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장수군

장수...장수향교.정충복 비

임병기(선과) 2011. 8. 11.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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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서원은 늘 닫힌 폐쇄 공간(?)이지만 장수 향교는 보물을 떠나 답사매 니아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문화재며 정경손비각도 둘러볼 겸 들렸더니 이외로 문이 열려 있었고 외삼문 우측 문에 방명록을 비치해둔 것으로 미루어 상시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혼자 답사중에 젊은이가 다가와 용무를 묻고는 잘보고 가라며 인사까지 한다. 다른 지역의 향교관계자들에게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장수향교는 태조 때 건립을 시작하여 태종 7년(1407)에 완성되었다. 본래는 장수읍 선창리 당곡에 있었으나 터가 낮고 좁아 1686년(숙종 12)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1957년 2월 15일에 국보제 420호(중앙고적위원회)로 지정되었다가 변경되었다.
이 향교는 완전한 평지에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서 양재와 명륜당, 사마재가 있다.


내·외삼문이 종축으로 길게 세워져있다. 명륜당이 앞에 있고 뒤쪽에 대성전이 있는 소위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평지에 위치한 대부분의 향교들은 서울의 성균관과 전주향교, 나주향교, 경주향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전면에 대성전이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가 보편적이다. 반면에 경사지에 입지한 향교들은 일반적으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으나 장수향교는 평지향교이면서도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여 주목된다.


 

                                                                            향교정문 정경손비각

충복 정경손(丁敬孫, 관향 창원)
왜군이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을 침공하고 북상중 장수향교를 불태우려하자 향교지기 정경손은 “이곳은 성전이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침범하려거든 나를 죽이고 가라”고 하며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다고 합니다. 이 의기에 감복한 적장이 오히려 “이곳은 성전이니 침범하지 말라(本聖域勿犯)”는 신표를 써주어 장수향교를 보존할 수 있게 되어 원형대로 보존되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 그분의 얼을 기리는 제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장수향교를 지킨 충복 정경손은 장수삼절중의 한분으로 “충복 정경손 수명비(문화재 자료 제38호)”가 있다.

 

충복 정경손 수명비(문화재 자료 제38호)

 

호성(護聖)충복정경손수명비(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세움)
‘임진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만파처럼 흐트러져 모두 다 죽음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의로운 소리 어찌 없으리오. 왜장이 향교의 성전에 들어왔으니 당시의 광경을 보면 하늘에 해가 조림하고 있으나 다섯 성인의 위패가 위태롭다가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힘이런가. 옛 충복 정경손이 사당의 뜰에 엎드려 죽음을 맹세하고 수호하였으니 끝까지 변함이 없었고 늠름하고 떳떳한 담기로 추상과 같이 항거하여 숨 막히는 의기를 범하기 어려웠다. 그 의기의 집요함에 감동되어 뒤에 오는 왜군들에게 범하지 말라는 뜻의 서신을 주었다.

 

 

오호라 천지간에 굳고 참된 기운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굴복하지 못하게 한 것인 즉 당일 충복이 깨끗하게 지킴은 가히 백만의 대군을 대적할만하니 어찌 존경하지 않으리오. 부끄럽도다. 이 늙은이 흰머리의 썩은 선비로서 지금까지 나의 공을 이루지 못하였음이로다. 그 의로움에 감격하여 지금 여기에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하니 외람됨으로서 그 말을 잃어버려 옹졸하게 되었으나 사실을 주어 모아 이 글을 적노라.

 

장수향교 이건비

 

옛날 장천현에 향교가 있었는데 그 터가 당곡(당골)에 있었다. 장마가 지면 터에 물이 넘쳐흐르고 주토가 물에 잠기고 대들보가 허물어지곤 했다, 그리하여 성현의 영혼께서 편히 계실 곳이 더욱 못되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몇 년이 되었다. 신유년(1681) 이 고을 유림 한유일 등이 비분하고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하늘에 기구하고 건물 옮길 것을 합의한 뒤에 이건장을 올리니 임금의 윤허가 있었다.

