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삼척시

삼척...두타산 천은사

임병기(선과) 2010. 10. 22.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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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아랫마을서 부터 느릿느릿 뚜벅이로 걷고 싶었다. 그런 길이 길게 이어져 일주문이 낯설다.내고향 출신 동안 이승휴 제왕운기의 산실, 목조아미타 삼존불 단지 그 때문에 찾아왔지만 쉬 잊혀질 절집은 아닐 듯 했다. 10월이면 동안 선생의  다례제가 봉안 된다고 한다. 그때이면 단풍도 절정이겠지. 

 

 

이승휴 유허지의 사당 동안사, 연지로 내려가는 산길

 

뭐지?

 

 

강원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통방아였다. 운추형으로 서까래를 세워 그 위에 지붕을 이었다. 계곡에서 물을 끌어담아 방아질을 한다.  물이 차면 공이가 치켜졌다가 물이 쏟아지면 앞이 무거워 내려 꽂히면서 공이가 확의 곡식을 찧게 만들었다. 통방앗간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굴피지붕이다.

 

이승휴 유허지의 동안사

 

알려진 것 처럼 천은사는 동안 이승휴의 제왕운기 저술의 산실이다.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세력을 비판한 상소를 한 결과 파직당하여 은둔하게 되었고, 그는 관직을 버리고 두타산 귀동으로 돌아와 신선의 경지에 들어갔다던 도연명을 본받기 위해 그의 귀거래사의 <<용슬이안(容膝易安)>>을 인용하여 그의 거소를 '용안당(容安堂)'이 라 하고 인근의 삼화사에서 경서를 빌려 10년간의 독서생활 끝에 <<내전록>>이란 불서를 펴냈고, 1287년에는 우리의 귀중한 사서인 <<제왕운기>>가 이 용안당에서 찬술되었다

 

그런 연유로 사역이 이승휴 유허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왕운기는 발해를 최초로 우리 역사 속에 편입시켰고 부여와 비류국, 예맥, 남옥저 등을 모두 단군의 후손으로 단정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은 책이다. 또한 삼국유사와 더불어 단군의 기록을 남긴 저서이다.

 

이승휴사상 선양회 글을 옮겨 왔다.

 

이승휴(李承休) 행장

 

이승휴의 자는 休休, 경산부 가리현(지금의 성주군)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힘써 공부하였다. 고려 고종조에 급제하여 두타산 구동에 들어가서 몸소 농사지어 어머니를 모시고 십여 년을 살았다. 安集使 李深敦의 권유로 서울에 나와 李藏用. 柳璥의 천거로 경흥부 서기가 되었다. 들어와서는 都兵馬錄事가 되었더니, 삼별초 항쟁의 와중에 포로가 되었다가 왕이 있는 곳으로 도망하여 왔다. 원종이 크게 기뻐하였다.

 

승휴가 이에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그들이 물목을 반쯤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정예를 파견하여 선단을 가로 끊어버린 뒤에 강도를 굳게 지키면 끊어진 앞의 선단의 형세는 외롭고 뒤 선단은 거점을 잃어 전후가 서로 호응할 수 없게 하면 그들을 가히 쳐부술 수가 있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양부로 하여금 의논케 했으나 주저하여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군수 물자가 보급이 안되고 안팎에서는 착취가 횡행하며, 토목 사업이 크게 일어 백성들이 대단히 괴로웠다. 승휴가 상서하여 그 폐간을 극언한 끝에 죄없이 파면되었다.

 

1252년 문과에 급제한 후 합문지후, 감찰어사 등을 거쳐 우정언, 우사간 등의 벼슬을 거쳤다. 장리 7명의 죄를 물어 재산을 몰수한 후 그들의 원한을 사 동주부사로 좌천된 후에는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때마침 왕이 順安公 悰을 元에 보내어 황후와 태자 책봉을 하례할 때에, 양부에서 승휴를 추천하여 서장관으로 삼았으나 늙었다는 이유로써 사양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오년에 그대의 성명을 벼룻집에 적은 것이 아직도 책상 위에 있거늘 그대는 힘을 내게" 라고 하고는 백금 서근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황제가 하례를 받고는 잔치를 베풀고 옷을 내리었다.

