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양주시

양주...회암사지(2)

임병기(선과) 2011. 2. 18.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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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를 나와 산길로 잠시 올라가면 화암사가 있다. 회암사가 불만 후 절터에 남아있던 부도마져 훼손되어 유물을 보존하기위헤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절 왼편 산자락에는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와 부도비가 남아 옛영화를 품고 있다.

 

무학대사 부도비 좌측 중건비, 우측 초건비에는 비신이 없다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이 조성된 석단의 아래쪽 정면에는 재건된 무학대사의 부도비가 있는데, 부도와 석등이 매우 화려하고 공력을 들인 반면에 부도비는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이 없어 단조롭고 소박한 편이다. 이곳은 북쪽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끝나는 언덕배기의 가파른 비탈로, 이응준이 순조 21년(1821)에 깨뜨렸다는 지공선사와 무학대사의 초건비 파편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초건비는 태종 10년 (1410)에 제작되었고, 중건비는 순조 28년(1828)에 만들어졌다.

초건비의 규모는 지붕이 가로 106cm, 세로 40cm, 높이 42cm, 4각받침이 가로 180cm, 세로87.5cm, 높이 57cm,비좌는 가로 144cm, 세로 54cm, 높이 23cm 비가좌공은 가로 109cm, 세로 26cm이다.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초건비의 4각받침은 3단으로 만들어졌으며, 비좌는 높은 편이다. 비좌의 옆면은 세로로 도들줄을 새겨 세 부분으로 나누었으며, 그 안에는 간단한 안상을 조각하였다. 비좌의 받침은 돌아가며 겹연꽃무늬로 덮였고 복련을 배치하였다. 꽃잎은 길며 가운데 하나의 도들줄이 세로로 새겨져 있어 특징적이다.

 

비신을 꽂았던 비공은 지름 109cm, 깊이 26cm로 중건비의 비공이 지름 89.5cm,깊이 28.5cm임을 볼 때 초건비의 비신이 중건비보다 폭은 더 넓었고 두께는 얇았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가로로 긴 연잎, 즉 하엽이 내려 덮인 형태로 조선시대 비의 형식에 있어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도드라진 연잎의 맥이 사실적으로 나 있으며, 지붕마루는 도드라진 용의 몸통으로 표현하였으나 마모가 심하여 불확실하다. 또한 지붕의 추녀 위에는 꼬리가 긴 꽃구름, 즉 운화문이 새겨져 있어 특징적이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하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건비의 규모는 총 높이가 340cm, 비신은 높이 223cm, 폭 89.5cm, 4각받침은 가로 147cm, 세로 90cm, 높이 65cm, 지대석은 가로 224cm, 세로 133cm, 높이 17cm이다. 중건비는 낮은 지대석 위에 모죽임을 한 높직한 4각받침을 놓고, 흑청석제의 비신을 세웠으며 날렵한 팔작지붕이 그 위에 놓여 있다.

 

비신에 비해 받침이 크고 지붕은 낮고 작은 편이라 조화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지붕의 처마와 추녀는 한껏 들려 있고 처마 안쪽에는 낮게 나타낸 겹처마와 겹사래 등이 보인다. 비신이 들어가는 가장자리쪽은 굴도리와 첨서가 모각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무학대사 부도탑. 쌍사자 석등

 

 

무학대사의 흉용탑 앞에 높인 석등으로 무학대사비에 의하면 무학왕사가 입적하기 8년 전인 태조 6년(1397)에 흉용탑과 함께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 회암사동쪽 능선의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있다..

상하대와 화사석 지붕돌 등이 모두 방형이고, 중대석만 쌍사자형인 독특한 모습이어서 주목된다. 이는 신라시대 8각석등이 고려시대로 내려와 방형으로 바뀌는 특별한 조형이고, 조선시대까지 줄곧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양식이다. 상하 평면은 방형이고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데 붙여서 만들었는데 하대석에는 각 우각과 그 중간에 여의두문같이 퇴화된 복련이 조각되고 위에는 받침 1단이 있다.

