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합천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런저런 사유로 몸과 마음이 지친 일상이 계속된다. 문득 해인사를 다녀오고 싶어 마누라에게 이야기했더니 왠일인지 동행하겠다고 한다. 좀처럼 동행하지 않은 집사람이었는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분명 내속내를 읽고 위로해줄려는 마음이겠지. 25년차가 넘었으니 이심전심 부창부수 한 몸이나 다름이 없지않겠나? 뭘 하나라도 더 맥일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뒷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이 보인다면 팔불출인가?
합천 초계에 계시는 이모님댁에 갈때 가끔 지나갔지만 옥전고분군의 처음이었다. 쌍책면 성산리 구슬밭玉田 일원에 산재한 가야의 무덤군이다. 고분군은 해발 50~80m 가량의 야산 정상부에 분포하고 있는데 1985년부터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옥전 고분군은 합천과 거창지역을 유역권으로 하는 황강이 낙동강 본류와 합쳐지기 전 하류의 관문지역에 위치하며 본류와는 약 6㎞ 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의 지세는 남쪽으로 황강과 해발 200m의 단봉산을 사이에 두고 초계분지와 접해 있으며 양 지역은 단봉산과 옥두봉 사이의 협곡을 통해 내왕이 가능하다. 북쪽으로는 해발 200m 정도의 고개를 넘으면 협곡을 통해 고령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있다. 고분군은 몇 개의 능선에 나누어져 분포하고 있으며 약 1,000 여기에 달한다. 경상대학교 박물관이 1985년부터 1991년까지 5차에 걸쳐 발굴하여 10권의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조사보고에 따르면 소형 돌덧널무덤(石槨墓)이 전체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가운데, 이른 시기의 덧널무덤(木槨墓)은 능선의 정상부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주로 분포하고 고총고분은 서남쪽의 고개마루 건너편의 능선에 27기가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 조사된 고총고분과는 달리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을 내부 주체로 하는 고총고분이 능선의 동북 반대편의 또 다른 능선에도 형성되어 있다. 옥전고분군의 묘제는 소형 덧널무덤 → 대형 덧널무덤 → 고총고분(대형 덧널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앞트기식→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하였으며, 소형 덧널무덤 단계의 지표유물은 무개무투창고배(無蓋無透窓高杯)이고, 대형 덧널무덤 단계의 지표유물은 유개유투창고배(有蓋有透窓高杯)이며, 고총고분단계의 지표유물은 고배와 유개식장경호(有蓋式長頸壺)이다 M1호분
고분의 입지를 살펴보면 거대한 봉토를 갖춘 고총(高塚)들은 그밖의 다른 무덤들과 떨어져서 분포하고 있으며 무덤구조는 덧널무덤[木槨墓], 대형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약간의 독무덤[甕棺墓]들로 구성되어 있다. 덧널무덤은 4~5세기에 걸쳐 이용되었다. 덧널무덤에서 나온 중요유물로는 8호분에서 출토된 투구[彎曲縱長板伏鉢胄], 42호분에서 출토된 안장꾸미개[鞍金具], 70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귀걸이[金製耳飾]·은상감환두대도(銀象嵌環頭大刀)·화살통[胡籙]·투구[胄]·목가리개[頸甲]·발걸이[鐙子]·안장꾸미개 등을 들 수 있다. 출처...합천박물관 |
M2
구덩식돌방무덤에서는 투구류의 비중이 높아진다. 20·28·35호분에는 각기 2점씩의 투구가 부장되어 있었으며 23호분에는 금동제복발(金銅製伏鉢)과 금동제소찰(金銅製小札)이 포함된 투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5·20호에서는 비늘갑옷[札甲]이 발견되었는데 20호의 경우 목가리개가 함께 출토되었고 28호분에서는 판갑옷[板甲]이 출토되었다. 특히 28호분에서는 말머리가리개[馬胄]·말갑옷[馬甲]도 출토되어 이채로운데, 이러한 유물은 고구려를 포함한 북방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23호분에서는 금동제관모(金銅製冠帽)가 출토되어 이 고분의 피장자가 이 지역에서 최고 권위를 누렸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M3
피장자의 머리 쪽에는 금동장안장가리개[金銅裝鞍輪]·금동장말띠드리개[金銅裝杏葉]·재갈[轡] 등의 마구류와 함께 화살통·쇠살촉[鐵鏃]·투구·경갑·뚜껑접시[蓋杯] 등이 놓여 있었으며 발치에는 경갑이 달린 비늘갑옷·말머리가리개·금동장투구·발걸이·기꽂이[蛇行狀鐵器] 등이 놓여 있었다. 피장자의 왼쪽에는 용봉문환두대도·친자대도(親子大刀)·화살통·쇠살촉·말방울[馬鈴]·사지창(四枝槍)·쇠투겁창[鐵鉾]·쇠끌[鐵鑿]등이, 오른쪽에는 각종 환두대도·미늘쇠[有刺利器]·청동합(靑銅盒)·철제살포[鐵鏟]·소형토기·쇠살촉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딸린돌방에는 굽다리접시[高杯]·뚜껑접시·목단지[長頸壺]·그릇받침[器臺]·뚜껑달린단지[有蓋短頸壺]·큰독[大甕] 등의 토기류와 쇠끌 등이 놓여 있었으며, 사슴뿔이 발견되고 있다.