 

승휴의 진표사문은 문장이 아주 훌륭하였다. 매일 관반인 한림학사 후우현과 창화하였다. 우현은 5세에 오경에 통하였으므로 황제가 불러 학사로 삼았고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승휴의 시를 보고는 탄복하고 문득 그를 읊었다. 그가 돌아오자 왕이 크게 기뻐하여 쌀 300석을 내리고, 지었던 시문을 가져오게 하여 보시고 매우 칭찬하셨다.

 

왕이 돌아가시자 또 서장관이 되어 원에 가서 고애하고, 남기신 말씀을 세자에게 전하였다. 승휴가 생각하기를 세자는 부마의 융복을 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그 옷과 예장을 스스로 버리기가 어려운 형세이기 때문에 마침내 세자를 풍간하고 황제에게 본국의 의관과 전례에 대한 시말을 말씀드렸다. 황제가 승상에게 명하여 칙서하기를 경은 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대의 조종의 제도에 조금이라도 어긋나지 말게 할 것이며 예과 같이 행하라고 하였다.

 

그는 돌아와 합문지후를 제수받았으며, 監察御史와 右正言을 지내었다. 시정의 득실에 대한 왕의 물음에 승휴는 15개 조목을 올렸다. 그는 계속하여 右司諫에까지 올랐으며 양광, 충청 두 도의 안찰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 7명의 죄를 묻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많이 사서 東州副使로 폄출되었으며 스스로 동안거사라고 호하였다. 얼마 뒤에 불려 殿中侍史를 제수받고 열 가지 일을 아뢰었으며, 또 상소하여 이와 해 될 일을 극론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파면되고, 구동 옛 집에 돌아왔다. 그곳에 따로 容安堂을 꾸며 불서를 읽었으며, 帝王韻紀와 內典錄을 저술하면서 10년을 살았다.

 

왕위를 이어받은 忠宣王이 하서하기를 '과인이 듣기로는 임금이 된 자는 어진이 구하기에 부지런해야 하고, 사람 얻기에 뛰어나야 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대체로 한 가지 능력과 재간 있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부르고자 하는데, 하물며 경과 같은 사람은 문재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벼슬할 당시에 비할 데 없이 충성하고 절개 굳어 능히 군심의 잘못을 바로잡았던 것이다. 때를 잘못 만나 대각에서 벗어져 나가 헛되이 산골에서 늙어가니, 과인은 일찍부터 안타까이 생각하였다. 지금 박덕의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를 이었으니, 옛 사람과 더불어 만가지 일을 다스리고자 하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 按察副使 유자우를 시켜 돈돈히 타이르기를 그대의 그 몸을 나의 옆자리에 두고자 하니, 나이가 많다고 사양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그의 아들인 權知校書郞 林宗에게 명하기를 어른을 모시고 서울로 오라고 하였다. 승휴가 글을 올려 늙고 병 있음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하서하기를 '과인은 평소 경의 이름을 듣고는 같이 다스리고자 생각하여 지금 경에게 詞林侍讀 左諫議大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의 벼슬을 주노라. 뭇 백성을 한 번 일으켜 주기 바라오.' 라고 하였다. 승휴가 이르니 왕이 더불어 이양기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의 이되고 해될 일, 시정의 좋고 나쁜 점을 묻고 조용히 들으셨다.

 

그 뒤 수일에 승휴가 전하께 말씀을 드리기를 '전하가 노신을 부르신 까닭은 신기한 계책을 내어 큰 공을 세우라 하심이 아니고, 다만 직언으로써 무엇이든 말하라 하셨을 따름이오니 신이 어찌 남은 목숨을 아끼어 홀로 상은을 입겠사옵니까' 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元의 사자가 와서 따져 물었던 것이다. 왕이 일러 말하기를 '선생이 당한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하겠소.'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난리로 인한 이치는 옛부터 그러하옵니다. 하늘이 그런 일을 전하로 하여금 앞으로 거울삼게 하여 길이 태평을 누리시게 할 것이오니 너무 근심하지 마옵소서. 아까 判秘書事 進同僉資政院事가 상서하기를 우리나라의 제도에 70이 넘은 이를 높은 벼슬에 있게 함은 예가 없는 일이라고 하였사옵니다.

