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제천시

[스크랩] 제천...벽화의 보고. 신륵사

임병기(선과) 2008. 9. 8.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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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 더위는 월악산 깊은 계곡 신륵사도 예외는 아니다. 아래 주차장에서 불과 몇분의 짧은 거리임에도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린다. 절집 보다는 조용한 산중 암자 같은 신륵사도 최근에는 극락전 벽화로 인해 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잦은 모양이다.

 

천왕문 근처에 이르니 발발이 같은 멍보살이 악다구니를 부린다. 수많은 절집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깡다구 부리는 멍보살은 보지 못했다. 멍보살의 행패를 잠재우시며 선방에서 스님이 나오시어 방문 목적을 말씀드렸더니 천천히 둘러보라고 말씀하시고는 천왕문(?) 그늘에 좌정하시고 계신다.

 

신륵사의 연혁을 밝히고 있는 기록은 거의 없으며, 1960년에 법당인 극락전을 중수하면서 쓴 『월악산신륵사중수기(月岳山神勒寺重修記)』가 극락전에 걸려 있어서 간략하나마 신륵사의 연혁을 밝히고 있다. 이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4년(582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후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 원효대사가 고쳐 지었고, 고려 공민왕 때 무학대사가 다시 고쳐 지었다고 한다. 또 조선 광해군(재위 1608~1623년) 때 사명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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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단(局司壇)

 

우리나라 절집에 흔하지 않은 전각이다. 답사전 어떤 자료에서도 볼 수 없었으며 다만 한국전통사찰정보에는 약사당으로 표기되어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으로 알았다. 국사단은 해인사, 통도사, 표충사에서 본 듯하여 스님에게 예전에 사세가 만만치 않았겠다고 말씀드리자 해인스님은 과거지사는 모르겠고 지금은 모두 소실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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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단은 월악산 산신을 산신각에 모시듯이 신륵사 가람 터 형국(形局)을 주관하는 토지신을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그래서 국사단은 가람을 수호하고 화재 예방 등을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다.  국사신앙은 불교의 정통적인 신앙이 아니라 한국 전래의 토속신앙의 대상이다. 

 

해인스님에 의하면 몽고군이 침입하여 신륵사를 불태우려고 할 때 월악산에서 돌맹이가 포탄처럼 날아와 몽고군이 혼비백산하여 도망 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믿지 않는다고 했다. 왜? 기록에 없는, 자료가 불충분한   사료는 가치를 인정할 수 없으며 신격화는 불교가 지향하는 철학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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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삼층석탑은 기단에 탱주, 우주가 모각되어있으며 상륜부가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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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받침은 4단이고  초층에 비해 윗층으로 가면서 비례가 확연히 줄어들고, 옥개석 낙수면은 전각에서 약간 반전되어 있다. 상륜에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찰주가  남아있다.

 

1981년 4월 해체복원시 기단 내부에서 높이 3.5~5㎝크기의 토탑(土塔) 108개와 사리함(舍利函) 두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사리함은 금동편과 동편이 각각 하나씩으로서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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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은 어,협칸이 3짝 분합문,띠살문 창살이며,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인 건물로 다포계 건물이면서 맞배지붕으로 처리된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팔작지붕이 보통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완주 송광사처럼 기단을 이중으로 측조한 것이다. 이는 처마의 깊이 때문으로 여겨진다.

 

괘불대는 한 짝이 망실된 상태다. 문화재로서 등록이 안된 비지정문화재지만 극락전의 멋은 내외벽의 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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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벙주초에 두리기둥인 극락전에 석탑 옥개석이 주초로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과거 신륵사 탑은 쌍탑 이었거나 다른 전각 앞에도 석탑이 최소 한 기 있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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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륵사 극락전, 석탑보다 더 유명한 문화재는 내외벽 벽화로 답사 매니아, 특히 불교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메카로 여겨질 만큼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그림은 세 마리 물고기 그림으로, 큰 물고기가 중간 크기의 물고기, 중간 크기의 물고기가 그보다 작은 물고기 꼬리를 물고 있는 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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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미가 뭘까? 허균은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부처님 전생 설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이 보살행을 닦을 때 일찍이 바다 속에 거처하면서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를 보았더니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작은 물고기는 그보다 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부처님이 큰 물고기를 잡아 포식하니 작은 물고기가 삶을 얻었다.

 

이 보살의 혼신(魂神)이 화하여 경어(鯨魚)의 왕이 되었는데, 그 키가 몇 리나 되었다. 그 때 해변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끼리 서로를 잡아먹으니 경어가 몸을 해변에 나타내어 그들이 먹게 하여 기근이든 인민을 구제했다 한다."  

