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용인시

용인...어비리 석탑.석등

임병기(선과) 2011. 6. 13. 07:29
728x90

 

 

 

본래 절 이름은 금단사(金丹寺)였는데, 임진왜란을 맞아 폐사되었다가 1950년 무렵에 한 처사가 법당을 짓고 신흥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이후 1963년에 옛 어비리사지(魚肥里寺址)이동저수지 조성으로 수몰될 때 차장업(車壯業)이 현재의 위치에 창건하였다.

당시 차장업은 석탑과 석불, 석등 등을 보호하기 위하여 옛 절터의 유물을 모두 이곳 동도사로 옮겨왔다. 그리하여 동도사는 새로 창건된 사찰이지만 신라 때의 사찰 법등을 소장하게 되었다. 2005년 9월 현재 불탄 만월보전 터전에 극락보전을 신축하는 불사를 진행 중이다....디지털 용인 문화대전

 

근데 참 재미있는 것은 어비리 지명이다."魚肥里"寺址 고기가 통통하게 살이 오를려면 물속이어야만 될 것이니 당연히 그곳에는 댐이나 저수지가 조성되지 않겠나?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동저수지를 예견하고 그런 지명을 붙였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하여 소실된 금단사지에 있었던 석탑이다. 임진왜란 이후 주민들은 탑의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여 같은 장소에 다시 세웠으나 1963년 저수지 공사로 탑이 수몰되게 되었다. 그러자 동도사에서 사찰 경내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탑을 옮길 때에 석탑 내부에서 토제 삼층소탑(土製 三層小塔) 1점과 청석제 향로(靑石製香爐) 1점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동도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2중 기단에 1층 탑신을 받치는 별석과 옥개석의 4단 층급받침, 곡이 심한 낙수면 등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계 탑이다. 1층 탑신 아래에 별석의 받침을 둔 형식은 통일신라 후기에 나타나서 고려 후기까지 많이 유행하였다.

 

 

각 층의 탑신석은 모두 일석으로 만들었으며 네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각 층의 옥개석 역시 일석으로 제작하였으며, 4단의 층급받침이 잘 남아 있다.

 

 

 

옥개석의 처마 곡선이 경쾌하고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3층 옥개석 상부에 지름 68㎝ 정도의 원형 찰주공(擦柱孔)이 뚫려 있다고 한다.

 

 

 

화사석이 결실되고 하대석과 상대석, 파손된 간주석과 옥개석만 남아있던 것을 화사석을 보충하고 간주석을 보수하여 세웠다. 결손이 심한 편이지만 원래의 상태를 추정하기에는 충분한 편으로 현재 동도사에 전하고 있는 석불, 석탑과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 고려초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각 모서리마다 하나 씩 복련을 새겼으며, 그 위에 두 단의 돋을새김으로 간주석받침을 마련하였다. 간주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굵기에 비해 길이가 긴 편이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상대석 역시 팔각형 평면으로 모서리마다 하나 씩 앙련을 새겨 하대석과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다. 옥개석을 파손이 심한 편이나 팔각형 평면으로 지붕면을 2중의 곡선으로 처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저나 다시 길 나서야겠다. 사전에 인지하고도 뵙지 못한 님이 여러분이 계신다. 정말 환장할 지경이다. 동도사에서도 무엇에 홀리었길래 석불좌상을 놓쳤고 백련사는 들리지도 않았다. 나이탓은 아닐텐데. 우리님들은 부디 꼭 뵙고 오길 바라며 자료를 전통사찰정보에서 옮겨 왔다.

%uC6A9%uC778%uB3D9%uB3C4%uC0AC%20%uC11D%uAC00%uC5EC%uB798%uC88C%uC0C1
용인 동도사 석가여래좌상

대좌와 석불의 양식상 특성으로 보아 최소한 고려시대 초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비리사지에서 옮겨와 만월보전에 모셔져 있던 것을 최근에 지은 동도사의 金堂에 봉안하였다. 이 석불은 어비리사지의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마을 사람들이 미륵당을 지어 모신 바 있다고 한다. 특히 마을 사람들에게는 병을 고쳐주고 사악함을 물리쳐 주는 영험한 약사불로 인식되었었다고 한다. 1963년에 이동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석탑, 석등과 함께 車壯業 거사가 동도사로 이건하였다.

 

이 불상은 용인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좌를 완전히 갖추고 있다. 다만 중대석은 석불을 동도사로 옮겨온 후 누군가에 의해 반출되었는데, 금당을 모시면서 새로 조성하였다. 또한 화재로 인하여 불신과 대좌 이곳저곳에 상흔이 많은 편이나 최근의 보강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회복한 상태이다.

 

대좌는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상대석 및 중대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은 상하 2중으로 되어 있다. 하단의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각 면에 안상을 새긴 속에 사자상 1구 씩을 양각하였다. 마모가 심하여 조각의 세부적인 모습을 알 수 없으나 사자는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상단의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각 모서리마다 복련을 새겼다.

 

중대석은 별석으로 마련되었는데 현재의 것은 도난 후에 새로이 조성하여 보강한 것이다. 팔각형 평면으로 모서리마다 기둥형을 조각하였으며 그 속에 여래상과 공양보살상 등을 양각하였다. 원래의 중대석에는 정면 쪽 3면과 후면 1면에 부조를 하였는데, 중앙에는 유희좌 형태로 보이는 보살(중앙)상을, 좌우에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佛의 형상이 전신광배를 가지고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새겼다고 한다. 현재의 중대석에는 합장한 모습의 여래와 공양보살상 및 향로를 새겼다.

 

상대석에는 앙련을 새겼으며, 윗면에는 별다른 조각을 하지 않고 수평으로 면을 고르게 다듬었을 뿐이다. 석가여래좌상은 오랜 세월 방치되었기 때문에 일부가 파손되어 많이 변형된 상태이다. 특히 개금으로 표면을 깎아냈을 뿐 아니라 지나친 도금으로 이해 불상의 형태와 품격에 변화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최근의 화재로 더욱 심하게 훼손되었던 것을 복원하였기 때문에 원형의 변화가 매우 심한 편이다.

 

결가부좌 한 자세에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체 오른발 위, 배 앞에 두었으며, 오른 손은 오른발 무릎 부근에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왼손 위에 약함 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이 약사불로 불렀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원래 약사여래로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011.04.25

728x90
728x90

'경기도 > 용인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인...봉불사 석탑재  (0) 2016.07.11
용인...가창리 부도  (0) 2016.07.11
용인...목신리 석조여래입상  (0) 2011.06.12
용인...목신리 보살입상  (0) 2011.06.11
용인...두창리 삼층석탑.선돌  (0) 2011.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