 

못난 신하로 말미암아 선왕의 제도를 고쳤으니 신의 죄가 크옵니다. 바라옵건대 은명을 거두시오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선생은 타인과 비교할 일이 아니니 거듭 더 잘 해 주오. 승휴여, 힘차게 직분을 맡아 주게나.' 라고 하였다. 겨우 십 수일에 또 상서하여 물러가겠다고 빌기를 심히 절실하게 하니, 왕이 할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이로써 그는 밀직부사 감찰대부 시림학사 승지로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26년에 세상을 뜨니 나이 77세였다. 성품이 정직하여 세상에 욕심이 없고 불법을 아주 좋아했다. 林宗. 衍宗 두 아들이 있었다

 


동안 이승휴 연보

-고려 후기 학자.문인.정치가 (1224~1300)

-자:휴휴(休休) 호:동안거사(動安居士)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

-고려 고종39년(1224) 경산부 가리현 (현재 경북 성주) 출생

-14세: 부친사망,모친 삼척 구동으로 낙향, 본인은 원정국사(圓靜國師) 방장에서 유학자 신서(申?)로부터 좌전,주역등 공부

-29세: 고종39년(1252) 최자(崔滋)의 문하에서 과거 급제

-29세~40세: 삼척 요전산성(蓼田山城)에 들어가 몽고군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구동에서 모친 병수발과 농사 병행 요전산성에서 武陵島(현재 울릉도) 바라보며 詩 지음

-41세 : 원종5년(1264) 경흥도호부(현재 강릉) 판관 겸 서기에 임명됨

-44세 : 원종8년 삼관에 임명

-51세 : 원종15년(1274) 서장관으로 임명, 충청도 안찰사로 7인을 탄핵했다가 동주(현재 철원)부사로 좌천 이후 스스로 동안거사로 칭함

-57세 : 충렬왕6년(1280) 원나라 서장관으로 동행, 충렬왕 실정과 부원세력 횡포 비판 탄핵으로 파직 삼척 두타산(頭陀山)으로 낙향하여용안당(현재 천은사) 세우고 불경 탐독과 저술

-64세 : 충렬왕13년(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내전록(內典錄) 저술

-66세 : 충렬왕15년(1289) 보광정기(?光亭記) 저술

-71세 : 충렬왕20년(1294) 간장사기(看藏寺記) 저술, 용안당을 간장사로 바꾸고 절에 희사함. 제왕운기 초간함

-75세 : 충렬왕24년(1298) 충선왕 즉위로 개혁정치 추진과정에 “밀직부사 감찰대부,사림시독좌간의대부”등으로 중용됨

-77세 : 충렬왕26년(1300) 10월에 졸(卒)함

-공민왕 8년 (1359) 아들 연종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간행

 공민왕 9년 (1360) 제왕운기 중간

 조선태종17년(1417) 제왕운기 중간



동안 이승휴 연보2

고려시대 최씨 무인정권과 몽고 간섭하의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파직과 은둔을 거듭하는 생을 살면서,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은 50세 이후부터 16년간에 불과했다. 그의 자(字)는 휴휴(休休)이며, 자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두타산(頭陀山)거사이다. 경산 가리현(加利縣) 사람으로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이고 삼척에서 살았다.이승휴는 1224년(고종 11)에 태어났다. 9세(1232)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원정국사의 방장에 들어가 명유 신서에게서 <좌전>과 <주역> 등을 익혔다.

 

14세(1237)되던 해에 부친상을 입고 종조모인 북원군 부인 원씨에게서 양육되었다.이승휴는 1252년(고종) 29세의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후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1254년(고종41) 몽고의 제5차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으며, 이에 이승휴는 강화로 가지 못하고 삼척 요전산성에서 몽고군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었다.

