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여수시

여수...영취산 흥국사

임병기(선과) 2011. 11. 7.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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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누라와 아이들과 함께 다녀왔었다. 일부 전각 불사를 제외하고는 큰 변화가 없어 나의 마음도 추억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당시에 우리 가족에게 흥국사의 신비로운 현상과 성보박물관을 안내해주셨던 스님의 법명을 기억 못해 혼자서 둘러 보았다. 예전 답사기와 당시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으며 사진은 2011년 현재의 모습이다. 글은 문화재청. 흥국사, 한국전통사찰관광정보를 참조했다.

 

 

흥국사 입구의 홍교. 이제는 다리 본래의 기능은 사라지고 흥국사의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다. 월천공덕이라 했는데 세월은 크나큰 보시마져 편리함에 뒷전으로 밀리었다. 새로운 진입로와 주차공간으로 이어지는 동선으로 홍교의 존재마져 인식하지 못하고 순례를 마치는 답사객들은 없는지 자못 궁금하다. 홍교는 임진왜란 이후 흥국사에 머물던 승군이 쌓았다는 설과, 승군들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풍수 비보책으로 관아에서 축성하였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흥국사 무지개다리.1639년 계특대사가 조성했다. 총 86괴의 장방형의 각석을 이용해 길이 11.8m, 폭 2.7m, 높이 5.5m의 크기로 조성되었다. 홍교는 기능적인 역활과 일주문에 이르기 전부터 속세의 풍진을 떨쳐버리라는 상징일 것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선암사 외에도, 태안사, 송광사의 누각형 홍교도 있다.

 

홍교 중앙에 돌출된 머릿돌에 새겨진 사찰을 바라보고 있는 용두(?)는 이해가 되지만 홍교 천장에 돌출된 공하의 방향은 고개를 가웃거리게 한다. 용의 9아들의 한 명인 공하는 물을 통해서 사찰에 잠입하는 사악한 기운과 무리를 차단하는 상징적인 의미이며 따라서 향하는 방향은 사찰 밖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잘못 보았나? 분명 사찰을 향하고 있었는 듯하다.

 

 

원래 흥국사에는 영성문(迎聖門)이라는 문이 천왕문 바로 앞 계곡을 가로질러 있었으며, 이것이 절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영성문은 태안사 능파각처럼 계곡을 가로질러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고, 초가의 맞배지붕 형식이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허물어져 없어졌다고 한다.

 

 

가원 이원식(嘉園李榮植)의 글씨. 선생은 화엄사 성적문 현판. 특히 부산 범어사 성보박물관 현판은 미수에 썬 글씨라고 한다.

 

흥국사 부도전. 예전 답사기에 보개 같다고 했던 소나무도 여전히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12기의 부도는 조선후기의 석종형 부도들로 당시 흥국사의 사세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부도는 3곳에 모셔져 있었으나 1986년 현재 위치로 이건 봉안하였다.

 

옥개석 마루의 용두(?). 역시 부도를 보호하려는 상징이다.

 

 

예전 답사기에는 고인돌을 보았다고 기록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달구지로 진입한 탓에 오늘은 놓쳐버렸다. 천왕문 앞에 위치한 1903년 성능대사가 세운 흥국사 중수 사적비는 귀부, 비신, 이수가 완전하다. 귀부는 익살스럽고  등의 유각형 모양은 뚜렷하지 않다. 비신은 균열이 보이지만 내용은 매우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수의 두 마리 용도 투박하며 장난질하는 모습이다. 

 

흥국사는 전라도순천부영취산흥국사사적(全羅道順天府靈鷲山興國寺事蹟 : 이후 흥국사 사적기라 칭함)에 의하면 1195년 보조국사지눌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이 외에 다른 기록에서 약간의 연대 차이는 있으나 모두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처음에 사찰의 위치를 잡을 때 노스님이 나타나 국사를 금성대로 안내해 영취산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내려가면 절묘하고 빼어난터가 있는데, 하늘이 아끼고 땅이 보호하는 불법이 크게 일어나는 도량이 될 것이다. 이곳에 큰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흥국사라고 하라. 이 절이 잘되면 나라도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이 절도 잘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흥국사사적기에 전한다. 흥국이라는 이름 역시 이와 연관되어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보조국사가 흥국사에서 송광사로 옮긴 후 흥국사의 사세는 급격히 기울었다고 하며 100여년 가까이 토굴과 같았다고 하며, 이후 원나라 침략 때 모두 불타고 사찰은 폐사가 됐다고 한다.

