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고성군

고성...거류산 장의사

임병기(선과) 2011. 9. 30.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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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양의 친절한 안내를 놓치고 고성까지 냅다 달려 다시 돌아와야했다. 예전 창원 근무시에 빈번하게 출장을 다녔던 길이었는데 가족과 함께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장의사를 오르는 길은 넓지는 않았지만 포도이어서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는 한적한 산길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거류산 등반코스로 왕래가 잦은 듯 보였지만 우리처럼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러 오는 사람은 흔치 않은 조용한 절집이었다.

 

거류산은 소가야때는 태조산(太朝山)이라 불렀고, 조선 초기에는 거리산(巨吏山)으로 조선말엽에는 거류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먼 옛날, 여염집 규수가 부엌에서 밥을 짓다 밖을 나와보니 산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아낙이 놀라서 "산이 걸어간다" 라고 소리쳤고, 산은 누가 보면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니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때 걸어가던 산이라는 뜻으로 ‘걸어산’으로 불렸고, 그 산이 오늘날 고성의 진산 거류산(巨流山, 해발 570.5m)이다.

 

장의사를 애워싸고 있는 거류산은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축성된 산성’으로 소가야때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어느 왕이 축성했다는 것은 기록에 없다. 성의 구조는 다첩식으로 쌓아으며 2000년의 유구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대부분이 붕괴되었으나 부분적인 윤곽만 잔존하여 이끼낀 성돌이 딩굴고 있는 성을 고성군이 2098년부터 복원하고 있다. 이 성내인 거류산 정상에는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는 자연 옥수가 땅밑에서 솟고 있으며 큰 가뭄에는 고성군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는 등 명산으로 불리고 있다.

 

 

장의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선덕여왕 1년(632)에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장의암의 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인 1891년 신묘년 작성 ‘고성부거류산장의암중창기문(固城府巨流山藏義庵重創記文)‘를 보면 당태종 정관 6년인 632년에 창건했다고 나와 있으나 이후에 사적을 알 수 없다고 나와 있다.

 

이후 1885년 을유년의 커다란 수해로 인해 장의사는 거류산의 원래의 사찰이 자리했던 위치에서 좀더 아래 쪽으로 휩쓸려 내려오게 됐는데 훗날인 1891년 성담 법운(聖潭 法雲)대사가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중창했다고 한다. 이 후 1920년 호봉(虎峰)스님에 의해 중건됐다고 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장의사는 안정사의 말사 내지는 산내암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장의사는 이 후 6.25사변의 병화를 입어 퇴락해 있던 것을 1969년 정관(靜觀)스님이 법당을 중수하고 1979년 성허(性虛)스님이 다시 가람을 중창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가람을 다시 일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주불전인 보광전에서는 49제를 올리고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누라와 아들놈은 조용히 입장하여 삼배를 하고 좌정한다. 제를 마친 스님이 아들놈 인상 참 좋다며 이름을 물었다고 마누라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참!!  보광전 뒷쪽은 차밭으로 장의사 차에 대하여 논평한 기사를 옮겨 왔다.

 

2010년 국립산림과학원 야생차 연구팀이 남부지방 39개 지역에 자생하고 있는 야생차나무에 대한 성분분석을 실시한 결과 고성 거류면의 장의사(臧義寺) 뒷산에서 자생하는 야생차나무가 유용성분인 카테킨(catechin)과 탄닌(tannin acid) 함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통 곡우를 전후해 맨 처음 싹을 틔운 찻잎을 따는 것이 차의 색과 맛, 향이 가장 좋은 햇차를 만드나 장의사 야생차의 경우 거류산(570m) 중턱에 위치하여 평지보다 기온이 2∼3℃ 가량 낮아 일반적으로 석가탄신일(음력 4.8) 직후 수확한다. 이렇게 수확한 차는 별도로 판매하지 않고 덖음차를 만들어 장의사를 찾는 신도들과 나누어 마시고 있다.

 

보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니고 아미미타 삼존불을 모셨다.  석조아미타불과 우측의 목조대세지보살좌상은  약 200년 전에 조성했다고 전해오지만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듯 비지정 문화재이다. 관음보살상은 도난후 다시 봉안하였다.

 

천불전

 

 

사성각? 성탱화, 산신탱화, 용왕탱화, 독성탱화가 봉안되어 있었다. 다른 절집에서 삼성각에서 볼 수 없는 용왕을 모시고 사성각 편액을 걸었다.

 

 

특이하게도 산신탱은 보살의 모습이다. 거류산의 산신이 여성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석조여래좌상은 장독대 옆에 계신다.

 

 

자료에는 홍수로 인해 절 뒷쪽에서 떠내려온 불상이라고 했는데 스님은 부산에 거주하는 보살님이 모신 불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담한 석불좌상은 광배와 하나의 부재에 돋을새김되었으며 얼굴은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 없으며 우견 편단의 법의의다. 고려시대 불상으로 판단된다.

 

내려오는 길. 내쳐 달리고 싶은 나의 바램과 달리 마눌과 아들놈은 당동포구를 하염 없이 바라보고 있다. 내륙이 삶의 근거지인 사람에게 바다와 포구는 서정과 더불어 해풍,갯내음,갈매기,만선이라는 낱말의 어감만으로도 아련한 감흥에 젖어들게 할터이니,재촉할 수도 엄꼬!!!

                                           2011.08.02   ***고성군청.전통관광사찰정보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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