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양주시

양주...회암사지(1)

임병기(선과) 2011. 2. 17.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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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일주일에도 몇번씩 왕래하였던 그 길. 길도 풍광도 너무 낯설다. 이런 현상을 데자뷰의 반대 개념으로 뷰자데라고 했던가? 의정부 덕정 동두천 푸른 제복을 입고 3년 청춘을 보낸 그길을 벗어나 도착한 회암사지는 상상 이상의 규모와 사세를 상징하듯 석축을 비롯 석재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키고 있었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공은 1328년 고려에 왔으며 약 2년7개월간을 머물며 회암사도 답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공의 문도인 나옹(懶翁)은 스승으로부터 "산과 양수의 사이를 가려 살면 불법이 흥왕해질 것이다"라는 수기를 받고 이에 근거하여 1374년(공민왕23)부터 2년간 회암사를 중창하였다.

 

당시 중창의 규모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 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262칸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가람은 동방제일이며, 법당에는 10척의 관음상을 비롯하여 높이 15척의 부처7구가 있었으며, 3,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질서와 위계를 보듯 정연하게 쌓은 석축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다.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천보산에 위치한 회암사는 우리 불교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유교 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시대에 왕실의 적극적 후원을 입은 최대의 사찰이기도 했던 이곳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관계 속에서 계속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의 왕위등극에 대한 예언, 한양으로의 정도(定都) 등 조선건국에 적극 관여했으며, 이성계의 스승이기도 했다.  무학이 거처하는 회암사를 태조가 빈번하게 방문하였고 왕위를 양위한 이후에는 아예 이곳에서 거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세종대에는 효령대군을 위한 불사가 진행되었고, 성종 대에는 정희대비에 의한 중창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연산군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회암사는 명맥을 이어갔으며, 명종 대에 이르어 다시 부흥기를 맞게 된다.  당시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보우는 회암사를 불교 부흥의 거점으로 삼아 명종 20년(1565)에 화려한 무차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무차대회중 갑작스런 문정왕후의 사망으로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회암사 역시 그와 함께 퇴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회암사지는 1997년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1999년 2차 조사부터는 기전문화재연구원과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실시 중이다.  조사를 통해 드러난 전체 모습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수조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262칸의 규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발굴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유구는 회암사의 규모와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청정뒷편의 화계 花階라든가, 중심전각을 향해 들어가는 계단의 형식을 왕궁에서 보이는 건축 양식으로 파악하는 의견도 있어 주목된다.  이 외에도 비록 완형은 아니지만 불상편, 도자기편, 명문이 새겨진 기와나 금속유물등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고려 말부터 조선전기의 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로는 청동금탁(보광전 추녀 모서리에 걸려있던 풍경), 「천」명 백자편, 잡상(지붕의 내림마루의 장식)분청사기향완(분청사기로 된 향로)등이 있으며,  발굴된 유물들은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고 한다.  불상은 머리가 모두 잘려나갔으며, 백자등도 거의 깨진 채 발견되었다.  의도적으로 파손한 흔적이 많다고 했다.

 

그 동안 발굴조사 결과 폐사의 원인이 화재임은 확인되었지만, 언제인지 그리고 동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명종실록에"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한다"(명종21년 1566)와 선조실록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는 기사(1595)내용으로 보아 1566년 1595년 사이에 폐사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생들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될 뿐이라고 한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며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재정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불사(佛事)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도록 하였다. 또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세종조에 들어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회암사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종 6년(1424)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절에 승니(僧尼)가 250명이 있었고 규모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의하면 성종 3년(1472) 세조 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하성부원군 정현조(河城府院君 鄭顯祖)에게 명하여 절을 중창(重創)하였는데 승려 처안(處安)으로 하여금 공역(工役)을 담당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절터에 남아 있는 석단(石壇)과 석벽(石壁),기단계석(基壇階石)들은 이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명종 때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은 보우(普雨)는 이곳을 중심으로 불교중흥책을 펴 회암사는 전국제일의 수선도장(修禪道場)이 되었다. 그러나 왕후가 죽고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명종(明宗) 20년(1565) 보우가 잡혀가고 절은 불태워졌다. 이후 순조(純祖) 21년(1821)에 경기지방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 세 선사의 부도(浮屠)와 비(碑)를 중수하고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 하여 절이름을 계승하였다. 이 사찰은 가람배치에 있어 평지가 아닌 산간에 있는 절이면서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남회랑(南回廊)을 둔 것은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배치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대체로 남북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되게 주요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남측에서부터 3칸의 계단을 오르면서 제 1단지에서 좌우로 당간지주가 놓이고,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제2단지인데 여기에는 중앙에 천랑만이 남아 있고 좌우 평탄한 공지로 남아 있다.