 

이후 1560년 법수대사가 학준, 신잠, 수인, 양희, 영두 등과 더불어 흥국사를 재건했는데, 이때 법당과 전각을 복원하고 원정과 선방을 건립해 가람을 중건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과 더불어 이곳 흥국사에서 의승수군 400명이 조직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법수대사가 건립한 건물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에 모두 불타 없어졌고, 흥국사는 다시 폐허가 되어야만 했다.

 

이후 1624년 계특선사가 가람을 삼중창하는 역사를 진행했다. 가을에 법당을 중건하고 도반인 희, 익, 언과 더불어 모든 선방 및 요사들을 재건했으며, 수시로 모든 당우와 범종을 주조했다 한다. 또한 1633년 관음전을 건립했고, 1639년에는 홍교를 만들었으며, 1643년에는 첨성각, 1645년에는 정문, 1646년에는 봉황루를건립해 사찰의 면모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1690년 또 다시 대웅전을 중건하는 공사를 하게 된다. 이때 중건을 담당하신 분은 통일대사로 기존의 대웅전이 낮고 좁기 때문에 더 넓고 큰 대웅전이 요청되어 중건이 진행되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이 당시에 건립된 것이며, 기존의 대웅전 재목으로는 현대웅전 뒤에 있는 팔상전을 만들었다. 1691년 이러한 모든 역사적 사실을 전라도순천부영취산흥국사사적(全羅道順天府靈鷲山興國寺事蹟)을 목판으로 찬술했다.

 

또 1703년에는 유명조선국전라도순천영취산흥국사중수사적비(有明朝鮮國全羅道順天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碑)를 천왕문 밖에 건립해 세워 두었다. 1759년에는 성도암에서 현재 보물 1331호 지정되어 있는 흥국사 괘불이 만들어 졌다. 이후 개개 건물 및 탱화는 수차례 보수 및 수리되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계속된 불사에 의해 혹은 예전과 모습이 달라지기도 하며 혹은 새롭게 조성하기도 해 현재의 흥국사를 이루고 있다.

 

천왕문

 

흥국사 사천왕에 대한 설명도 제각각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두 가지 유형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달리 표현되어 있는지...   동방 지국. 남방 증장으로 보고 싶다.

 

서방 광목. 북방 다문천왕

 

"영취산흥국사봉황대루"에 의하면 1646년 처음으로 대루를 만들었으며, 이후 1729년 팔도도총섭인 덕린, 승통대장 찬미, 팔도도총섭 자헌스님등 300여명 스님들의 노력으로 중수가 되었다고 한다. 원래 봉황루는 정면 7간, 측면 5간 이었으나 일제강점기기에 현재 처럼 정면 5간, 측면 3간으로 축소되었다 한다.

 

 

누하진입이 아니라 우회진입 동선이다. 자료에는 최근에 진입동선이 바뀌었다고 했지만 고성 옥천사 자방루 처럼 남해안 지역 수군이 활약했던 사찰에는 누하진입을 통제한 루대를 볼 수 있다.

 

 

법왕문. 이름조차 생소한 흥국사 정중앙에 위치한 건물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누대와 금당이 중정을 가운데 두고 위치한 일반적 가람배치를 벗어나 두 건물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아무른 경배 대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송광사 배치도에도 사찰 중심에 법왕문이 있다고 하며 이것은 화엄종 교리중 하나인 중심으로의 통합 사상을 표현하는 예라 한다

 

범종각

 

대웅전 앞 석등.  천진난만한 거북 기단위에 살짝 모죽임한 사각 간주석, 화사석은 별개의 돌이 아니라 네모퉁이에 기둥을 세운 이채로운 모습이며  공양상을 새겼다. 본래 위치가 아니라고 한다.

 

괘불대

 

대웅전 계단 소맷돌의 용. 대웅전을 반야용선(般若龍船)에 비유하는 상징으로 대웅전은 지혜를 실어나르는 배, 고통의 연속인 중생을 고통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게 해주는 배로 기단은 바다로 보면 된다. 

