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여수시

여수...진남관

임병기(선과) 2011. 11. 9.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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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전에 두고도 내비양은 헤매이고 있다. 주차장 무임 승차인가? 차라리 주차비를 주었으면 편안 할텐데 두리번 두리번 콩닥콩닥 이놈의 새가슴 어찌하랴.

 

진남루 외삼문. 망해루. 망해는 단지 멀리 바라보인다는 의미가 아닌 것은 우리님들은 아실테고 자기를 낮추라는 학문, 배움이 짧다는 뜻인데 진남루 망해루도 같은 뜻일까? 망해루는 전라좌수영 문루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가 1991년 복원하였다.

 

내삼문

 

 

돌아보지 않았다면 돌산대교를 놓쳤을 것인가? 진남관이 위치한 곳이 종고산이다. 비록 낮은 동산이지만  여수의 지리환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태산과 비교할 만하다. 종고산은 이순신 장군이 1592년(선조 25년) 한산대첩을 하던 날 종고산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3일간이나 울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진남관.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삼았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로 정유재란 때 불탄 자리에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鎭南館'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막돌주초와 그랭이

 

 

객사.객사는 궐패를 모시는 주사와 좌우 익랑으로 구성되는데 진남관은 구분이 없어 중앙에 궐패를 모신 듯하다.관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날마다, 또 나라에 국상과 같은 큰 일이 있을 때 망궐배 의식을 거행하며, 지방에 출장온 관리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2 m 높이늬 석인은 기단석 위에 화강암으로 조각되었다. 관모를 쓰고 단정한 관복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문인의 모습이다. 석인은 7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6구는 없어지고 현재 1구만 남아 있다.

 

 

 

충무공은 돌사람을 세워 적을 교란하였으며 석인을 피해 다른 루트로 공격해오는 왜구를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공격하였다고 한다. 석인은 현재 위치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진남관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전쟁터의 군사가  문관 복장의 문인상이어서 의아스럽다.

 

 

석주화대.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이 휘하 수군의 야간 조련을 위해 사용한 유물로 추정하며, 석주 화대의 위에 팔각 쟁반이 있어서 기름을 부어 불을 피울 수 있고 이는 지금의 가로등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물터

 

 

공적비군

 

 

이양장군방왜축제비는 전라좌수사를 지낸 이양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방왜축제(수중성)를 기념하기 위해 후대에 세운 비이다. 이양(1446∼1511)의 자는 자방이고, 본관은 함평인데, 조선 연산군 3년(1497) 전라도 흥양에 왜변이 일어났을 때 녹도 만호로 기용되어 적을 대파하고 많은 적병을 참살하였다. 그 공으로 당상관의 품계인 가선대부에 특진됨과 동시에 일약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전라좌수영 남쪽에 작은 섬이 하나 있었는데 이 섬과 돌산도 간의 해로를 차단하는 대역사를 단행하였으니, 깊은 바닷속에 바윗돌을 쌓아 수중성을 구축함으로써 왜적들은 물론 어떠한 선박도 이곳을 통과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수중성을 장군성, 혹은 ‘이양장군방왜축제(李良將軍防倭築堤)’라 칭하면서부터 섬의 이름도 자연히 장군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진남관에서 고개를 돌리면 돌산대교와 이량장군이 조성한 장군도가 눈에 들어온다. 섬과 섬에 둘러 쌓이고 침입하는 왜구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진남관은 천혜의 요새처럼 보인다. 우리모두의 가슴에 남아 있는 충무공 이순신.하지만 진남루를 들리는 여수 사람들은 가슴속이 아니라 현재도 살아있는 인물로 생각할 듯하다.

 

2010.10.08

***문화재청.여수시청 홈페이지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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