 

이에 옛 관아 터에서 경치가 좋고 습기가 없고 양지 끝으로 물이 흐르는 곳을 잡았으니 모두가 즐겁게 생각할 수 있는 땅이라. 오로지 이 때 현감 이선연께서 실로 이 땅을 지키면서 정성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자신의 봉록을 털어 사무를 처리하고 유생 한익삼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도록 하여 을축년(1685) 3월에 착수 12개월 후인 다음해 2월(1686)에 대성전, 문간 등을 모두 완공했다. 이로 말미암아 묘당의 모습이 크고 편안하게 되었으며 모두가 예법에 마땅하게 되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아! 유림들이 성현을 존숭하는 것이 부지런하지 아니하고 어찌 이 같은 일을 시작 하는데 솔선하지 않았으려마는 이 일을 시작하는데는 이 현감께서 배움을 숭상하는 정성이 있어서 그러하였다. 그 남은 일과 그 일을 모으는데는 주민과 현감이 서로 기다려 마침내 그 이름을 이루는데 도달하게 되었으니 우리들로 하여금 성묘가 영원토록 편안하기를 바라며, 이 고을 유림들도 그것이 가히 즐거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현감의 어짐은 어떠하겠는가, 모두다 이르기를 이같은 큰일은 마땅히 무사가 전해지는 것처럼 끊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고을에서 유생 손극수를 보내서 흥해군수 유화에게 비명을 간청하니 거절하지 못하고 비명을 짓게 되었다. 비명에 이르기를 옛터는 물구덩이라, 영혼이 편하게 계시기에는 마땅치 못함이니 아래로 옮기게 되어 성묘가 편안하고 즐겁게 되었다. 이는 선비들의 정성이요, 현감의 어짐이라 나는 그것을 칭송하고 술회하노니 영원토록 드리우기를 바라노라.


기사년(1689)이월 하한
통훈대부행흥해군수 완산 유 화 삼가 짓다.
청성후인 한만일 삼가 새기고
신미년(1691) 오월 일 비를 세우다.

 

                                                                              외삼문

 

                                   부강문扶綱門. 조선왕조의 통치철학인 유교를 잘 받들고 지킨다는 의미 아닐까?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작품이라고 한다.

 

명륜당은 정면4칸, 측면3칸 팔작지붕형태이며 이 집은 전후로 마루가 있다. 뒤편마당에 동서재가 있어 실질적으로 뒷면도 정면이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청앞뒤에 모두 분합문을 달아 두개의 정면을 형성한다. 마루구조에 유의할 것은 보통은 기둥 중간에 마루를 거는 것이지만 이 집은 반대로 마루 머름위에 기둥이 올라탄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적어도 16세기 이전에 보기 드문 형식으로 태종7년에 창건되었던 원형이 그대로 이건 되어 보존된 것을 알 수 있다. 좌측(서쪽)의 기둥 밑에는 초석대신 짧은 누하주가 있고 그 위에 귀틀이 짜져있어 원래 중층이었을 가능성을 두는 사람도 있다.

 

 

사마재. 우리나라에 햔존 하는 사마재는 그리 많지 않다. 옥천.괴산. 경주에소 사마재를 보았지만 향교영역안에 들어선 곳은 처음이다. 사마재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강학, 회합 장소이며, 후진 양성 공간, 그들의 모임 자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옛기단에 사용되었던 부재의 안상

 

 

장수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낮은 석축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집 건축인데, 규모는 별로 크지 않다. 좌우 측면과 뒷면의 벽을 가슴 높이까지를 돌담으로 쌓아 기둥의 아랫몸을 감추어 놓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앞면이 겹처마이고 뒷면은 홑처마이며, 좌우의 박공머리에는 방풍판이 달려 있다.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앞면 가운데에는 여닫이문을 달았다. 오른쪽과 왼쪽 칸에도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달았는데 그 옆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창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러한 장식은 조선 중기 이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공포와 공포 사이의 화반

 

까치발

 

까치발. 귓기둥 중간에 고정되고 위로는 창방 뺄목과 만나며 끝은 첨차 뺄목을 받도록 자연스럽게 굽어 있어 직선적인 입면에 변화를 주면서 지붕과 축부를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해준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는데, 곧고 비교적 가늘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되어 있는데, 그 짜임은 다포집 계통의 포작이며 이출목 구성이다. 쇠서에는 복잡하게 연꽃이 새겨졌고, 윗부분에는 봉머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장식적인 요소는 조선조 후기의 건축일수록 더욱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기둥 위로 공포와 공포 사이의 공간에는 화반이 2개씩 배치되어 있다. 정면 2출목 구조인데 배면은 1출목 2익공의 구조이다.

 

 

향교에는 중국의 5성(五聖,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4현(四賢, 주렴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자(朱子))과 우리나라 18현(十八賢, 1. 빙월당 설총, 2. 최치원, 3. 안 유(安裕), 4. 정몽주, 5. 김굉필(金宏弼), 6. 정여립, 7. 조광조, 8. 이언적(李彦迪), 9. 이황, 10. 김린후(金麟厚), 11. 이이(李珥), 12. 성혼(成渾), 13. 김장생(金長生), 14. 조헌(趙憲), 15. 김집(金集), 16. 송시열, 17. 송준길(宋浚吉), 18.박세채(朴世采))을 배향하고 있다  

*** 장수문화원 홈페이지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2011.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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