 

소맷돌 용두

 

대웅전 기단의 게, 용, 거북. 대웅전이 반야용선(般若龍船)이며 기단은 바다인 까닭에 바닷속 동물을 조각한 것이다. 해남 미황사. 청도 대적사 금당 기단에도 표현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3간, 측면3간의 건물로 지붕은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624년 계특선사가 중건한 금당 자리에 1690년 통일대사가 중건하였다. 기단은 잘 다듬은 장대석을 2벌대로 쌓아올린 후, 그 위에 갑석을 사용해 마무리했다. 또한 기단 중앙에는 긴 장대석을 사용해 8단의 계단을 부가했다.

 

대웅전 측면. 초석은 막돌초석을 사용했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약간의 배흘림이 있으나 그 정도가 미약해 눈에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기둥위에 기둥 서로를 잡아주는 창방과 상부 공포를 받치기 위한 평방이 사용되고, 그 위에 공포를 얹었다. 공포는 외3출목, 내3출목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후면. 천장은 중앙부에는 우물천장을 주로 가설했으며 주위로 빗천장을 사용해 높은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사용했다

 

 

대웅전 후면. 좌청룡 후백호

 

 

전면창호는 모두 4분합문을 사용했다. 상부는 교창을 놓았고, 가운데는 정자살과 빗살을 혼합해 만들었으며, 하부는 2단의 판으로 막고 꽃무늬 단청으로 마감했다.

 

 

대웅전 목조 삼존불. 석가모니 문수,보현 보살.삼존상은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나서 양감이 잘 표현되었으며, 손과 발의 표정이 잘 살아있고, 옷 주름이나 장신구의 표현도 유려하다. 불상은 17세기 조각의 단순함을 잘 반영하고 있고, 두 보살상은 자연스러운 자세와 장대한 신체비례를 보여준다. 17세기 전반의 상으로 이와 같은 크기의 보살상을 동반한 삼존불이 드물고, 도상과 양식면에서도 조선후기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상으로 알려져 있다. 

 

협시 보살상의 보관 뒷면에는 각각 자씨보살대명숭정(慈氏菩薩大明崇禎), 제화보살대명숭정(提花菩薩大明崇禎)이라는 명문이 타출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삼존상이 수기삼존상(授記三尊像)으로 17세기 전반의 숭정연간(1628~1644)에 조성된 것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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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존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을 무릎위에 올려놓은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나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가 있다.  통견의 법의를 갖추고 왼쪽 팔에 걸친 옷 주름이 무릎을 덮고 있다. 예전 답사 때에 스님은 삼존불을  "예나 지금이나 호남은 가난한 살림이라 일류의 장이를 모실 수 없는 까닭에 이류의 쟁이의 작품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지만 이제사 그 스님의 설명에 숨을 뜻을 이해하겠다.

 

 

2003년이었지만 아직도 대웅전 삼존불의 신비스런 현상을 설명해주시던 스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예전 답사기를 가져 온다. "스님께서 흥국사 후불탱의 신비로움을 보여주시겠다며 대웅전 어칸으로 우리를 안내하신다. 그렇다. 어칸에서 바라보는 석가모니불에서 미약하나마 서광이 보인 것은 신비로움에 시작일 뿐 뜨락 가운데서 약간 왼편에서 바라보는 후불탱은 미술의 원근법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더 크게, 확연히 서광이 보이며 뜨락 끝 법왕문에서 바라보는 문수보살도 더욱 크게 보이지만 스님도 이유를 모르신다고 하신다."  자료에는 이런 현상이 아마도 대웅전 규모에 비해 삼존불이 비교적 작게 조성된 탓으로 추측하고 있다.

 

영산회상도 후불탱.화면 중앙의 수미단 위에 연꽃대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결가부좌에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여래가 자리했으며 그 좌우로 문수·보현 등 6보살과 6비구가 대칭으로 배치되었고, 하단에는 사천왕이 묘사되어 있다. 미륵·약왕보살이라고 추정되는 보살상에는 투명광배를 배치하여 획일적 광배에 변화를 주었고 사천왕과 함께 시선을 밖으로 뻗음으로써 도식화되기 쉬운 중앙 집중형 대칭 구도와 달리 했다.

 

화기에는 1693년 4월 영취산 흥국사에서 영산회를 마쳤다는 기록으로 시작하고 있어 이 탱화가 영산회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주상전하의 만수무강과 더불어 50여명의 비구스님과 신도들의 시주로 이루어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사로는 천신(天信), 의천(義天)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에 “원하옵나니 이 공덕으로 누구에게나 두루 비치어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원합니다.”라고 마치고 있다.

