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제천시

제천...월악산 덕주사

임병기(선과) 2011. 4. 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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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005.06,09 수정:2011.03.20 사진:2011.03.12

 

 

그전에도 우리 아이들과 방문하였으며, 2005년 6월 1박2일 우리 옛님 첫 답사지가 미륵리사지, 사자빈신사지, 상.하덕주사. 충주 문화유적 투어였다. 그때는 내가 사진을 찍지 않아 한장의 사진도 남아 있지 않다. 2011년  답사 동선을 세우면서 하덕주사의 약사여래라 보고 싶어 동선에 포함시켰지만 주차장에서 이어지는 산길이 녹녹치 않다. 기억 저편에도 없는 산성문이 반긴다.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사 마애불 ...출처/문화재청

 

사람의 정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여 휘청거리는 밤을 보낸 몸은 파김치가 되었건만,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한 우리님들 덕주사 마애불 답사를 서두른다. 하긴 후에 알았지만 어제 눈앞에 두고 친견에 실패했으니 오기도 발동했겠지? 숙소로부터 수안보 미륵사지 송계계곡 덕주골을 거쳐 아랫 덕주사에 겨우 도착했는데도 몸이 엉망이다. 입에서는 감홍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에혀 눕고 싶지만 예비역 육군병장 임병장이 여기서 멈춘다면 육군의 불명예요, 우리 평택 임 가문에 오점이기에, 어제 마애불 친견에 실패한 님들이 의리 없이 앞서 등반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 4인방은 월악의 새벽공기를 폐부 깊숙히 들어 앉이며 여유롭게 즐긴다.

 

덕주사 창건 설화속으로 빠져 보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코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되었다.일행은 그곳 계곡 깊은 곳에 야영을 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날밤 왕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왕자에게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세우고 그 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

 

잠에서 깨어난 마의 태자는 꿈이 신기하기에 누이동생인 덕주공주를 불러 꿈의 얘기를 전하고 그 내용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같은 시각에 공주 역시 그와 같은 현몽을 받았다. 두 남매는 맑은 계곡물에 손과 입을 씻고 서천을 향해 합장배례한 뒤 다음날 서쪽을 향해 고개를 넘으니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 일행은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파란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이 보이는 장소를 택해 석불입상을 세우고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리고는 8년이라는 세월을 이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공주는 만족하였으나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지(初志ㅖ를 굽히지 않고 한계산성을 향해 떠났고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진 공주는 절에 몸 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을 그리워하며 태자의 건승을 빌었다 한다. 미륵리 석불입상은 마의 태자의 상이요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 공주의 상으로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하며 이들은 일년에 한 번씩 서기를 하여 서로 만난다"

 


출처...문화재청

 

 

한 말 이상의 땀을 흘리고 친견한 마애불상은 웃음 가득 머금고 손을 내밀지만  두번이나 하덕주사에 들렸으면서도 마애불을 답사하지 못한 죄책감에 기가 죽어 고개를 들지 못하겠더라.

 

마애불은 덕주공주가 세운 절이라고 전해지는 월악산 덕주사의 동쪽 암벽에 새겨진, 소발,희미한 삼도,야릇한 수인의  불상으로 고려초의 거대불의 양식을 취했으며, 아직도 전각이 있었던 흔적의 홈이 남아 있는 자연 암반에 얼굴부분은 양각, 신체는 선각으로 새겼지만,덕주공주 모습이라기에 보고 또 보고 수 없이 공주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며 삼배후 입정에 젖어 들었다.

