 있지 않다면 지도를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는 시귀가 나의 마음을 감싸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미완의 의미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천착해갈 것인가 하는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역경(易經) 64괘는 미완의 괘인 <미제(未濟)>괘로 끝나고 있습니다. 괘사(掛辭)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어린 여우가 시내를 거의 다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2012.03.11

***문화재 설명은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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