 

대웅전 후벽 수월백의관음도(水月白衣觀音圖). 1760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온몸은 백색의 옷으로 감쌌고, 바다에서 솟아난 연꽃을 대좌로 해 오른다리를 왼쪽 허벅지위에 올린 반가상으로 묘사되었다. 머리에 쓴 보관은 다른 관음도에 비해 매우 수수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한 중앙에 아미타불을 그려넣었다. 두광은  초록색으로 표현했으나 따로 신광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제석탱 역시 1741년 제작 봉안되었다. 제석은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고 후에 경전을 설하는 법사가 있다면 그 법사와 경을 보호하겠다고 서원한 여러 선신중의 하나를 말한다. 이런 선신은 원래 인도 고유의 토착신앙에 기인한 신이었으나, 불교가 한국 땅에 들어와 토착화 되면서 한국 고유의 불교신앙으로 발전되어 갔다. 특히 여러 선신중 제석과 산신은 강한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거쳤다. 이 그림은 제석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선녀들이 묘사되어 있다.

 

 

모사본 삼장탱. 세보살을 묘사한 탱화로 흥국사의 삼장탱은 독존의 지장보살탱화 하나(212×171.5㎝)와 천장, 지지보살을 한 폭에 그린 탱화(215×292㎝), 2개로 구성되어 있다. 두폭 모두 1741년 제작 봉안되었으며, 대웅전 오른편에 따로 불단을 조성하고 봉안되었으나, 근래 의승수군유물관에 이전 보관하고 있다.


흥국사 노사나불괘불탱...문화재청

 

예전 답사시에 스님께서 안내하여 승보박물관에 전시된 진본을 보았지만 오늘은 개방이 되지 않았다. 흥국사 괘불은 본존불 하나 만이 화면에 가득 차게 그려진 협시가 없는 독존의 형태이며, 크기는 1,171㎝ × 734㎝의 대형 불화다. 보살형의 노사나불을 표현한 괘불로 두광은 초록색으로 표현했으며, 매우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는 화관 중앙에는 6불이 화불(化佛)로 모셔져 있다. 신광은 날개모양으로 펼쳐져 나가는 형태로 표현했으며 이곳에 7가지 색을 고루 사용해 매우 화려하게 표현했다. 상호는 두 손을 어깨 위까지 들어 좌우로 벌리고 있는 설법인을 하고 있다. 천의와 군의, 역시 적, 청, 녹색을 주색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사이사이에 매우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고 있다.

 

노사나불은 연화좌위에 올라서 있으며 하단 좌우로 백색의 탑이 솟아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전면에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으나 뒷면에 기록된 화기에 의하면 “乾隆貳?肆年己卯四月日 全羅左道順天府東嶺靈鷲山興國寺掛佛幀敬成”이라는 기록이 있어 건륭 24년(1759)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당시 당우가 23체(體), 산내암자가 14처(處), 승려대중이 634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 괘불 제작은 금어(金魚) 3명, 편수(片首) 10명, 총 13명의 화사가 참여했으며, 이중 금어 비현(丕賢)은 수화사로 활동했는데 후에 만연사(萬淵寺)의 괘불(1783)을 제작했고, 편수 쾌윤(快允)은 선암사(仙巖寺) 괘불(1753) 제작에 참여한 화사로 알려져 있다.


16나한도 일부...문화재청

 

16나한도. 원래 응진당에 모셔져 있던 나한도에는 영산회상도 부분은 제외된 총6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진본은 의승수군 유물관에 보존되고 있으며, 응진당에는 영인본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도 화기에 의하면 “雍正元年孟夏全羅左道順天靈鷲山興國寺應眞後佛幀”라는 기록이 있다. 1723년 흥국사에서는 의겸화사를 초청해 응진당과 원통전의 불화제작을 의뢰했다. 이 당시는 수묵화 기법을 도입해 불화를 제작하던 의겸 스님의 최성기로서 흥국사의 나한도는 그의 화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조선후기의 명작이며, 이후 조선후기 나한도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수월관음도...문화재청

 