 

참으로 대단한 님들이다. 밤새 마시고 노래 불렀건만 새벽에 마애불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오신 우리님들이 자랑스럽다.  그 때 그 님들이 누구였는지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2011년 다시 찾은 하덕주사 5년 사이에 절집도 많이 변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옥개석이 예전에도 있었던가? 옥개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전성기의 석탑 느낌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마의 태자 이전에도 절집이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대불정주비(大佛頂呪碑).1988년 2월초에 한수면 송계리에서 덕주골까지 도로확장공사중 월광사지(月光寺址) 입구인 송계리 답(沓) 147번지 논둑에서 발견되었고 월악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하덕주사(下德周寺) 경내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첫줄에만 한자로 대불정주(大佛頂呪)라 새기고, 다음 줄부터는 범자문(梵字文)으로 새기었는데 모두 11행이다. 각 행의 자수도 고르지 않고 범자로 새긴 부분은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4행까지는 8자, 5~6행은 7자, 7~11행은 12~13자로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글자 수는 모두 105자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월광사(月光寺)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월광사는 원랑선사탑비(圓朗禪師塔碑: 보물 제360호)가 있었던 곳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은 질이 떨어지는 화강암 자연석으로 세로 161cm, 가로 163cm의 방형을 이루는 자연석으로 모두 둥글다. 두께는 상단부는 30~40cm로 불규칙하며, 하단부는 28cm이다. 특히 하단부 바닥면은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여 비의 좌대 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범자문비는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4개가 소개되고 있다. 이는 모두 대불정다라니당(大佛頂多羅尼幢)이라는 동일 제호들로 모두 현재 휴전선 북방에 있다. 광주의 십신사지 범자비(광주시 유형문화재 제3호, 광주민속박물관 앞뜰 소재)가 이름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범자비라고 하였으나 비신 상단부에만 범자의 옴(Om)자를 도안화하고 있을 뿐 비문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엄밀히 보아 범자비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 남한에는 이 송계리의 『大佛頂呪碑』가 사실상 유일한 ꡒ범자문비ꡓ라고 할 수 있다...제천시청

 

산신각

대웅보전

 

 

제천시 한수면 역리 덕상골의 전(傳) 정금사(淨金寺)터라고 전해오던 곳에 위치하였는데, 충주댐 건설로 1983년 4월 현위치로 이전 봉안되었다. 석불은 부분적으로 마손멸 있을 뿐 비교적 완형에 속한다. 특히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으므로 하반신 의문 등이 완연한데 하단부에 약간의 파손이 있다. 약사여래입상이다.

 

 

부분적으로 닳았을 뿐 비교적 완전한 모습에 속한다. 특히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몸통의 밑부분이 약간 파손되었을 뿐 옷주름 등은 상태가 양호하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낮고 작은 머리묶음이 있으며, 얼굴은 길쭉하지만 풍만하다. 양쪽 눈은 가늘고 긴 듯 하나 닳아서 구분하기 어렵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형식적으로 표시하고 가슴 부분이 널찍하게 드러났으며 왼쪽편에 주름이 몰려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손바닥을 밖으로 드러내어 엄지에 새끼 손가락을 구부려 대고 있으며, 왼손은 수평으로 배 아래 부분까지 들어 약그릇을 받들고 있으므로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몸통에 비해 머리가 크며 대좌는 별도로 만들어 양 발만을 윗면에 조각하고 위로 몸통을 얹고 있다.


 

 

남근석으로 불리는 돌 4기와 석조맷돌, 석탑 옥개석 등의 석조물이 흩어져 있다. 이중 남근석은 월악산의 험한 봉우리가 마치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 있는 형상과 같아서 그것과 연관시켜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덕주사가 자리한 월악산月岳山은 소백산과 속리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월악산의 정상을 영봉靈峰이라고 칭하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2곳뿐이다. 옛 사람들은 태양[日]을 양陽이라 하고 달[月]을 음陰이라 했는데, 이것을 사람에 비유하면 양을 남자男子 음을 여자女子라 했다. 월악산은 뒤편 수산리 쪽에서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모습을 닮은 형태라 월악산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월악산이 풍수학적으로 음기陰氣가 왕성한 산이기에 옛 선조들은 월악산의 음의 지기地氣를 누르고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곳에 남근석男根石을 세웠다."

 

예전 답사팀에 동행했던 신혼의 베이브님이 아들 잉태에 효험이 있다고 남근석을 보다듬었었는데  그 이후 소식이 궁금하다.

 

 

 2011.0.12

***제천시청, 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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