 

스님에게 위의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허균 선생은 금어에게 물어 보았냐고 반문하신다. 마음대로 해석하고 유포하는 것도 혹세무민이고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방송이든 신문이든 오마이뉴스에서든 계급장 떼고 맞장 토론을 나누고 싶다고 하신다.

 

학자도 문제지만 이런 시류에 편승하여 사세 확장에 혈안이되고 이벤트성 행사에 열을 올리는 종교인들이 문제이며, 종교가 없어도 편안한 세상이 옳은 세상이다라고 강하게 말씀을 주신다. 그런 문제를 승가대학 학생들에게 강의하시면 좋겠다고 했더니 스님은 학승 시절부터 파쇼 기질이 강해서 경계의 대상이었다고 웃으시며 산골 절집에서 조용히 살겠노라고 하셨다.

 

아울러, 벽화를 그린 금어는 아직 확실한 정황은 없지만 영천 은해사에 주석하셨던 스님으로 생각되며 계속 탐문중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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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가 주석했다는 사실에 착안한 벽화처럼 보인다. 사명대사행일본지도는 사명대사가 정유재란 이후 1604년에 선조임금의 친서를 갖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한 사실을 표현했다.

 

사진술에 애초에 관심없는 놈이 촬영했지만 우측은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포승줄로 묶고 무기를 부셔 불태우는 장면을, 좌측은 일본 대신들이 사명대사일행을 영접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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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왕조조도. 위(魏)나라가 왜(倭)를 정복할때 말을 타고 장검과  쌍검으로 왜를 굴복 시키는 그림이다.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극락전 반대 합각 아래에 그려진 또다른 물고기 그림으로 큰물고기가 새우를 물고 있다.위에 인용한 허균의 저서에는 물고기와 관련된 설화에는 ‘아미타어(阿彌陀魚)’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사자국(師子國) 서남쪽에 한 물고기가 있었는데, 능히 사람의 말을 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기 때문에 ‘아미타어’라고 이름 지었다. 사람이 아미타불을 염송할 때면 이 물고기도 좋아라 하면서 언덕 밑으로 가까이 다가오곤 했다. 사람들이 잡아서 먹으면 맛이 매우 좋았다고 하는데, 이 물고기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물고기 장식이 예천 용문사 대장전(大藏殿)의 기둥머리에 보인다. 대장전 오른쪽 모퉁이 기둥머리에 조각되어 있는 이 조각상은 다른 물고기 장식과는 달리 몸체를 기둥 속에 감춘 채 머리 부분만 밖으로 내민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 물고기 조각이 ‘아미타어’를 상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힌두교나 불교에 권화(權化)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여러 형태로 바꾸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지어 볼 때 대장전의 물고기 조각은 불.보살의 화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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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그림 해석과 관련하여  내소사 대웅보전의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참나를 찾는 과정을 묘사한 상징성이며 나는 그 해석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제발 현실성 있는 이야기를 하라고 언성을 높이신다.

 

사회지도층 인사, 종교인, 국회의원들 처럼 구름 잡는  해석과 사기꾼 같은 말로 국민을 현혹 시키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했다. 종교가 가장 정직해야 하며 그 기본은 사적에 부합되고 상대적으로 인정되는 부분만을 사실로 알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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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로왕보살의 세분이 중생들을 반야용선에 태우고 끌고 하여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그린 반야용선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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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오랜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사진 촬영이 제한되어 내부 촬영은 하지 않았다. 극락전 내외부에는 장엄과 찬탄이 조화된 고색창연한 단청이 황홀하고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외부 벽화는 빛이 바래어 일부 고색땜단청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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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의 극락전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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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의 발길이 잦아 좋지만은 않으시지만 불교 미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개방하고 싶다고 했다. 강진 무위사 벽화 이야기를 말씀드리며 무위사 스님과 성격이 닮았다고 했더니 웃으시며 "법당에서 모자 착용했다고 욕하면 안돼지!!" 라고 너털 웃음을 지으시며 잘 가시라며 발길을 돌리신다.

 

앞의 전각은 산신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신각 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독성과 칠성을 모셔 삼성각으로 조성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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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시간에 너무도 많이 배워 정신이 산만했다.

 

혼자 주석 하시는 스님에게 미리 연락드리고 하루정도 묵으면서 법당 벽화 공부를 찬찬히 다시 해야겠다.

 

그 날에는 머리가 맑아 지려나?

 

2008.08.07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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