 

 그후 강화로 돌아가고자 해도 최자와 종조모 또한 세상을 떠나 의탁할 만한 곳이 없게 되었다.이에 환도하지 못하고 두타산 구동(龜洞)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는 동안 최씨무인정권은 무너지고 고려정부는 몽고와 강화하게 되었다.1263년(원종4) 나이 40세에 이르러 강원도 안집사로 온 병부시랑 이심의 주선으로 강화에 들어가서,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도호부판고나겸장서기에 보임되었다. 이승휴는 1270년(원종11) 삼별초가 봉기했을때는 군에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령과 영선이 크게 일어나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하였다.

 

이후 녹사 등 문서를 다루는 관직을 맡다가 원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따라나선다. 다음 해 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서장관으로 가는데,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인질로 가 있던 세자가 호복을 입고 곡을 할까 염려되어 고려식의 상복을 입도록 권유한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장광, 충청도 안령사가 되어서는 장리 7인을 탄핵하고 그 가산을 적몰했다가 원한을 사서 동주부사로 좌천되었으며, 이때부터 스스로 동안거사라 일컬었다. 얼마 뒤 전중어사(殿中御史)로 임명되었다가 1280년 (충렬왕6) 감찰사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했다가 파직당하였다.이승휴는 파면당한 후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여 당호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였다.곧 그는 국사와 세론을 일절 함구하고자 했으며, 도연명과 같이 전원의 일민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으면서 시대와 보조를 같이 하지 않으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10여 년 동안 삼화사(三和寺)의 장경(長經) 을 빌려 공부하며 <제왕운기(帝王韻記)>와 <내전록(內典綠)>을 저술하였다.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이승휴 또한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승지(詞林承旨)에 임명되었으며, 곧 사림기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 대부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사사 승문관학사가 되었다.이승휴는 70세가 넘어 연관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하여 물러나고 있는데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로 치사, 1300(충렬왕26) 나이 77세로 졸(卒)하였다.

 

현재 그의 묘가 성주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저작으로서는 제왕운기가 있고, 아들 이연종이 편집한 문집 <동안거사집>이 전해지고 있다.그가 죽은 뒤 1304년(충렬왕 30) 용안당을 간장암(看藏庵)이라 하고, 밭을 그 부속재산으로 삼게 하여 출가한 둘째 아들인 담욱(曇昱)이 머물도록 했다.

 

바로 그 간장사가 오늘날 두타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은사의 전신이라고 한다. 천은사에서는 매년 10월에 ‘이승휴 선생 다례제’를 올린다고 하니, 다인 이승휴의 정신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1322년(충숙왕 9) 그의 맏아들 이임종(李林宗)과 둘째 아들이며 당시 조계종의 큰스님이었던 담욱(曇昱)이 허물어진 간장암을 중수했다. 이 일에는 담욱의 제자들도 가담했으며, 관동진무사 신후천(辛侯천)도 도왔다. 공사는 1323년가을에 완공했다. 그는 불교를 너무 좋아하여 성품이 정직하고,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었다. ?

 

이승휴의 아들은 3형제인데, 첫째아들의 이름은 임종(林宗)으로 등과하여 헌부산랑의 벼슬에 있었으나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셨고, 둘째 아들은 담욱(曇昱)으로 출가하여 불제 자의 길을 갔으며, 셋째 아들은 연종(衍宗)으로 등과하여 사헌규정을 거쳐 밀직사 겸 감찰대부에 이르렀다 합니다.

 

출처...문화재청

 

천은사기실비(天恩寺記實碑)는 1921년 3월에 한영 정호(漢永 鼎鎬; 映湖, 石顚도 호)가 글을 짓고 심지황(沈之潢)이 글을 써서 세운 사적비이다

 

제왕운기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의 문인(文人)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중국(中國) 역사(歷史)와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를 운문(韻文)으로 적은 책으로 상(上) ·하(下) 2권이며 상권(上卷)은 중국역사(中國歷史)를, 하권(下卷)은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를 서술(서述)하고 주기(註記)를 붙였다.

 

중국과 고려의 역사를 읊은 대서사시 『제왕운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은 책이다. 발해를 최초로 우리 역사 속에 편입시켰고 부여와 비류국, 예맥, 남옥저 등을 모두 단군의 후손으로 단정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 책은 『삼국유사』와 더불어 단군의 기록을 남긴 저서이다. 저자인 이승휴(李承休: 1224∼1301)는 64세 때인 1287년 지금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을 짓고 『제왕운기』를 썼다.

