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고성군

고성...와룡산 운흥사

임병기(선과) 2011. 10. 6.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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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002.09.18, 수정...2011.10.02, 사진...2011.08.12

 

 

2002 년 9월 운흥사 답사기에는 이 길이 진입 동선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고 도로도 포장이 되어 있었다. "음양의 순리에 따라 상생의 극대화가 분명한 양촌마을, 음촌마을 지나 풍수지리의 누운 용의 형국인 와룡저수지, 마을 곁눈질 하며 흙먼지가 싫지 않는 1.4키로 비포장 자갈길을 따라 운흥사 다녀왔습니다. 신심 깊은 보살 운력으로 정갈스레 정돈된 채마밭을 지나 댓잎바람 귀를 간지러는 돌계단에 번뇌하나 삼키며..."

 

 

요사와 함께 있는 보광전. 내 기억속에는 전혀 없었다. 스님. 이전각이 언제부터 있었나요? 이상한 놈인양 바라보더니 삼국시대부터 있었습니다"라고 답이 돌아 온다. 그냥 웃으시려고 그러하셨겠지요.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 뒤 조선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조선시대에 와서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의승군 6,000여 명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고 한다. 이 때 절의 건물이 모두 불탔다가 1651년(효종 2) 법성(法性) 스님이 중창하였다.운흥사는 17세기의 유명한 금어(金魚, 불화를 그리는 스님)인 의겸(義謙) 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나아가 제자들을 길렀으므로 당시 최대의 금어 양성소로 이름을 날렸다. 이 같은 전통으로 인하여 운흥사에는 현재 의겸 스님이 그린 여러 점의 고급 불화가 남아 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운흥사. 기억 속에 남은 유일한 장독대

 

 

겹처마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조선시대 목조건물이다. 안에는 석가모니, 제화갈라,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단정한 모습인데,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졌다가 최근에는 1936년에 중건되었다. 영산전 편액 글씨 왼쪽에 1753년(영조 29)에 해당하는 ‘건륭18년’ 글씨가 적혀 있어 이 때 처음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협칸 창호가 빗살과 띠살이다.

 

 

우란분절을 앞두고 많은 신도들이 절집을 찾아 조용히 들러보기는 어려울 듯하여 주마간산격으로 옛추억만 더듬고 나왔다.

운흥사 대웅전은 임지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731년(영조 7)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고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다포계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협시하고 있는 금동 삼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되었다. 또한 삼존상 각각 뒤쪽에 후불탱이 걸려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탱은 근대에 그린 것이고, 약사탱과 아미타탱은 의겸 스님이 조성한 것인데 두 점 모두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법당에는 보살님들이 이미 자리하고 법회를 준비중이어서 내부에 들어 갈 수 없었다. 마침 요사에서 나오는 스님에게 괘불탱.감로탱. 수월관음도의 행방을 여쭈었더니 "처사님은 무엇하시는 분인데 그런 걸 물으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발걸음을 옮기신다. 왜 저러실까?????????

운흥사 아미타탱...문화재청
 

대웅전의 아미타탱과 약사탱은 사본이며 진본은 하동 쌍계사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서방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부처를 묘사한 탱화로, 화면 가운데 주불인 아미타부처를 크게 배치하였다. 아미타불은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옷을 입고, 오른발을 왼무릎에 얹고 있는 길상좌(吉祥坐) 모습이다. 그림의 맨 위부분에는 아미타부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여러 성중(聖衆)의 무리가 표현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는 흰옷(白衣)을 걸친 관세음보살을 위시한 아미타 8대 보살과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있다.


운흥사 약사탱...문화재청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약사부처를 가운데에 크게 배치하고, 약사부처 주위로는 맨 윗부분에 팔부신중을, 그 아래로는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들을 그렸다. 그리고 화면의 맨 아래 부분에는 좌우로 각각 2분씩 불법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다. 연꽃대좌에 앉아 있는 약사부처는 양 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오른 발을 왼무릎에 올려 놓은 길상좌(吉祥坐)의 자세로 큼직한 키모양 광배를 갖추고 있다. 

 

 

명부전.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한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상 10위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목조로 만들었다. 도명존자는 지팡이를 들고 있고 무독귀왕은 문관 차림이다. 시왕은 삼존의 양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그 사이사이로 판관, 녹사, 시자, 금강역사상 및 동자상 각 2위 등이 있다

 

 

서 있는 모습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여러 존상을 화면 가득 그린 영산회 괘불탱과 괘불을 보관하는 궤가 함께 보물 제13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괘불탱은 본존불을 화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리고 그 양옆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화면 위에는 관음보살과 세지보살, 2위의 타방불(他方佛)이 자리하였다.


본존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을 입고 있는데, 오른손은 다소곳이 모아서 길게 내려뜨리고 왼손은 가슴께로 들어 올려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 본존을 향하여 몸을 살짝 틀고 있는 문수와 보현보살은 연꽃 위에 서서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여의(如意)와 연꽃가지를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다. 입고 있는 옷의 색채와 무늬, 손 모양만 서로 다를 뿐 신체 및 발 등 자세는 거의 똑같다. 어깨 위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여러 장식, 머리묶음 띠, 가슴장식, 팔찌, 귀고리 등도 매우 비슷하다.  

