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장수군

장수...의암송

임병기(선과) 2011. 8. 10.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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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군청의  의암송. 천연기념물 의암송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1592) 때 의암 논개가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지역 주민들이 예전의 장수 관아 뜰에서 자라는 이 나무에 논개를 추모하는 뜻에서 붙여놓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의암송은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9m, 가슴높이의 둘레 3.22m의 크기로 줄기는 한 줄기이며, 땅으로부터 1m부분에서 줄기가 시계방향으로 뒤틀어져 나선형을 이루고 있어 용이 몸을 비틀고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

 

 

 나무 윗부분은 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져 우산 모양을 하고 있다.

 

 

 진주의 의암과 옛 장수 관아의 뜰이었던 이곳의 의암송은 무슨 인연이며,  관기가 어떻게 장수 관아에 소나무를 심을 수 있었을가?  예전 화순 답사기 최경영을 모신 충의사당 글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면 최경회와 논개는 어떤 사이였을까? 여기서 논개의 출신이 진주, 또는 생가 성역화가 끝난 장수이냐는 별개로 하고,아직도 논란이 끝없이 지속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가장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주논개와 최경회의 관계를 보면...

장수땅 대곡리 주촌마을이 그녀의 고향이고 성은 주(朱)씨이다. 태어나기를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곧 개해 개달 개날 개시에 태어나서 논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논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 집에서 자랐는데 건달인 외삼촌이 그를 지방 토호에게 첩으로 팔려고 했다.


이에 논개가 어머니와 함께 장수 현감인 최경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방면하였다. 이후 논개는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많은 전공을 세운 후 임란 3대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후에도 성주성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참전하였다가 패하자 남강에 투신하게 된다. 논개도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을 도우며 전투를 지원했지만 패하고 남편 최경회도 투신하자 왜군들이 승전잔치를 벌이는 장소에 기생으로 위장하여 잠입 왜장을 안고 최경회가 투신한 남강의암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 하게된다.

 

군청 옆 도로변에는 장수 현감중에 재직중이던 최경회가 우물을 정비하고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역사적 편년으로 해석하면 의암송 보다 먼저 장수관아에 식재된 나무이다.

 

 

사실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달빛에 젖은 설화가 햇볕에 들어나도록 최경회와 논개 부부를 위하여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이벤트를 하였으면 좋겠다. 국적이 불분명한 온갖 데이(Day)가 난무하는 세상인데, 지자체에서 특정 날짜를 지정하여 두 나무 사이를 오방색 밧줄로 연결하는 등의 합방合房(?)의 예를 열어 주면 어떨가? 일례로 비로전  쌍둥이 비로자나불을 위해 칠월칠석날 비로자나데이를 개최하는 해인사의 사례를 벤치마킹 하면 좋을 것이다.

 

2011.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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