 

중국(中國) 역사(歷史)인 상권(上卷)은264구 2,370언(言)의 7언시(言詩)로 서술(서述)하였고, 우리 나라의 역사(歷史)인 하권(下卷)은 1 ·2부(部)로 나누었는데 제 1부(部)에는 ‘동국군왕개국년대(東國君王開國年代) ’라 하여

먼저 지리기(地理記)를 적고 다음에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후조선(後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 ·삼한(三韓)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부여(扶餘) ·후고구려(後高句麗) ·백제(百濟) ·후백제(後百濟) ·발해(渤海)를264구 1,460언(言)의 7언시(言詩)로 기술(記述)하고, 제 2부(部)는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 ’라 하여 , 저자가 속한 고려시대의 역사는162구 700언(言)의 5언시(言詩)로 고려초(高麗初)부터 충렬왕(忠烈王) 때까지를 기술하였다.

 

이 책은 권수(卷首)에 지원이십사년(至元二十四年)(충렬왕(忠烈王)13, 1287) 3월(月)에 쓴 저자(著者) 이승휴(李承休)의 서(序)가 있고 권말(卷末)에 양온령(良온令) 정소(鄭소)의 발(跋), 부사(副使) 이원(李源), 안염사(按廉使) 안극인(安克仁)의 후제(後題)가 있으며 그 뒤에 ‘지정이십년경자(至正二十年庚子)(공민왕(恭愍王)9, 1360) 5월(五月) 일(日) 동경개판(東京開板)…… ’이란 간기(刊記)가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원정년간(元貞年間)(1295∼1296)에 진주부사(晋州副使) 이원(李源)이 왕명(王命)으로 진주목(晋州牧)에서 개판(開板)하였고, 공민왕(恭愍王)9년(年)(1360) 5월(月)에 경상도안염사(慶尙道按廉使) 안극인(安克仁)이 경주(慶州)에서 중간(重刊)하였는데 글씨는 김희(金禧)가 썼다.이 책은 경주판(慶州板)이기는 하나 후쇄본(後刷本)인 여말(麗末) 선초(鮮初)에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그뒤 태종 7년(1417)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지강(李之剛),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승간(李承幹) 등의 주관으로 경주(慶州)에서 3판이 나왔다. 이 여말각본(麗末刻本)의「제왕운기(帝王韻紀)」는 보물(寶物) 제(第)418호(號)로 이미 지정된 바가 있거니와, 본서(本書)는 권수(卷首)(표(表)) 1장이 결락(缺落)되고 하권(下卷) 제 6장이 결락(缺落)되었으며 동(同) 제 8장은 타판본(他板本)이 보입(補入)된 것이기는 하나, 여말선초(麗末鮮初) 간본(刊本)으로 기왕(旣往)에 발견(發見)된 것과 대비(對比)할 수 있는 자료란 점에서 서지학(書誌學)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이며 역사학(歷史學) ·한문학(漢文學) 연구(硏究)의 자료(資料)이기도 하다.

 

권말(卷末)의 정소(鄭소)의 발문(跋文)과 안극인(安克仁)의 후제(後題)를 보면 초간은 이승휴가 살아있을 때인 원정년간(1295~1296)에 진주목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책은 공민왕 9년(1360)에 경주에서 안렴사 안극인(安克仁)에 의하여 중간되었던 판본(板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쇄상태로 보아 고려(高麗) 말(末)에서 조선(朝鮮) 초(初)에 후쇄(後刷)한 것으로 보인다.

 