이 위의 간석은 쌍사자로 대신하여 신라 시대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앞다리의 표현도 짧아서 빈약해 보인다. 상대석에는 하대석과 같이 8엽 앙련이 조각되었다. 화사부에는 2개의 석재를 좌우에 간격을 두고 놓아서 그 간격으로 생긴 전후 공간이 화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네 모서리에는 이례적으로 원형의 우주를 표시하였다. 옥개석은 두껍고 처마밑이 반원을 그리면서 들렸고, 낙수면의 우동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연경에 가서 지공에게 법을 구한 뒤 회암사에서 머물렀다고 하는 무학의 묘탑으로서 신라시대 부도 양식을 계승한 대표적인 조선시대 부도이다. 부도를 가운데에 안치하고 그 둘레를 난간으로 장식하였는데, 난간은 8개의 장대석을 2단으로 넓고 높직하게 쌓은 후 각 모서리마다 꼭대기를 보주모양으로 장식한 돌기둥을 세운 형식이다. 그리고 그 돌기둥 사이마다 넓은 장대석을 1매씩 끼워 넣고 위로 도란대를 괴어 놓았다.

이 난간은 석단 중앙의 묘탑을 보호하는 장치로 일종의 장엄으로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높이가 매우 높고 가운데에 도들띠가 돌려졌으며, 그 위쪽으로 연꽃무늬가 덮이고 귀꽃이 솟아 있다. 배가 약간 부른 8각의 고복형 중대석의 각 면에는 내부에 네 모서리가 안쪽으로 접힌 네모꼴을 조각하여 전체 면적을 구획하고, 그 안상 가운데는 각기 모양이 다른 꽃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앙련받침과 8각받침으로 이루어진 상대석은 아랫부분에 3단의 각형받침이 조출되어 있고 16엽의 앙련이 새겨져 있다.

앙련의 형태와 연꽃잎 내의 장식문양은 하대석의 복련문과 같으나 귀꽃이 없다. 앙련의 8각받침은 각 측면에 네모꼴의 구획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각기 당초문을 양각하였다. 그러나 굵은 선으로 조각이 되어 섬세하고 유려한 면은 감소되었다. 탑신굄이 없어 윗면이 평평하게 처리된 상대석 위의 탑신은 원형으로 표면에는 운룡문이 가득히 조각되어 있다. 특히 용의 머리와 몸체,비늘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생동감이 있으며, 구름무늬 또한 뒤엉킨 몸체 사이에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어 운동감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추녀는 평박한 편으로 모서리가 약간 치켜올라가고 전각은 약간의 반전이 있어 둔중함이 다소 감소되었다.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는 낙수면에는 8조의 우동이 굵게 내려와 전각에 이르는데, 하단부에 이르러서는 각 우동마다 용머리가 하나씩 양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옥개석 꼭대기에 구멍을 뚫고서 보주만을 설치한 간소화된 형식으로 아래부분에는 2단의 원받침을 구비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부도는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공선사 부도탑,비


부도비. 부도가 만들어지고 2년 후인 1374년에 세워졌다. 지대석위로 4각의 높은 굄대를 놓고 비신을 세운 다음 목조건축 모양의 지붕들을 얹었다. 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비좌만 남아있다. 옆에는 중건비가 서있다.

 

석등

 

방형의 대석 위에 화창을 만들고 그 위로 4각 지붕돌을 얹었다. 전체적으로 부도와 마찬가지로 조각이나 별다른 장식이 없다. 지붕은 밑이 넓고 높이가 낮으며, 처마와 지붕이 들리지 않았고 처마면도 굽어 있지 않아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다. 지붕면과 내림마루 역시 직선이어서 지붕이 둔탁하다. 지붕마루는 낮고 끝은 5각형으로 처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은 4각형이 기본으로,크고 높은 중대석 아래에 모죽임을 한 받침을 두었다. 상대의 폭에 비해 화사부분이 큰 편이며, 화사는 나옹선사 부도의 석등과 마찬가지로 2장의 면석을 수평으로 배치하여 조성하였다. 화창의 안쪽과 바깥쪽 모서리 모두 모죽임을 하였다.

 

부도

 

전체적으로 받침부와 탑신, 지붕의 비례가 적당해 비교적 안정감이 있지만 지붕의 처마면이 넓어서 다소 둔해 보이며, 탑신은 작은 편이다.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탑신과 상륜은 원형으로 이루어졌다. 상륜하부의 복발로 여겨지는 것은 8각형의 주사위모양이어서 주목을 끈다. 탑의 외부는 상륜부를 빼고는 아무런 무늬장식도 없다.