출처...합천박물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용봉문환두대도·말머리가리개·금동장투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이 무덤의 피장자가 다라국의 최고 지배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기의 경우는 고령지방 출토 토기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의 피장자가 속한 집단이 대가야연맹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연대는 5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4세기부터 5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무덤은 이 지역 고유의 요소가 강하나 이후 시기의 것들은 고령의 대가야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덧널무덤 자체의 변화과정에서도 추적되는데 M3호분은 이미 대가야권에 편입된 이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라국에 대한 역사기록은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만 나타나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旁小國 有半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等 附之”(『양직공도』 백제국사전) → 주위에 소국은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이 있는데 백제를 따른다.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 比自·南加羅·啄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일본서기』권9 신공기 49년 3월) → 다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쳐서 격파하였다. 그리고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夏四月 安羅次旱岐 夷呑奚·大不孫·久取柔利 加羅上首位 古殿奚 卒麻旱岐 散半奚旱岐兒 多羅下旱岐 夷他 斯二岐旱岐兒 子他旱岐等 與任那日本府 吉備臣 往赴百濟 俱聽詔書”(『일본서기』권19 흠명기 2년 4월) → 여름 4월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반해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일본부 길비신과 백제에 가서 같이 칙서를 들었다. “日本吉備臣 安羅下旱岐 大不孫·久取柔利 加羅上首位 古殿奚·卒麻君 斯二岐君 散半奚君兒 多羅二首位 訖乾智 子他旱岐 久嗟旱岐 仍赴百濟”(『일본서기』권19 흠명기 5년 11월) → 일본의 길비신, 안라의 하한기 대불손과 구취유리,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사이기군과 산반해군의 아들, 다라의 이수위 흘건지, 자타의 한기, 구차의 한기가 백제에 갔다.
“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 二十一年 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嗟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合十國)(『일본서기』권19 흠명기 23년 정월) →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서 없앴다(일서에 말하기를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임례국 합해서 10국이다)
A.D.400년 전후 합천 옥전지역에는 갑주(甲胄)를 비롯한 무기와 마구(馬具), 장신구(裝身具) 등의 금속유물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러한 금속유물의 원류(原流)는 고구려지만 토기와 묘제(墓制)의 양상을 보면 부산·김해지역에서 이미 정착된 문화가 이 지역에 들어왔으며, 단순한 문화 전파가 아니라 주민의 이동에 의한 유입이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고분의 규모와 부장유물의 성격은 이 지역에서의 최고지배자가 등장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시기에 ‘다라국(多羅國)’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금속유물이 대부분 고구려계 유물이므로 다라국의 성립 요인은 고구려의 정치적 움직임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A.D.400년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남정(南征)’이라는 한반도 남부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즉 최근의 연구성과에서 알 수 있듯이 4세기대부터 산발적으로 영남지역에 유입된 고구려로 대표되는 북방문물이 경주나 김해·부산지역에 어느 정도 정착된 상태에서 전개된 고구려의 대규모 군사행동은 고구려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됨과 동시에 경주와 김해·부산지역에 격심한 정치·사회적인 충격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이 지역 주민의 한 갈래가 옥전지역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다라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무늬토기시대 후반 중국 철기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독자적인 철기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특히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변진(弁辰)에서 생산한 철을 주변 여러 나라에서 가져가고, 교역할 때 화폐로 이용하였으며 낙랑·대방군에까지 수출하였다’는 기사는 삼한의 수준 높은 철기문화를 잘 대변해 준다. 가야의 경우 다른 고고유물들이 주위 나라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철기만은 오히려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볼 때 가야와 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제 갑옷은 방형, 장방형, 삼각형의 철판을 가죽 또는 못으로 고정하여 만든 판갑(板甲)과 비늘 모양의 작은 철판을 가죽으로 연결해 만든 비늘갑옷(札甲)으로 나뉜다. 판갑은 철판의 형태와 철판을 연결하는 재료에 의하여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종장판혁철판갑, 삼각판혁철판갑, 종장판정결판갑, 삼각판정결판갑, 방형판혁철판갑 등이 있다.
판갑은 주로 보병용으로, 비늘갑옷은 구조상 판갑에 비하여 활동이 편하므로 기병용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안악3호분 벽화에는 판갑옷을 착장한 보병과 중무장한 말을 타고 갑옷과 투구를 착장한 기마무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갑옷의 쓰임새를 잘 알 수 있다.
투구에는 몽고발형투구(蒙古鉢形胄, 縱長板胄)와 세모꼴투구(衝角附胄), 차양 있는 투구(遮陽胄), 철이나 금동제의 관모 모양 복발(覆鉢)을 붙인 관모모양투구(冠帽形伏鉢胄) 등이 있다. 한편 합천 옥전 M3호분에서 나온 투구는 철판을 장식적으로 오리고 그 위에 금동을 입힌 호화로운 것으로 평남 태천의 농오리산성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여 고구려 투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야의 고분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와 종류의 말갖춤이 출토되며, 그 기능과 쓰임새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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