제왕운기(帝王韻紀)』의 고려판본으로는 보물 제418호로 곽영대(郭英大) 소장본이 있다. 그러나 곽영대 소장본에 결락(缺落)된 이원(李源)과 안극인(安克仁)의 후제(後題)까지가 갖추어져 있어 서지학적(書誌學的)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상권 제18장과 하권 제6장, 8장, 16장이 빠져 있어서 손으로 써 넣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이규보를 비롯하여 당대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들이 갖고 있었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같은 시대 이규보(李圭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오세문(吳世文)의「역대가(歷代歌)」와 함께 장가체의 설화시(說話詩)로 국문학상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서지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86년 11월 29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제왕운기와 같이 오언 칠언으로 된 장체(長體)의 역사를 노래한 시(영사시, 詠史詩)는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원초적 형태로서 고대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점에서 제왕운기는 같은 시대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역대가(歷代歌)와 함께 국문학상의 가치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저술하게 된 동기가 고려, 즉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조군왕세계연대’의 끝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이승휴는 몽골의 침입으로 국내 정치 상황이 혼란했던 시기에 신진 유학자로 정치계에 등장하여 파직을 당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경험하였다. 그는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세력을 비판한 상소를 한 결과 파직당하여 은둔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따라서 제왕운기는 당시의 대내외적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회의와 함께 새로운 사회의 희원(希願)을 시로 적은 것이다. 제왕운기는 정치, 사회 윤리를 바로 잡기 위한 의욕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 가치기준을 역사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또한 원나라의 정치 간섭에 대한 불만이 이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멀리 부도전이 보인다.

 

 

천은사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頭陀山)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며 758년(신라 경덕왕 17) 두타삼선(頭陀三仙)이 창건하였다 한다. 두타삼선은 인도에서 온 3명의 승려를 말하는데, 용 또는 돌배를 타고 불래진(佛來津)에 도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중 1명은 금련(金蓮)을 가지고 와서 영은사(靈隱寺)를 지었고, 다른 1명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와서 삼화사(三和寺)를 나머지 1명은 백련(白蓮)을 가지고 와서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백련대(白蓮臺)였다.

 

839년(문성왕 1) 범일(梵日)이 극락보전을 창건하면서 중창하였다. 1304년(충렬왕 30) 이승휴(李承休)가 자신의 별장을 절에 시주하여 간장암(看藏庵)을 세웠고, 1322년(충숙왕 9)에는 이승휴의 아들 임종(林宗)과 담욱(曇昱)이 중수하였다. 1598년(조선 선조 31)에 휴정(休靜)이 중건할 때, 절의 남서쪽에 있는 봉우리가 검푸르다고 해서 절 이름을 흑악사(黑岳寺)로 바꾸었으며 1706년(숙종 32)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중건하였다.


1899년 목조 아버지의 묘소인 준경묘를 수축할 때 조포사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천은사로 절이름을 바꾸었다

 

 극락보전 

 

천은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로서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본존불인 아미타불은 나발, 원만상 코는 오똑하며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이고 아미타 수인이며, 결가부좌이다. 좌협시불인 관세음보살,  우협시불은 지장보살이다. 

 

 

복장유물로 인해 제작 년대가 밝혀진 조선조 15~16세기에 제작된 목조아미타불이다.

 

금동약사여래입상

천은사 금동여래 입상...월정사 성보박물관

 

전형적(典型的)인 통일신라시대 소금동불입상(統一新羅時代 小金銅佛立像) 양식을 보이는 불상으로, 전체적인 조각 솜씨는 단아(端雅)한 편이나 불을 맞은 듯 대좌(臺座) 부분이 파손되고 뒤틀려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육계가 크지 않으며, 얼굴은 윤곽만 보이나 단아한 편이다. 대의(大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 부분을 벌려서입고 한쪽 자락을 왼쪽 팔뚝에 걸치고 있다.

 

옷주름은 둥글게 늘어지는 아육왕상식(阿育王像式)으로 대의가 불신(佛身)에 부드럽게 밀착되어서 허리나 양 팔뚝, 양 다리의 윤곽이 약간 두드러져 보인다. 대의의 끝부분은 짦게 늘어지고 밑의 치마는 양 다리에 붙어서 옆으로 뻗치고 있다. 수인(手印)은 왼팔을 들어 약호(藥壺)를 들고 오른팔은 내려서 벌리고 있다.

 

 

아름드리 노거수가 줄지어 서 있는 숲길 깊은 작고 소담스런 절집. 그 곳엔 큰 역사가 담겨져 있었다. 여름밤 통방아 소리 들으며 반딧불이를 벗삼으면 내마음이 절로 청정해질 것 같은 천은사. 다시 찾고픈 절집으로 마음밭에 심어두어야 겠다.  

201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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