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김제시

김제...모악산 귀신사

임병기(선과) 2012. 4. 16.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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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 귀신사는 그렇게 면모를 일신한 대가람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마을길로 접어들기도 만만치 않았는데 지금은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과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배경장소로 명성을 얻어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2004년 4월 19일에 다녀온 답사기를 들쳐보자.

 

금산사를 둘러보았지만 김제에 와서 귀신사를 순례하지 않으면 김제를 들렸다고 할 수 있을까? 대적광전이 보수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백제계의 석탑, 풍수지리와 민간신앙의 복합체인 석물이 있고, 무엇보다도 예전에는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릴만큼인 큰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였다. 귀신사는 세월의 무상함을 간직한 체,백제 지역의 피지배층 민중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반발을 가슴에 안고 그렇게 가는 숨을 내쉬며 마을 윗자락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화엄십찰에 관해서 거두절미하고 얄팍한 나의 식견으로 간략하게 기술하자면, 한반도에서도 가장 약소국이던 신라는 삼국통일 후 고구려,백제지역의 민초들의 위무책의 일환 및 조직적 반발이 예상되는 변방에 이른바 화엄십찰을 세우게 된다. 신라로서는 국가권력이 미치지 않는 옛 고구려,백제 지역에 정신적 사상의 통합이 절실했고,고토회복을 꿈꾸는 유민을 효과적으로 융화하며,왜구 및 이민족이 경주로 침입하는 전방루트에 국방목적의 전초기지 역활 등 일석삼조의 기대치를 가지고 화엄십찰을 운용했던 것이다.

그 즈음에 귀신사는 신라 왕조의 지원을 등에 업고 김제 지역에 사세를 확장해 나갔겠지만, 화엄사상인 일즉다 다즉일(多卽一,一卽多)을 거부하고 백제계의 유민들은 옛 영화화와, 미륵하생을 염원하며 새롭게 김제지역에 진표율사가 창건한  미륵신앙의 금산사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저런 상념으로 귀신사에 도착해 가람배치를 잠시 살펴보면, 이어지는 석축의 구성에 따른 전각으로 신라의 흔적을 발견해 볼 수도 있지만  중수중인 대적광전을 피해 주전각 뒤의 3층 탑과 석물을 보기위해 가는비를 흥겹게 받아들이며 돌계단을 오른다.밑에서 볼 때는 석탑의 위치가 의아스럽지만 계단을 올라서면 충분히 수긍이 갈 만큼 넓은 터가 나타나기에,옛시절의 가람배치를 추측 가능하다. 순한글로 표기한 안내문이 정겨운 삼층탑은 1층 몸돌의 방형 받침으로 고려시대 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로 넘어간 백제계의 양식의 특징인 많은 부재의 사용,정림사지 탑과의 유사성으로 백제계 석탑에 충실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석탑 앞 쪽에는  많은 화제거리를 제공하는 개,사자등으로 추론되는 돌짐승이 등에 야릇한 성기 모양의 남근석을 지고 누워 있다. 풍수학자들은 귀신사의 혈세가 암캐의 성기 즉 구순혈(狗脣穴)이라 염승의 목적으로 숫캐의 성기를 조성했다고 하고, 민속학자들은 아들을 바라는 민속의 기자신앙에 의한 것이라 하지만 어떤 목적이든 사찰안에 이러한 석물이 조성된, 조성할 수 있었던 이해 관계자들의 상생의 화해무드가 눈물겹도록 고맙다. 더구나 자기자신의 영욕과, 조직의 이기심이 팽배하여 상생의 삶을 찿아 보기힘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기에....

 

2004.04.19

 

 

귀신사는 백제 법왕(法王, 재위 599년) 때 원당(願堂), 곧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가 백제 왕실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또한 뒤에서 소개될 자수 무경 스님의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에서도 이 귀신사는 백제 왕실의 원당이었다는 글이 있다. 창건과 관련한 또 다른 설로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처음으로 세웠다는 것이며, 당시의 사찰명은 국신사(國信寺), 혹은 국신사(國神寺)였다고 전한다. 최치원(857 - ?)은 이곳에서 <법장(法藏)화상전>을 편찬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는 대사찰의 면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원명(圓明, 1090-1141)국사는 1120년대에 절을 중창하였는데, 이 당시에 귀신사의 이름은 구순사(口脣寺), 혹은 구순사(狗脣寺)로 불렸다고 한다. 그것은 이것은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인 것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말인 1376년(우왕 2) 무렵 왜병 300여기가 이 지역에 쳐들어와 성을 함락시키고는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건물과 암자가 즐비했던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정책 탓인지 초기에는 절은 매우 퇴락된 듯하다. 이미 폐허화되어 있었던지 그것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김시습(1435 - 1493)이 이 절을 찾은 뒤에 지은 시문인 “귀신사허(歸信寺墟)”라는 시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에 보면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라고 하는 내용이 써 있어서 조선초기에 이미 황폐화된 것으로 보인다....전통사찰관광정보

 

 

 귀신사 대적광전. 인간문화재 최기영 대목장이 복원하였다. 앞면 5칸·옆면 3칸,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건물은 원래 중층이었던 것을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귀신사중수기>에 보면 법당이 이층이었다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그나저나 현판 글씨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자료를 찾지 못했다.