 

이 그림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빈틈없이 꽉 채워져 있는 여러 무늬와 각 인물마다 표기되어 있는 붉은색 범자(梵字)다. 문양은 연꽃 무늬, 덩굴 무늬, 구름 무늬와 둥근 무늬, 잔꽃 무늬, 점 무늬 등인데, 그 가운데서도 덩굴꽃 무늬와 연꽃 무늬, 구름 무늬는 삼존의 주된 문양으로서 화면 전체에 걸쳐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 괘불탱은 1730년(영조 6) 의겸 금어 등에 의해 그려졌다. 신체 비례가 적당한 인물의 형태와 이목구비의 표현, 조화롭고 밝은 색채의 사용, 세련된 필치의 화려하고 정교하고 다양한 문양, 주된 인물을 중앙에 크게 그린 다음 기타 인물을 뒤로 물러나게 배치하는 구도법 등은 의겸의 특징적 표현수법으로서, 경상남도 진주 청곡사 영산회상 괘불탱(국보 제302호)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괘불을 보관하는 궤는 뚜껑 윗부분 일부가 결손된 것 외에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괘불탱 조성 1년 뒤인 1731년에 만들어진 이 궤는 ‘만(卍)’‘왕(王)’‘십자(十字)’ 및 범(梵字) 무늬가 투각되어 있는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의 금속장식 또한 보기 드문 예로 당시의 금속공예 연구에 귀중한 예라 할 수 있다.

 

괘불탱은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사천앞 바다를 통해 몇차례 반출을 시도했지만 풍랑으로 인해 실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690년에 제작된 동종은 반출되어 현재 도쿄 네즈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관음보살도...문화재청

 

운흥사 관음보살도는 1730년 義謙이 수화승을 맡아 운흥사 삼세불도와 삼장보살도, 감로왕도를 조성할 때 함께 제작한 것이다. 불화 조성에는 의겸 외에도 幸宗, 採仁이 참여하였다. 운흥사 관음보살도 외에 義謙이 제작한 관음보살도는 1723년 여수 흥국사 수월관음도(보물 제1332호)와 한국불교미술박물관 소장 1730년 수월관음도(보문 제1204호)가 있다. 그리고 불상으로는 1730년 부산 내 원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부산시 유형문화재 제47호)도 전한다.

운흥사 관음보살도는 보타락가산에 遊戱坐자세로 앉아 있는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淨甁, 靑鳥, 1쌍의 靑竹, 선재동자를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운흥사 관음보살도의 기본적인 구성과 도상은 1723년 흥국사 수월관음도와 동일한데, 정병과 靑竹1쌍, 靑鳥의 위치가 좌우 바뀌었고, 화면 하단에 용녀와 용왕이 등장하는 점, 복식의 문양이 간략해진 점 등이 차이가 있다. 관음보살의 표현은 1730년 한국불교미술박물관 소장 수월관음도와 흡사하다.

머리에 입상의 화불을 모신 보관을 쓴 관음보살은 오른손으로 바위를 짚고, 왼손은 무릎에 올렸으며, 변형된 遊戱坐의 자세로 암반 위에 앉아 있다. 화면 하단 향좌측에는 선재동자가 합장하고 서있으며, 향우측에는 여의주를 받든 용녀와 홀을 든 용왕이 등장한다. 이러한 관음보살도의 형식은 1858년 통도사 관음전 후불탱, 1868년 운문사 관음보살도, 1869년 향로암 관음보살도 및 18~19세기 후불벽 배면에 벽화로 그려진 수월관음도 도상으로 이어진다.

운흥사 관음보살도는 義謙이 제작한 다른 관음보살도 가운데 관음보살과 선재동자, 용왕과 용녀의 화면 구성이 가장 알맞고, 상호의 묘사도 여성스럽다. 또한 의겸 특유의 수묵담채풍이 잘 반영되어있어 전반적으로 차분한 느낌을 준다.

 


운흥사 경판...문화재청

 

경남 고성군에 있는 운흥사는 모두 16종 194판의 불교관련 문헌 목판을 소장하고 있다. 이 목판들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새겨진 것들로 대승경전과 불교의식관련 문헌들이다. 이 가운데 정토신앙의 근본경전인 아미타경은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것을 숙종 28년(1702)에 다시 그대로 새겨 간행한 복간본이다. 거의 대부분의 판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조선 후기 절의 목판인쇄문화와 운흥사의 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운흥사 감로탱...문화재청

 

효(孝) 사상과 결합하여 크게 성행한 감로탱화는 조상의 극락왕생을 위해 그린 불교그림으로, 부처를 극진히 대접하여 조상의 영혼이 지옥세계로부터 구제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은 크게 세부분으로 표현되었다.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불·보살의 모습이 표현되었고, 중간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여러가지 음식을 차려 놓은 성반(盛飯)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먹지 못해 고통받는 아귀왕과 함께 지옥장면, 싸우는 모습, 형틀에 묶여있는 모습, 광대패놀이, 호랑이에게 쫓기는 모습 등등 인간이 그 업보에 따라 겪게 되는 갖가지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우란분절을 앞두고 많은 신도들이 절집을 찾아 조용히 들러보기는 어려울 듯하여 주마간산격으로 옛추억만 더듬고 나왔다. 예전에는 한적한 절집이어서 대웅전 앞까지 내려온 산토끼와 눈을 마주보며 즐기었건만 스님도 왜 그렇게 대해주시는지 알 수 없고...

2011.08.02 한국전통사팔정보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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