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집인 모양이구나. 어렵게 인연지은 절집이다. 첫번째는 쏫아붓는 폭우를 뚫고 달려왔지만 계곡물 범람을 우려한 공단직원에 의해 출입을 봉쇄당하였고 또 한번은 초딩 동기들과 관광버스 대절하여 등산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집안 혼사로 무산되었었다. 그래서인지 늘 마음속에 죄스런 빚으로 남겨진 강천사. 장독대 형상의 기둥의 상징성이 분명 있을텐데.
주차장을 지나 초입에서 만나는 병풍폭포. 병풍바위를 비단처럼 휘감는 폭포로 높이 40M, 폭15M, 낙수량은 분당 5톤이며 작은폭포는 높이 30M,폭5M 이다,전설에 의하면 속세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병풍바위 밑을 지나면 죄가 소멸 한다고 하여 물속에 뒤어 들고 싶었지만 입수금지 경고문이 발길을 잡더라.
강천산은 1981년 1월 7일 전국에서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순창에서 정읍 쪽으로 약 8㎞ 가게 되면 이 곳 강천산 입구에 이른다. 진입로 좌측에는 넓고 아름다운 맑은 강천호가 있다.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이 비단결같이 잔잔한 호수 위로 비춰질 때면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 그리고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절경 등의 볼거리를 갖춘 풍부한 관광자원이 있어 자연공원으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산세가 웅장하거나 높은 편은 아니지만 계곡이 깊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광덕산은 몰라도 강천산은 잘 알고 있는데, 강천산이라는 이름은 원래 강천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강천산군립공원. 영문도 모르고 차량 출입금지 푯말에 불만을 가졌지만 진입공간에 신발과 양발을 벗고 맨발로 흙을 밟으며 산책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가 있었다. 신발을 벗어들고 유유자적 즐기는 답사이어야 하건만 발바닥에 전해오는 촉감 대신 눈에 담기도 바쁜 시간의 노예가 되어 길을 재촉했다.
진입로 요소요소에 설치된 벤치에 앉으면 명경지수의 계곡물 사이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1급수에서만 생존하는 송어를 볼 수 있다.
벌써 몇번째 다리인가? 절집에 가는 길 어니 다리는 멀고도 멀다 . 두륜산 대흥사는 9개 었던가? 통과의례? 그건 나의 마음 가짐을 돈독히 하라는 암시겠지만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날은 덥고 땀은 비오듯 흘러내려 오히려 자세가 흐트러지니 사천왕이든 금강이든 나투시어 건방진 중생 버릇을 고쳐야하는데 염천에 휴가를 떠난 듯 절 집 진입공간은 한가롭다.
절에서 전하기로는 887년(진성왕 1)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1316년(충숙왕 3)에 덕현(德賢) 스님이 중창하면서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에서는 1482년(성종13)에 작성된 「강천사모연문」을 통해 이 해에 절이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연문은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가 적은 글로서 당시 강천사의 중건에 관련된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신말주는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1470년(성종 1)에 순창에 내려가 오랫동안 있었다고 한다. 이 모연문에 따르면 절은 옛날에 신령(信靈) 스님이 광덕산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그곳에 초암을 짓고 지낸 것에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절이 폐허가 되자 중조(中照) 스님이 서원을 내어 시주를 모아 중창했는데, 부근에 부도가 있으므로 절이름을 임시로 부도암으로 불렀으며, 이 때 절은 비록 자그마한 규모였지만 청정한 수도처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절은 다시 퇴락되었고, 중조 스님은 설씨의 도움을 얻어 중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때의 중창은 설씨 부인의 힘이 매우 컸는데,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권위가 사회를 지배하던 당시에 여인의 힘으로 큰 불사를 이룬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모연문에 나오는 절의 창건 부분이 절에서 전하는 내용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중창 내력을 잘 전하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후 절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으나 1604년(선조 37)에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했다. 한편 1760년(영조 36)에 출판된 『옥천군지』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 ․ 용대암 ․ 연대암 ․ 왕주암 ․ 적지암 등 5개 암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절의 규모가 컸음을 집작케 한다. 이어서 1855년(철종 6)에는 금용(金容) 스님이 중창했다.