 

 하대는 4각형에서 모서리 네 곳을 잘라내는 수법을 써서 8각형이 되었고, 중대는 8각의 고복형이다. 상대는 낮고 위가 막힌 8각함지형이며, 그 위에 탑신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상하를 자른 고복형으로 된 원형이나 어렴풋이 8각의 면이 있는 듯하다. 총 높이 304cm,상대~하대 높이 118cm,탑신 높이 66cm,지붕 높이 60cm,상륜 높이 66cm이다

 

나옹선사 부도. 석등

 

 나옹왕사의 부도와 비(선각왕사비)는 골짜기를 두고 떨어져 있다. 부도가 놓일 자리가 협소하여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크게 설득력은 없다. 부도는 1376년 9월 16일에 세워졌으며, 부도 앞에는 네모난 석상이 놓여 있고, 그 앞쪽에 석등을 놓아 남북 일직선상의 배치형태를 보이고 있다.

 

 

출처/cafe.daum.net/happyhouse459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워졌으며, 나옹선사 부도와 관련된 부도비이다. 보통은 부도와 부도비가 같이 있는 것이 통례이나 회암사 삼성각 왼쪽 산등성이 북쪽 50m 지점에 남향으로 따로 세워져 있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폐산된 후 버려진 것을 후대에 보수해 이곳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1997년 일어난 산불로 인해 크게 손상되어 비신은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중이고 거북받침은 표면이 박리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용은 긴 쌍뿔이 돋았는데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비신의 네 모서리를 물고 있는 듯하다. 각각 쌍을 이룬 앞뒷면의 용들이 앞발로 가운데 여의주를 받들고, 몸체는 윗부분에서 서로 휘감아 자연스럽게 비의 머리를 원형으로 만들고 있다. 이 비의 글씨는 예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가 예서로 새겨진 이후, 고려말에 이르러 처음이다. 이 당시는 중국에도 원,명을 통하여 예서가 쓰이지 않을 때였기에 당시 우리나라의 예서 연구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이 비문은 상당히 높은 예서 연구수준을 보여준다. “동국금석평”에서 “나옹비는 팔분서인데 태정하나 신채가 없다.”고 평하였으나 결구도 임정하고 필력도 주경하며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중국의 "희평석경"을 방불케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출처/cafe.daum.net/happyhouse459


하지만 넘어져 두동강이 난 비신을 붙인 흔적이 크게 있고 회백색의 대리석 재질과, 오랜 풍화 및 화재의 영향으로 비문의 마모가 심해 그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다. 입자가 굵고 무른 화강암으로 된 거북받침은 조각상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고 괴량감이 강하다. 몸집은 투박하고, 발은 뭉툭하며 굵고 목은 짧다. 귀는 곰의 귀처럼 짧고 작으며 입은 굳게 다물고 있는데,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정연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화기로 인해 겉면이 모두 박리되어 버렸고, 지금도 심각하게 부식이 진행되고 있다.

 

 

석등은 4각을 기본형으로, 3단의 받침 위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화사석은 앞 ·뒷면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처마는 느린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로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있다.

 

 

8각을 기본형으로,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3단을 이루는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은 배가 불룩한 북모양을 하고 있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조각없이 간결하다.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갔다. 지붕돌 위로는 하나의 돌로 조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회암사 조사전

서천국 제납박타존자 지공대화상(西天國提納薄陀尊者指空大和尙)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이다. 가섭(迦葉)으로부터 108세라고 한다. 인도의 동북지방 갠지즈강 유역에 위치했던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왕자로 태어나 8세 때 중동부 인도에 위치한 나란다사 율현(律賢)에서 출가하였다. 19세때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의 보명(普明)에게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왔다.

 

고려에서는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머물렀으며 이때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기록이나 조선전기의 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오랜 기간이 아니지만 고려 불교계에서의 그의 족적은 상당하다. 그는 1326년 3월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였고, 금강산에서 법기보살도량(法紀菩薩道場)을 개최하였는데 이는 원 황실을 위한 불교의식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을 유력한 뒤 개경 동쪽의 숭수사(崇壽寺)에 주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계를 주었다. 1327년 10월에는 경원(慶原)을 저쳐 화산(華山)을 다녀 왔고, 이듬해 2월 통도사를 유력하였으며, 7월에는 연복정(演福亭)에서 계율을 설법했다.

