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삼척시

삼척...죽서루

임병기(선과) 2010. 10. 26.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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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 오십천 건너 삼척시립박물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죽서루는 객사(동헌)의 부속건물로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원종 7년(1266)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내용으로 보아 죽서루는 적어도 1266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태종 3년(1403) 부사 김효손이 옛 터에 중창하였으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중수되거나 단청되었으며, 증축되었다. 죽서루는 누의 동쪽에 죽림(竹林)이 있었고 죽림 속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었다는데서 명명되었으며, 죽서루 동편에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었다는데서 유래한다는 설도 전한다.

 

죽서루 옛그림

 

삼척시청 홈페이지 글과 어울리는 그림이다. "멀리 태백준령이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가까이는 근산 갈야산 봉황산이 솟아있어 죽서루를 에워싼 모습이 마치 삼신산의 선계(仙界)를 느끼게 하는 경지입니다. 성남마을의 전원풍경, 오십천 응벽담의 맑은 물, 그 속에 한가롭게 노니는 물고기떼, 바람과 물과 뱃사공을 희롱하는 갈매기, 대나무숲을 울리는 바람... 이러한 자연환경과 조화롭게 천길 벼랑 위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하늘을 날아갈 듯 우뚝 솟아있는 죽서루이니, 이 경관은 가히 신선의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기단과 초석없이 두리기둥 밑면을 그렝이질하여 자연암반 위에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1층을 돌아 2층으로 올라가면 자연암반을 통해 2층 마루와 연결되어 있다. 방학기간인지 공부가 한창이어서 루대에 직접 들어기 못해 미수의 죽서루기를 비롯하여 글을 비롯하여 보지 못했다. 루각 안에는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 정조 임금 어제시 외에, 미수의 제일계정(第一溪亭)등의 현판과 중건기가 걸려있다.

 

 

정면에서 보면 1층은 7칸 2층은 6칸이어서 이채롭다. 측면은 2칸이다.

 

 

竹西樓記 - 미수 허목

 

東界多名區。其絶勝八。如通川叢石亭,高城三日浦海山亭,?城永郞湖,襄陽洛山寺,溟州鏡浦臺,陟州竹西樓,平海越松浦。遊觀者獨稱西樓爲第一。何也。蓋濱海州郡關嶺以外。東盡大海。其外無窮。日月迭出。怪氣萬變。海岸皆沙。或匯爲大澤。或矗爲奇巖。或鬱爲深松。自習溪以北。至箕城南境。七百里。大體皆然。獨西樓之勝。隔海有高峯?壁。西有頭陀,太白。巍峨??。浮嵐積翠。巖岫杳冥。大川東流。屈折爲五十瀨。間有茂林墟煙。至樓下。層巖蒼壁千尋。淸潭脩瀨。灣?其下。西日。綠波潾潾。澹?巖壁。別區勝?。與大海之觀絶殊。遊觀者其樂此而云云者耶。考官府故事。樓不知作於何代。而至皇明永樂元年。府使金孝宗。修廢墟起此樓。洪?元年。府使趙貫。施丹?。其後四十六年成化七年。府使梁瓚。重修之。嘉靖九年。府使許確。增作南?。又其後六十一年萬曆十九年。府使鄭惟淸。復重修之。自太宗永樂元年癸未。至淸主康?元年壬寅。爲二百六十年。樓下。古有竹藏古寺。樓有竹西之名。蓋以此云。仍誌之。以爲竹西樓記。(한국 고전번역원 자료)

 

관동 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다. 그중에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이니, 즉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와 해산정(海山亭), 수성(?城)의 영랑호(永郞湖),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명주(溟州)의 경포대(鏡浦臺), 척주(陟州)의 죽서루,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인데, 관광하는 자들이 유독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해변에 위치한 주군(州郡)들이 대관령(大關嶺) 밖은 동으로 큰 바다를 접했으므로 그 바깥은 끝이 없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떠올라 괴이한 기상의 변화가 무궁하다. 해안은 모두 모래톱인데, 어떤 데는 모롱이진 큰 소[大澤], 또 어떤 데는 불거진 기이한 바위, 그리고 또 어떤 데는 우거진 깊은 솔밭으로 되어 있어, 습계(習溪) 이북으로 기성(箕城) 남쪽 접경까지 7백 리는 대체로 다 이러하다.

유독 죽서루의 경치만이 동해와 마주하여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타산(頭陀山)과 태백산(太白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짙은 이내 속으로 바위 너설이 아스라이 보인다. 큰 시내가 동으로 흘러 꾸불꾸불 50리의 여울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별구(別區)의 아름다운 경치는 큰 바다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관광하는 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서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고을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아도 누를 어느 시대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명(皇明)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3)에 부사(府使) 김 효종(金孝宗)이 폐허를 닦아 누를 세웠고, 홍희(洪?) 원년(1425, 세종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올렸다. 그 뒤 46년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했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중축했다.

또 그 뒤 61년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太宗) 영락 원년 계미(1403)에서부터 청주(淸主) 강희(康?) 원년 임인(1662, 현종3)까지는 260년이 된다. 옛날에 누 밑에 죽장사(竹藏寺)란 절이 있었는데, 누 이름을 죽서라고 부른 것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이상을 기록하여 죽서루기로 삼는다. 

 

 

"죽서루"와 "관동 제1루" 현판은 숙종 41년 부사 이성조의 글씨이다.

 

 

 

문화관광부에서 1991년 세운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석이다. 팔각의 각면에는 송강의 친필, 수결, 가사창작의 배경 등을 담았다. 기념표석은 죽서루와 전남 담양 식영정 근처 두 곳에 세웠다.

 

 

관동별곡關東別曲...송강松江

 

진쥬관眞珠館 죽서루竹西樓 오십천五十川 나린 물이

 

태백산太百山 그림자를 동해東海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漢江의 목면木覓)에 다하고 자

 

왕정王程이 유한有限하고 풍경風景이 몹슬믜니

 

유회幽懷도 하도할사 객수客愁도 둘레 없다.

 

201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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