둥근 몸광배를 하고 있는 관음보살은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오른 무릎 아래쪽에는 선재동자가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합장하고 서 있다. 맨 하단에는 일렁이는 물결이 묘사되어 있다. 관음보살의 양팔 좌우로는 푸른 대나무 및 버들가지가 꽂힌 꽃병과 새가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 관음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따르고 있는 관음도로서 부분적으로 도식적인 면이 엿보이지만, 안정된 구도에 적·녹·청색의 조화로운 배색으로 화려함과 따뜻한 느낌을 준다. 또한 단정하고 적당한 얼굴표현과 신체비례, 바위면 처리에 있어 회화성 넘치는 표현 기법 등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18세기 최고 화승으로 꼽히던 의겸 스님이 그린 그림으로, 비록 화면 하단부에 일부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조화로운 색채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동종...문화재청

 

조선시대 주종장 가운데 김용암(金龍岩)·김성원(金成元) 등과 더불어 사장계(私匠系)를 대표하는 김애립(金愛立)이 순천 동리산의 대흥사 종으로 1665년에 주성하였으며, 높이가 121㎝나 되는 대종에 해당한다. 종의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마치 포탄과 같은 모습을 하였다.

 

간단하면서도 힘이 있는 쌍룡(雙龍)을 종 고리로 삼고 천판에는 큼직한 연화문대를 돌렸다. 천판과 만나는 종의 어깨부분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 둘러져 있으며, 몸체에는 연곽대와 보살상 및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마련되어 있다. 종신에 새겨진 문양은 전반적으로 섬세하고 화려하며 잘 정돈된 느낌을 보여준다.

 

 

대웅전 뒤편에 위치한 불조전.역대 조사들의 영정을 모시는 전각이다. 1630년에 청파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이후 1820년에 침용대사가 중수했다고하나 명확하지 않다. 지금의 건물은 1935년 춘봉대사가 청운암에서 이건해 현 위치에 건립한 건물이다.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정면은 겹처마를 이루고 있으나 배면은 홑처마이다.

 

 

 경파대사, 청파당대선사, 우룡대선사, 목엄대선사

 

 

침룡대선사, 불일보조국사, 국일도대선사응운당대사

 

 

대웅전 뒷편. 앙증맞지만 절로 고개를 숙여야 한다. 마치 곡성 태안사 배알문 같다.

 

 

계특대사가 1624년 창건했던 대웅전을 1690년 통일대사가 중창하면서 기존의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구 부재를 이용해 대웅전 뒤편 언덕에 새롭게 팔상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1815년 응운대사가 팔상전을 중수했다고 하는데 현재 팔상전의 모습은 건물의 세부 기법상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수중인 무사전. 다른 절집에서는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이라 불리는 전각으로 공주 신원사에는 영원전 현판을 걸었다. 스님 말씀에 의하면  인과응보에 의해 과보를 받으므로 무사(無私)라고 했다고 한다.

 

 

원통전은 중심공간에서 멀리 떨어져 왼쪽 편에 있다.  "여수여천향토지"에 “전설에 원통전은 임진왜란 때 불난 흥국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지리산에 살던 한 이름난 목수가 흥국사를 찾아가보니, 다른 곳에서 목수가 와서 일을 맡아버렸으므로 하도 원통해서 원통전을 지어 그 솜씨를 자랑했다”라는 전설이 있다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4면에 툇마루를 달고 전면을 현관 처럼 조성한 이른바 丁字형 건물이다. 이런 丁자형 건물은 선암사 원통전을 비롯 호남지방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에 보이며 임진왜란 전에는 많은 사찰에 있었다고 한다. 일부 자료에는 백제 영향이 아닐까라는 추측도 있지만 근거는 미약하다고 한다.

 

화순 쌍봉사 호성전도 丁자 건물이다. 예전 쌍봉사 답사에 동행했던 유현이 "형님 젊은 사람들은 T자형 이라고 부르지 丁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라며 나를 노땅 취급하던 제놈은 요즘 무어라고 칭할련지......

 

 

원통전은 염불결사를 했던 옛날 보광전 옆에 위치했다고 한다. 염불결사는 법당안에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탑돌이 처럼 기도하게끔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법당은 좁게 하고 둘레에 마루를 깔아 탑과 법당의 절충형식을 취했다고 한다.

 

 

원통전 툇마루

 

 

2003년 스님은 말씀하셨다. " 내 법명은 알 필요 없고 진달래꽃 만발하면 다시 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또 가을날 들렸으니 아마도 다시 봄날 인연 지으라는 뜻인가 보다. 그날 이 언제일까?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텐데.

 

201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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