 

이밖에 영산현(靈山縣)ㆍ장단현(長湍縣) 등 여러 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옹에게 천축(天竺)의 나란다사와 그 지세가 같다고 말하여 회암사의 중창동기를 제시하고 있음은 회암사도 그가 유력한 곳임을 의미한다. 회암사는 그가 고려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던 사원이었고, 대표적 계승자인 나옹이 중창하고 그의 석비와 부도를 세웠다. 이곳은 조선전기에 가장 큰 사원으로 그의 법통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화장사에는 그의 소상(塑像)뿐 아니라 유물이 밀집되었고, 묘향산의 안심사에도 그의 부도가 있다. 회암사에 남북으로 반대방향으로 임진강과 한강의 중부지역에 각각 자리잡은 화장사와 신륵사는 그의 기념사원이거나 문도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원나라에 돌아가서는 대부대감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의 부인인 고려인 김씨가 세운 법원사에 머물렀다가 귀화방장(歸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1367년 보암장노(普菴長老)에 의해 그의 입적이 고려에 알려졌고, 1370년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유골을 받들고 고려에 오자 왕이 직접 지공의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327년(공민왕 21) 왕명으로 회암사에 사리탑을 세웠는데, 이색이 지은「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이『목은집』에 전한다.

 

나옹ㆍ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ㆍ무학 자초(無學 自初)ㆍ대지국사 지천(大智國師 智泉)등이 대표적인 그의 문도이다. 나옹은 왕사(王師)로 책종되었고, 나옹의 문도인 환암 혼수와 무학 자초는 조선개국을 전후하여 가장 영향력있는  고승이었다.

 

고려국 공민왕사 나옹대화상(高麗國恭愍王師懶翁大和尙) (1320-1376)

 

영해 출신으로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이며,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1340년(충혜왕 1)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了然)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또 1344년에는 수도하며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이곳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려 석옹(石翁)에게 이를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에는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 1350년(충정왕 2) 평강의 휴휴암ㆍ자선사를 유력하였고, 이듬해 명주 모타낙가산에서의 관음보살 친견, 육왕사에서의 석가모니 예배, 승려 무상(無相)ㆍ고목영(枯木榮)과의 법론 토론, 1352년 복룡산의 천암장(千巖長) 방문 등 수도에 정진하였다. 원의 순제(順帝)에 의해 연경 광제선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개당(開堂)법회를 열고 금란가사를 하사받았으나 주지의 소임을 내놓고 다시 지공을 찾아 보고 1358년(공민왕 8)에 귀국하였다.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을 역임하고 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을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1371년에는 왕에게 금란가사ㆍ내외법복ㆍ바리 등을 하사받고'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졌다. 이후 잠시 송광사에 머물다가 다시 회암사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고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왕명에 따라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철저한 불이(不二)사상의 토대에서 선(禪)을 이해했고,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기본으로 임제종의 선풍을 도입하여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해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국 태조왕사 무학대화상(朝鮮國太祖王師無學大和尙) (1327-1405)

 

삼기(三岐:합천군 삼가면)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5) 소지(小止)에게 출가하였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며 부도암에 머물다가 1346년(충목왕 2)『능엄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진주 길상사ㆍ묘향산 금강굴 등을 유력하고, 1353년(공민왕 2) 연경으로 가서 지공에게 배웠으며, 이듬해 법천사에서 나옹을 처음 만난 후 무령 오대산ㆍ서산 영암사 등으로 나옹을 찾아가 수도하였다. 1356년 귀국하였으나, 나옹 또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무르자 1359년(공민왕 8) 다시 찾아가 나옹이 전하는 불자(佛子)를 받았고, 1371년(공민왕 20)에는 송광사에서 나옹에게 의발(衣鉢)을 받기도 하였다. 1376년(우왕 2) 회암사의 중창이 끝난 후 나옹이 그를 수좌로 삼으려고 하자 사양하였고, 나옹이 입적하자 명산을 유력하며 자취를 감추고 왕사로 삼고자 하는 공양왕의 뜻을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사에 책봉되었고,'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拂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태조의 명에 따라 회암사에 머물렀다. 1393년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는 수탑(壽塔)을 세우고, 이듬해 용문사로 들어갔다가 1402년(태종 2) 다시 회암사에 잠시 머물다가 금강산 진불암을 거쳐 1405년 금강암에 거처하다가 입적하였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거나, 한양 천도와 관련한 풍수설화 등에서 조선 태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 건국 직후에는 태조에게 유교와 불교의 작용이 다르지 않음과 백성의 어버이로서의 태도를 설법하기도 하였다.

 

 

풍수의 문외한에게는 회암사지 부도전 보다 오히려 새로히 조성한 이곳이 더 풍광이 좋아 보인다. 참 사연도 많은 절집 회암사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무학대사도 바라보았을  북한산이 아련하고 나농화상의 선시가 메아리가 되어 천보산을 감싸고 있는 듯 하다.

2010.11.13

양주시청.문화재청.회암사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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