계곡에 걸쳐진 다리가 예사롭지 않다. 물을 건너기 위한 목적이라면 저렇게 견고하게 건설하지 않고 사진 아래에 보이는 징검다리가 오히려 절집 분위기에 어울릴텐데. 암자로 가는 길 아니면 다른 용도가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안내문을 원망하지 않고 발품을 팔았더니 부도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부도는 현재 4기가 있는데, 부도군은 사찰의 정문에서 300m 떨어진 위락단지 방향으로 위치해 있다. 부도군은 문헌자료가 없어 어느 때 주석한 스님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종형으로 지대석과 석종, 보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후기의 사회적 불안과 불교의 퇴락으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간략한 형식의 부도를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도에서 조각은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부도밭에는 4기의 부도가 있는데 부도에 새겨진 법명은 세월이 오래 지나 모두 풍화되어 알 수 없으나 법명은 알 수 있다. 부도 전면에서 왼쪽 첫 번째 것은 이월달(伊月堂), 두 번 째는 월하당(月河堂), 세 번째는 미상, 네 번째는 미월당(眉月堂)이다. 부도군은 현 주지스님이 부임하여 정리하였다.
대웅전은 1961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위에 팔작지붕으로 만든 목조건물이다. 원형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형식으로 세웠다. 외부 벽화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창호는 교살창이며 중앙칸은 3분합이고 좌우의 협칸은 각각 2분합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천장은 목조 구조가 들어나 보이는 연등천장이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대웅전 삼존불. 여러자료에는 현판 때문인지 석가여래 삼존불로 설명했지만 미타 수인의 아미타불 삼존불 같다. 좌우 협시가 지장과 관음보살이다.
대웅전 중정의 훼손된 석등부재. 기단과 옥개 상륜의 보주가 남아 있다. 새로 조성된 두 기 석등이 불을 밝히고 있지만 옛부재를 활용하여 간주석과 상대석 화창을 복원하였으면 좋을텐데. 어느 절집 스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새로 조성하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고 했다. 빈자일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러한 사찰이정표에 천년고찰이라는 문구는 왜 표기하는지 모르겠다. 사찰의 격은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윽하게 배어나오는 것이다.
강천사 다보탑(多寶塔). 왜 다보탑인가? 석가탑과 더불어 초기에는 쌍탑이었을까? 아마 다보여래 경전의 법사리를 봉안하여 그렇게 불리운 것은 아닐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 방형의 대석 위에 초층 탑신을 직접 세운 석탑으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초층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그 위에는 왼쪽 부분이 심하게 파손된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옥개석은 상당히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을 갖추고 있는데, 처마는 직각을 이루며 옥개석의 윗면에는 1단의 낮은 탑신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2층과 3층 탑신도 우주가 모각되었지만 초층 탑신에 비해 급격히 축약된 모습이다.
층급받침 역시 3단으로 구성되었지만 1층의 그것보다 더 높다. 옥개석 상부에는 1단의 탑신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4층 탑신석은 3층 탑신석에 비해 높고 우주가 모각되지 않았으므로 또 왼쪽 부분이 치석되지 않은 점에서 후보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이 결실된 채 복발과 보륜이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중정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 3기가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에는‘ 乾隆八歲十五’로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많은자료에 당간지주로 표기되어 있어 안타깝다. 자료를 마구잡이로 퍼가서 유포시킨 결과이다. 전남 강진 어느 절집 스님 말씀대로 구태여 구분하는 내가 문제인가?
절의대 삼인대
모과나무
강천사...윤인구
장 맞드는 게으른 사월 2011.07.26 ***순창문화원.문화재청.한국전통사찰정보를 참조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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