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일주일에도 몇번씩 왕래하였던 그 길. 길도 풍광도 너무 낯설다. 이런 현상을 데자뷰의 반대 개념으로 뷰자데라고 했던가? 의정부 덕정 동두천 푸른 제복을 입고 3년 청춘을 보낸 그길을 벗어나 도착한 회암사지는 상상 이상의 규모와 사세를 상징하듯 석축을 비롯 석재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키고 있었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공은 1328년 고려에 왔으며 약 2년7개월간을 머물며 회암사도 답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공의 문도인 나옹(懶翁)은 스승으로부터 "산과 양수의 사이를 가려 살면 불법이 흥왕해질 것이다"라는 수기를 받고 이에 근거하여 1374년(공민왕23)부터 2년간 회암사를 중창하였다.
당시 중창의 규모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 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262칸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가람은 동방제일이며, 법당에는 10척의 관음상을 비롯하여 높이 15척의 부처7구가 있었으며, 3,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질서와 위계를 보듯 정연하게 쌓은 석축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다.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천보산에 위치한 회암사는 우리 불교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유교 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시대에 왕실의 적극적 후원을 입은 최대의 사찰이기도 했던 이곳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관계 속에서 계속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의 왕위등극에 대한 예언, 한양으로의 정도(定都) 등 조선건국에 적극 관여했으며, 이성계의 스승이기도 했다. 무학이 거처하는 회암사를 태조가 빈번하게 방문하였고 왕위를 양위한 이후에는 아예 이곳에서 거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회암사지는 1997년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1999년 2차 조사부터는 기전문화재연구원과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실시 중이다. 조사를 통해 드러난 전체 모습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수조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262칸의 규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발굴조사 결과 폐사의 원인이 화재임은 확인되었지만, 언제인지 그리고 동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명종실록에"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한다"(명종21년 1566)와 선조실록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는 기사(1595)내용으로 보아 1566년 1595년 사이에 폐사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생들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될 뿐이라고 한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며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재정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불사(佛事)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도록 하였다. 또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세종조에 들어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회암사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종 6년(1424)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절에 승니(僧尼)가 250명이 있었고 규모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의하면 성종 3년(1472) 세조 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하성부원군 정현조(河城府院君 鄭顯祖)에게 명하여 절을 중창(重創)하였는데 승려 처안(處安)으로 하여금 공역(工役)을 담당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절터에 남아 있는 석단(石壇)과 석벽(石壁),기단계석(基壇階石)들은 이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는 제3단지로부터 노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계단을 올라서자 바로 3칸X2칸의 문터의 토석과 이를 좌우로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추정 남회랑터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또 중앙에는 역시 남북으로 뻗은 천랑이 있고 그 서편에 종루터와 동편에는 향적전터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다시 제3단에도 앞에는 문터가 있고 천랑 좌우에는 큰 건물터가 남아 있다.
전망대 반대편 터의 화강암 맷돌. 주둥이가 길어 타원형에 가까워서 주둥이가 짧았던 조선시대 맷돌과는 차이가 있다. 아래쪽을 고정시키기 위한 매함지와 맷돌을 함께 만들고, 맷돌을 돌리는 맷손을 중심부에 박아 놓은 모습 또한 특이하다. 맷돌의 정확한 제작년대는 알 수 없으나,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괘불대. 밑변이 넓고 올라갈수록 좁아진 사다리꼴이다. 모서리는 모죽임을 하였고 양쪽으로 관통된 둥근 간공이 위 아래에 있다. 지주는 각 면에 아무런 장식없이 정연한 치석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상단부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게 처리하였고, 끝부분은 평평하게 수평으로 다듬어져 있다.
석축 소맷돌
당간을 가운데 세울 때 필요한 간공이나 간구가 내측면의 중앙부 및 정상부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서리 처리는 내측면의 양쪽만 모죽임을 하였다. 당간좌는 보이지 않는다.
회암사지 부도. 조선초기의 부도탑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이다. 회암사지의 건물지가 끝나는 여덟째 단의 북동쪽에 있는 8각형 부도로 국내 현존하는 부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여겨진다. 이 부도는 특히 기단부분이 발달하여 8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중대갑석, 상중대, 상대의 차례로 괴어져 있으며, 탑신받침도 3단으로 다른 부도에 비해서 많고 높다. 우선 8개의 널돌로 8각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돌로 8각 하대석을 만들고 하대에는 면마다 용마무늬를 새겼다
하대석 천마 중대석 넝굴문
우선 8개의 널돌로 8각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돌로 8각 하대석을 만들고 하대에는 면마다 용마무늬를 새겼다
하대석 용문 팔부신상
3층으로 된 탑신받침 위에는 둥근 모양의 탑신이 올려져 있고, 거기에 경사가 가파른 옥개석이 덮였는데, 현재 왼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상륜부는 연꽃무늬의 복발, 2개의 보륜, 8각의 보개, 보주로 이루어졌다.
부도탑의 주인공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중종(1506∼1544, 재위)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독신< 篤信 >을 받아 회암사를 번창시키다 왕후가 별세한 후 제주도로 유배되어 목사 변협에게 피살된 보우스님 부도탑이라는 설과 1472년 회암사 중창 때 사찰을 일신한 처안의 공적을 기린 부도탑으로 보는 의견이 있으나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고 한다.
靑山兮要我 -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懶翁禪師)
2010.11.13 양주시청.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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