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가 넘었지만 남간정사의 문이 닫혀 까치발로 바라보고 왔다. 남간정사는 대전 동구 가양동의 우암사적공원내에 있는 우암 송시열이 숙종 9년에 세운 강학당이다. 우암은 여기서 유림과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하며 말년을 보냈다. 남간정사는 고봉간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에 자리잡고 연못 딸린 정원을 갖추었다. 남간은 주자의 싯구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유래된 말로 볕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을 뜻한다.
송시열
* 자(字) : 英甫(영보)
27세(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29세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나, 약 1년 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중단되었다. 이때 인조가 오랑캐에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송시열은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이후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 봉림대군이 왕(효종)으로 즉위하였다. 효종은 일찍부터 북벌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즉위와 함께 척화파와 재야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송시열 역시 진선·장령 등의 관직으로서 출사하였다. 이때 그는 시무책인 <기유봉사>를 올렸는데, 그 중 특히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산림세력이 북벌기도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함으로서,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계 인물들이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53년(효종4) 이후 목사집의·동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예로 치루었고, 상을 마친 1657년에 찬선이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대신<정유봉사>를 올려 시무책을 제시하였다. 1658년(효종9) 7월 찬선을 제수받았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약 8개월간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 하에 북벌 계획을 주도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듬해 5월 효종이 급서하자 상황은 일변되었다.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김우명 계열과의 갈등과 현종에 대한 실망이 중첩되어 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현종은 융숭한 예우로서 중용하려 했지만, 우의정(1668년)과 좌의정(1673년)으로 조정에 잠시 나아갔을 뿐 주로 재야에 물러가 있었다. 그러나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므로,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도 자문을 우선시 하였다. 그러나 1674년(현종15)의 2차 예송에서는 상황이 일변하였다.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하자, 그는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삭출되었고, 다음해에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지만,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고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가 되었으며, 또 봉조하에 올랐다.
1682년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 하고자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김익훈(김장생의 손자)의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서인계 소장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가 가세하여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후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일 경종)을 원자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송시열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후 신술환국(1694년)으로 무죄가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후 전국적으로 70여개소의 서원이 설립되었고 그 중 사액서원이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26년(숙종42)의 병신처분과 1744년(영조20)의 문묘배향으로 송시열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정조대에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다. 송시열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적통이다. 그러나 더 연원적으로는 조광조를 숭앙하였고, 특히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자로 자부하며 주자의 교의를 받들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의 철학사상은 조광조의 실치주의, 이이의 변통론, 김장생의 예학등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시열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과 학문적 성과는 이후 조선사회의 정치·사회·사상을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되었다.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修己治人(수기치인 : 정치원리), 養民爲主(양민위주 : 정책목표), 禮治主義(예치주의 : 정치이념)로 요약되며 사회사상은 그의 사회 신분관과 양민정책, 그리고 유교적 풍속의 장려 등에서 발견된다.
기존의 양반 지배 체제나 노비제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반의 특권적 성향은 제한되어야 하고, 노비도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송시열의 문장은 한유·구양수의 문체에 정주의 의리를 지조로 하여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그는 모든 형식의 글에 다 능했으나 특히 묘문 등에 명성이 높았는데, 寧陵誌文(영릉지문)은 최고의 명문이다. 서체는 처음은 안진경체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였는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글과 글씨는 힘이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송시열의 저서로는 『주자대전잡억』외 8종이 있고. 문집으로는 1717(숙종43)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편집·간행한 철활자본『우암집』이 있으며, 1787년(정조11) 일문을 수집·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출간한 『송자대전』이 있다.
우암 초상
이 작품은 송시열이 74세때의 초상으로 화면 우측에 '後學安東金昌業寫 副護軍 秦再奚摹'라고 적혀있다. 현재 제천 황강영당에 또 한폭의 74세 초상이 전하고 있는데 복식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얼굴은 거의 동일하므로 두 작품의 선후관계가 좀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해는 경신대출척으로 송시열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올랐던 때이며, 김창업이 초상화를 기초하고 화원이 이를 완성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이 작품이 바로 기록상의 것일 가능성도 있다.
얼굴은 살색으로 칠한 후 중요한 주름만 필선으로 표현하고 그 주위에 옅은 선염으로 음영을 가했다. 이렇게 평상복인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 巾)을 쓴 모습은 재야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선비를 상징하기도 한다. 벽은(僻隱) 진재해秦再奚(?∼1735이전)는 화원으로 숙종의 어진을 주도적으로 작업하였고 산수도 잘 그렸다. 특히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칭송받아 여러 사대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건축 설계자이며 건축답사 전문가인 우리카페 최성호님의 글을 보자.
남간정사는 원래는 송시열의 개인의 정사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후대에 송시열을 배향하기 위하여 남간사를 세우면서 일종의 서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생활하기 위하여 만든 한옥도 아닌 이곳을 소개하는 것은 이곳의 원림園林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손꼽힐 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변이 우암기념공원으로 조성되고 주변에 집이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한적한 원림으로서의 분위기가 나지 않지만 이 곳이 일제시대 도청소재지로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여도 한적하고 수려한 공간을 자랑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주변환경이 제대로 보전되었더라면 담양의 소쇄원 못지 않은 원림으로 각광을 받았을 만한 곳이다.
