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고성군

고성...주평리 석불좌상

임병기(선과) 2011. 10. 18.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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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말엽에 유명한 학자인 박완천당(朴浣川堂)선생과 노묵재(盧墨齋)선생 두 분이 취석정(醉石亭):바위)에서 술잔을 취석 아래 찬샘에 띄어 놓고 대작하면서 서로 우정과 시흥을 돋우며 세상을 걱정하면서 심금의 회포를 펼친 곳으로 이 샘을 주천(酒泉)이라 하였으며 동명 또한 주천으로 고쳐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주평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중종시대, 당파싸움이 극심하던 때였다. 많은 선비들이 당파싸움을 피하여 물 맑고 산좋은 산수를 찾아 남은 여생을 숨어서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역시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중앙 정계에서 낙향한 두 젊은 선비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광주 노씨 묵재선생과 밀성 박씨 완천선생이었다. 두 선비는 영남의 좋은 고장에 가서 후진양성에 힘쓰며, 시와 글을 짓고, 활도 쏘며 남은 일생을 좀 더 보람있게 보내기로 마음먹고 서당자리를 찾았다. 이들은 영남지방의 모든 곳을 다 다녔으나 적당한 곳이 없어 고심하다가, 지금의 구만면 주평리 주평(주천) 샘물가에서 물을 한잔 마시고 곤히 잠이 들었다.

 

따뜻한 봄날, 잠든 그들의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 "자네, 두 선비들. 그대들의 마 음이 충성스러운 줄 안다만 자네들이 찾는 명당자리란 특별한 장소가 없네. 자네 들이 누워있는 그곳이 명당자리라네." 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잠에 깨어 온 사방을 살펴보아도 선비생각에는 좋은 곳이 못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샘물 옆에 집채 만한 바위가 있는 것이 정자 한 채는 충분히 지을 수 있는 곳이라. "옳거니, 여기가 바로 명당자리구나." 하고 바위 위에 올라서 보니, 하늘을 찌르는 바위산이 있어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하면 특출한 인물이 나올 것 같았고, 앞으로 보이는 구만 들판은 많은 인재가 나와 이 고을을 전국에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으니 산수가 좋아 많은 후배 인재들의 마음을 참되게 가르칠 수 있었으며, 그들 또한 여가를 이용하여 활을 쏘니 날아가는 새가 백발 백중 떨어져 죽어, 취석정 활터는 영남지방에서 유명하였으며, 영남의 많은 궁수 들이 이곳을 찾아 궁술대회를 열곤 하였다. 활시위를 당긴 후 목이 말라 샘물을 마시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술을 먹고 취한 듯한 느낌으로 은근히 기분이 좋아 시를 지으니, 시 또한 장원급제자의 시문보다 우수한 글이 나왔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향상 시를 지을 때는 이곳 샘물을 한 모금 마셔야 좋은 글이 나 올 수 있다 하여 주천(술샘)이라 하였고, 은근히 취한 그들은 취석정에 올라가 활을 당기니 궁술 솜씨 또한 훌륭하였다. 이 마을의 출신으로 이조판서가 되어 이름을 떨친 박덕순은 취석정이 배출한 인재이다 .

 

취석정 올달샘은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질 정도의 극심한 한발이나 천재지변에도 일년 사철 샘물이 줄어들거나 불어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냉수가 솟아난다. 취석정 옆에는 장골들의 다섯아름이 나 되는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왜정시대 때 베어 버렸다고 한다. 또 이 옹달샘에는 귀가 돋힌 큰 메기가 있는데 이 메기가 보이면 이변이 일어난 다고 하며, 8.15 해방과 6.25때에 나타났다고 한다. 언젠가 주민들이 양수기를 동 원하여 물을 퍼 샘을 치울 때, 귀가 돋힌 뱀장어 몇 마리를 보았다고 한다...구만면 사무소 홈 

 

 

정감이 가는 안내문

 

 

 

 

음력 정월 보름날 올리는 동제. 그 음덕으로 올가을에도 풍요로운 결실을 얻을 것이다.

 

201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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