 

건물터는 제3단지로부터 노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계단을 올라서자 바로 3칸X2칸의 문터의 토석과 이를 좌우로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추정 남회랑터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또 중앙에는 역시 남북으로 뻗은 천랑이 있고 그 서편에 종루터와 동편에는 향적전터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다시 제3단에도 앞에는 문터가 있고 천랑 좌우에는 큰 건물터가 남아 있다.

제5단지에는 천랑 서편에 서승당(西僧堂)터와 동쪽에는 4단지와 같이 걸쳐놓은 동객실(東客室)터가 있다. 제6단지에는 천랑을 따라 올라가면 이 사찰의 가장 중심건물인 보광전(寶光殿)터가 잘 남아 있는데 정면이 7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위로 제7단지에는 설법전(設法殿)과 사리전(舍利殿)이 있었고, 제8단 좌우에는 대장전(大藏殿)과 나한전(羅漢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망대 반대편 터의 화강암 맷돌. 주둥이가 길어 타원형에 가까워서 주둥이가 짧았던 조선시대 맷돌과는 차이가 있다. 아래쪽을 고정시키기 위한 매함지와 맷돌을 함께 만들고, 맷돌을 돌리는 맷손을 중심부에 박아 놓은 모습 또한 특이하다. 맷돌의 정확한 제작년대는 알 수 없으나,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괘불대. 밑변이 넓고 올라갈수록 좁아진 사다리꼴이다. 모서리는 모죽임을 하였고 양쪽으로 관통된 둥근 간공이 위 아래에 있다. 지주는 각 면에 아무런 장식없이 정연한 치석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상단부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게 처리하였고, 끝부분은 평평하게 수평으로 다듬어져 있다.

 

석축 소맷돌

 

회암사지의 첫 번째 석축 모서리의 동쪽에 한 쌍, 서쪽에 외짝 당간지주가 나란히 서 있다. 모두 넘어져 묻혀 있던 것을 1981년 9월 복원하였는데 정확한 원래의 위치는 아닌듯 하다. 끝부분은 사분원을 그리지 않고 수평으로 처리되었으며, 외측면도 볼록하지 않고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다.

 

 

당간을 가운데 세울 때 필요한 간공이나 간구가 내측면의 중앙부 및 정상부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서리 처리는 내측면의 양쪽만 모죽임을 하였다. 당간좌는 보이지 않는다.

 

회암사지 부도. 조선초기의 부도탑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이다. 회암사지의 건물지가 끝나는 여덟째 단의 북동쪽에 있는 8각형 부도로 국내 현존하는 부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여겨진다. 이 부도는 특히 기단부분이 발달하여 8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중대갑석, 상중대, 상대의 차례로 괴어져 있으며, 탑신받침도 3단으로 다른 부도에 비해서 많고 높다. 우선 8개의 널돌로 8각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돌로 8각 하대석을 만들고 하대에는 면마다 용마무늬를 새겼다

하대석 천마 중대석 넝굴문

 

우선 8개의 널돌로 8각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돌로 8각 하대석을 만들고 하대에는 면마다 용마무늬를 새겼다

 

하대석 용문

팔부신상

 

 

3층으로 된 탑신받침 위에는 둥근 모양의 탑신이 올려져 있고, 거기에 경사가 가파른 옥개석이 덮였는데, 현재 왼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상륜부는 연꽃무늬의 복발, 2개의 보륜, 8각의 보개, 보주로 이루어졌다.

 

 

부도탑의 주인공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중종(1506∼1544, 재위)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독신< 篤信 >을 받아 회암사를 번창시키다 왕후가 별세한 후 제주도로 유배되어 목사 변협에게 피살된 보우스님 부도탑이라는 설과 1472년 회암사 중창 때 사찰을 일신한 처안의 공적을 기린 부도탑으로 보는 의견이 있으나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고 한다.

 

 

靑山兮要我 -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懶翁禪師)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2010.11.13

양주시청.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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