 

 

앞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아 옛스런 맛이 있다. 재미 있는 것은 어칸을 제외한 협칸에는 문고리가 달려있지 않다. 이는 출입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머름이 높고 섬돌도 없는 것도 그런 이유로 보인다. 덤벙주초에  그랭이 처리된 두리기둥에는 배흘림이 보인다. 처마는 겹처마이나, 후면은 홑처마이다.

 

 

탑재, 배례석을 비롯해서 기타 건물지 곳곳에 장대석과 주초석, 기단석 등이 흩어져 있다. 탑재는 석탑, 석등 부재 등을 모아 삼층석탑 형태로 쌓아놓았는데, 통일신라, 고려 등 여러 시대의 여러 석재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장대석.주초석

 

보물1516호 소조삼존불.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 1633년에 작성된 귀신사 나한전낙성문에 1633년 이전에 삼존불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자수(子秀) 무경(無竟)의 <전주모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母岳山歸信寺事蹟詞引)>에 의하면 절의 중건이 1624년이라고 하므로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삼존불로 전한다.

 

규모가 매우 커서 보는 이를 압도하게 하는데, 인자하고 부드러운 얼굴표현과 허리가 긴 장신형의 불신은 매우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불격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마디 쪽으로 뻗은 지권인의 표현은 명대 비로자나불에서 나타나는 수인이며 허리가 긴 장신형의 불상비례 역시 명초에 유행하던 표현이어서 명대 조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대적광전에 모셔져 법신불 비로자나. 화신불 석가모니.보신 노사나불의 삼신불로 알았는데 자료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약사여래, 아미타 여래의 삼계불로 설명되어 있다. 봉안된 좌향으로 아미타와 약사여래를 구분해야하나?

 

 

석수. 사자일까 개일까? 석수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전한다. 타원형 받침돌 위에 앉은 석수는 머리를 들고서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석수 등 위에는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마디진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돌기둥을 얹었다.

 

 

석수는 귀신사 풍수형국의 비보책으로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온다.

 

 

1633년(인조 11)에 작성된 상량문은 현재 전하는 절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주목된다. 이 상량문에 의거하여 1624년 이후 대대적으로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적에는 이 때의 중창은 옛터가 아닌 새로운 터 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현재 석탑자리에 금당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석탑의 양식은 한 단의 야트막한 지대석 위에 단층 기단을 쌓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갑석을 얹은 다음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초층 탑신은 탱주 없이 각각 독립된 석재로 우주를 세우고 그 위를 역시 4장의 갑석으로 덮었다. 우주의 사이에는 1매석의 판석을 끼워서 면석을 구성한 반면, 2층과 3층 탑신은 양 우주를 모각한 단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 탑신은 초층에 비해 거의 절반 정도 크기로 줄어들었으며, 우주가 새겨졌고 역시 옥개석 사이에 1장의 돌로 된 받침이 끼워져 있다. 옥개석은 초층 옥개석과 마찬가지로 1장의 돌로된 받침이 끼워져 있다. 옥개석은 초층 옥개석과 마찬가지로 4장의 돌로 이루어졌고 그 위에는 받침돌 없이 바로 3층 탑신을 올려 놓았다. 3층 탑신은 2층 탑신보다 조금 더 줄어 들었으며 탑신과 옥개석 사이에 2장의 돌로 받침을 끼웠다. 옥개석 위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노반이 있으며 그 위는 남아 있지 않다.

 

 

얇고 넓은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한 반면 처마 네 귀가 살짝 반전되었으며, 이를 받치는 4릉형의 옥개받침은 8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이 옥개석 위에는 사각형의 별석제 탑신받침을 끼워서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별석의 노반받침이 끼워져 있다.

 

 

수평적인 얇은 옥개석과 4릉형의 옥개받침 형태, 여러 매의 판석으로 짜맞춘 결구방식, 그리고 탑신 아래에 별도의 탑신받침을 배치한 형식 등에서 백제탑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귀신사...김시습

 

   烟埋秋草夕陽中 가을풀 가득한 곳 석양 중에 와보니

       獨立空山思不窮 홀로선 빈 산에서 생각은 끝이 없어라.

                            壞塔已無花雨瑞 탑은 무너져 꽃도 없는 곳에 단비가 부슬부슬 내리네

       斷碑猶帶薛蘿業 부서진 비석 위에는 들풀이 엉켜있네.

       幾年成敗隨流水 얼마간의 성패야 흘러가는 물 같은 것

                        千古關河送去鴻 옛날에도 관하에서 기러기를 널려 보내지 않았나.

世上興亡皆若此 세상의 흥망은 모두 이와 같을까

      不須懷糈問天公 기다리지 못하고 천공에게 물어보네.

 

2012.03.11

 

한국사찰관광정보.문화재청.디지털김제문화대전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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