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절 이름은 금단사(金丹寺)였는데, 임진왜란을 맞아 폐사되었다가 1950년 무렵에 한 처사가 법당을 짓고 신흥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이후 1963년에 옛 어비리사지(魚肥里寺址)가 이동저수지 조성으로 수몰될 때 차장업(車壯業)이 현재의 위치에 창건하였다.
근데 참 재미있는 것은 어비리 지명이다."魚肥里"寺址 고기가 통통하게 살이 오를려면 물속이어야만 될 것이니 당연히 그곳에는 댐이나 저수지가 조성되지 않겠나?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동저수지를 예견하고 그런 지명을 붙였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하여 소실된 금단사지에 있었던 석탑이다. 임진왜란 이후 주민들은 탑의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여 같은 장소에 다시 세웠으나 1963년 저수지 공사로 탑이 수몰되게 되었다. 그러자 동도사에서 사찰 경내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탑을 옮길 때에 석탑 내부에서 토제 삼층소탑(土製 三層小塔) 1점과 청석제 향로(靑石製香爐) 1점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동도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2중 기단에 1층 탑신을 받치는 별석과 옥개석의 4단 층급받침, 곡이 심한 낙수면 등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계 탑이다. 1층 탑신 아래에 별석의 받침을 둔 형식은 통일신라 후기에 나타나서 고려 후기까지 많이 유행하였다.
각 층의 탑신석은 모두 일석으로 만들었으며 네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각 층의 옥개석 역시 일석으로 제작하였으며, 4단의 층급받침이 잘 남아 있다.
옥개석의 처마 곡선이 경쾌하고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3층 옥개석 상부에 지름 68㎝ 정도의 원형 찰주공(擦柱孔)이 뚫려 있다고 한다.
화사석이 결실되고 하대석과 상대석, 파손된 간주석과 옥개석만 남아있던 것을 화사석을 보충하고 간주석을 보수하여 세웠다. 결손이 심한 편이지만 원래의 상태를 추정하기에는 충분한 편으로 현재 동도사에 전하고 있는 석불, 석탑과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 고려초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각 모서리마다 하나 씩 복련을 새겼으며, 그 위에 두 단의 돋을새김으로 간주석받침을 마련하였다. 간주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굵기에 비해 길이가 긴 편이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상대석 역시 팔각형 평면으로 모서리마다 하나 씩 앙련을 새겨 하대석과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다. 옥개석을 파손이 심한 편이나 팔각형 평면으로 지붕면을 2중의 곡선으로 처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저나 다시 길 나서야겠다. 사전에 인지하고도 뵙지 못한 님이 여러분이 계신다. 정말 환장할 지경이다. 동도사에서도 무엇에 홀리었길래 석불좌상을 놓쳤고 백련사는 들리지도 않았다. 나이탓은 아닐텐데. 우리님들은 부디 꼭 뵙고 오길 바라며 자료를 전통사찰정보에서 옮겨 왔다.
2011.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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