남간정사는 연못을 조원의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연못을 조원의 중심으로 만든 곳은 여러 곳 있지만 이곳만큼 여러 요소가 어우러진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과 돌과 그리고 폭포와 수목까지 잘 어우러진 곳은 이곳 말고는 찾기가 힘들다. 원림 전체가 잘 어우러진 곳이 소쇄원이라면 연못이라는 주제로 잘 어우러진 곳은 이곳 남간정사일 것이다. 연못으로 들어오는 물은 두 곳에서 공급된다. 하나는 계곡에서 물길의 일부를 틀어 끌어들이고 하나는 남간정사 뒤에 있는 샘물에서 남간정사 누마루 하부를 통해 들어온다.
이러한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남간정사는 우리 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게 된다. 집이 물을 가로질러 세워져있다. 원래 수맥이 있는 곳에는 집을 짓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곳에서 그러한 원칙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가 가능한 것은 기골이 장대한 송시열선생이 수맥을 이길 만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분이어서 이러한 발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상식을 벗어난 배치로 집을 보는 흥취를 돋우는 곳이다.
그러나 남간정사에서 바라보는 집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전면 사칸 측면 2칸의 가운데 2칸은 대청으로 되어있는 집의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남간정사라는 집의 가치는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나 집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간정사의 풍광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정사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개념이 잘 살아있는 건물의 대표적인 예가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바라다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관은 자연을 정원으로 삼는 호연지기를 깊게 느끼게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집은 바라다보는 집이 아닌 주인의 입장에서 집을 짓는다.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모든 경관은 주인이 즐기기 위한 것이다. 서양의 집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개념에서 설계된다면 우리의 집은 주인의 관점에서 집을 만든다. 즉 주인이 즐기기 위한 집을 만드는 것이다. 정원도 마찬가지이다. 주인의 입장에서 바라다보는 것이 계획의 중요한 요점이다.
그러므로 한옥을 찾아가거나 한국의 정원을 찾아가 감상할 때 제일 주의하여야 할 것은 주인의 입장이 되라는 것이다. 주인의 입장에서 돌아보아야만 제대로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집 자리를 잡을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좌향이다. 좌향은 집이 앉혀져서 어떠한 안대를 바라볼 것인가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곧 집주인이 바라보아야 할 방향을 정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집에 사는 주인이 좋은 기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기국정
경관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경관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집을 짓고 주인의 위치에서 가장 좋은 경관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조경의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은 이곳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대청에서 바라보면 기국정 옆에 있는 바위들과 폭포 그리고 방장산方丈山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경의 핵심요소들이 모두 한곳에서 살필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남간정사 대청에 앉아보는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면서도 잔잔한 흥취를 돋구고 있다. 대청에 앉아 좋은 술을 한잔 걸치고 나면 절로 시 한 수를 읊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못과 연못 안에 있는 방장산, 방장산에 심어져 있는 오래된 버드나무와 그리고 기암괴석 그리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자그마한 폭포의 낙수소리 이러한 모든 정원의 요소들이 어울려 남간정사를 만들고 있다.
남간정사의 좌측에는 누마루가 놓여있다. 더 높은 곳에서 경관을 감상하라는 배려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기국정杞菊亭과 새로 지은 집들에 가려 제 맛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기국정은 예전 소재동 고택 옆에 방죽을 쌓고 세웠던 별당건물이었다. 일제시대 때 도시계획으로 헐려가게 되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송씨 집안에서는 이 건물을 옮길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누마루에서 보는 경관을 가로막고있는 기국정이 사라지면 남간정사의 원래 맛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간정사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벚꽃이 피는 봄이라고 한다. 하얀 벚꽃과 꽃 그늘이 진 연못 그리고 신록이 가득한 나무들이 어우러지는 남간정사의 풍광은 마치 선경에 온 듯할 것이다. 초여름에 찾은 남간정사도 아름다웠다. 푸르름이 깊어진 나무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숨겨있는 남간정사의 모습은 수줍은 처녀를 보는 듯하였다. 이처럼 남간정사는 사시사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남간정사를 찾을 때마다 역사의 보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현재의 남간정사 주변을 우암공원이라고 만들어놓았지만 사실 오히려 더 어수선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 남간정사 담밖에 인공으로 조성한 하천도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흘렀던 하천이고 연못 바로 앞쪽에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송씨 집안에서는 현재 외삼문 앞에 복개한 부분을 제거해달라고 요청 중이라고 한다.
현재 남간정사을 둘러싸고 있는 담도 원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담도 최근 다시 쌓아 높게 만들어 남간정사에서 내다보는 시야를 가리고 있다. 또한 이 주변의 개발로 높은 집들이 들어서 남간정사의 경관을 막고 있다. 이러한 집들이 없다면 앞은 시원하게 트여 멀리 계룡산까지 바라다 보여 마음까지도 맑게 하였을 것이다. 최근의 무분별한 개발이 남간정사를 만든 송시열선생이 의도하였던 경관들을 다 가리고 있다. 주변 경관이 자연스럽게 살아있던 옛 모습을 떠올리면서 보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만드는 곳이 바로 남간정사이다.
우암사적공원의 범례판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처음 찾는 사람에게는 아주 당혹 서럽게도 아무리 보아도 답사하려는 남간정사와 기국정 표시 번호는 없었다. 그냥 사전에 인지한 자료로 판단하여야 했다.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여 조성한 우암사적공원 얼굴에 먹칠은 물론이고 전체 유적지 조성의 진실성과 역사성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2011.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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