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양산시

양산...천성산 미타암 아미타여래입상

임병기(선과) 2010. 9. 23.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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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른 답사 일정에 비해 유난히도 걷는 코스가 많았다. 동축사, 불당골 마애불, 문수사 그리고 천성산 미타암도 피할 수 없었다. 팔부능선에 위치한 절집은 차량으로 올라와서도 약 5~6백M는 족히 걸어야 했다. 선천적으로 땀이 많아 비를 맞은 몰골로 등산을 하면서 만난 노보살님의 격려와 그분들의 절로 향하는 지극정성의 신심에 감동해 스스로를 채찍질하였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산지 좁은 터를 극대로 활용한 가람 배치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인법당 같은 요사, 그옆에 대웅전, 공양간, 석굴법당으로 향하는 계단의 범종각이 나란히 펼쳐져 있다. 요사에는 유월 보름 밤샘 철야 기도를 하려는지 늦은 시간임에도 하산할 마음이 없는 듯한 여러분의 보살이 계셨다.

 

 대웅보전

 

전통사찰관광정보에서 자료를 가져왔다. 천성산의 동쪽 기암절벽에 자리한 미타암은 신라 선덕여왕(632~646)대에 원효대사가 세운 수도암으로 알려져 있을 뿐 구체적인 창건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송고승전(宋高僧傳)』의 내원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5년에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천성산으로 들어와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ㆍ중ㆍ하 내원암을 비롯 주변에 89개 암자를 세워 천명을 거주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미타암 역시 이 들 암자 중 하나로 창건되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창건 이후 역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연혁을 살피기는 힘드나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석굴을 중심으로 수도처 역할을 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포천산 오비구(布川山 五比丘)」조에서 말하는 포천산의 석굴이 현재 미타암의 미타굴로 짐작되고, 이 석굴 안에 봉안된 아미타여래입상의 조성연대가 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당시 아미타신앙의 성행과 함께 아미타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 듯하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1376년(우왕 2)에 중창하였고, 1888년(고종 25) 정진(正眞) 스님이 재중창하였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많은 고승들이 수도와 정진으로 이곳을 거쳐 갔고, 석굴을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암자였던 미타암은 기도처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1995년에 혜오(慧悟) 스님이 대광명전을 건립하는 등 불사를 이룩해 현재의 가람으로 일신하였다.

 

 

금동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금동 문수ㆍ보현ㆍ관음ㆍ대세지ㆍ지장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석굴법당 가는 길의 범종각

 

 

길은 이어진다.

 

 

 

바위아래 석굴사원을 조성하고 아미타불을 모셨다.

삼국유사 권 제5에 기록된 '포천산 5비구 景德王代'편에 미타암 석굴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삽양주(지금의 양산) 동북쪽 20리 가량 되는 지점의 포천산(布川山)의 석굴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섯 비구가 아미타불을 염하며 서방정토를 구하기 몇 십년에 문득 聖衆이 서쪽에서 와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기 蓮花臺座에 앉아 공중으로 날아 가다가 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머물고 있는데, 간간이 하늘에서 음악이 들려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미타여래입상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미타암(彌陀岩)의 석굴사원 안에 모셔져 있다.문화재청에서 자료를 가져왔다.

머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원만하면서도 우아한 인상, 왼손을 몸에 붙여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을 가슴에 댄 모습, 그리고 둥근 어깨와 평판적인 가슴, 대좌 위에 곧바로 선 자세 등에서 719년에 만들어진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려 발목에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뾰족한 배(舟) 모양으로 안에 2줄의 굵은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였다. 그 사이에는 좌우대칭으로 꽃무늬를 배치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좌는 얇게 파낸 눈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대석(臺石)위에 꽃무늬가 새겨진 이중의 연화좌(蓮華座)를 올려 놓고 있다.

 

 

광배와 대좌, 옷주름의 양식과 수법이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比丘)가 수도하던 석굴에 모셔진 것이다. 또한 미타암이 자연동굴이지만 인공을 가한 흔적이 뚜렷하여 8세기 통일신라 불상양식의 한 계보를 살펴 볼 수 있다.

신라 아미타사상의 전개과정은 물론 당시 성행하던 석굴사원 조영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석굴 내부에 봉안된 아미타불은 신라 문성왕의 왕후가 병을 앓게 되자, 석굴에 부처님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면 병을 나을 수 있다하여 봉안하게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 입상...문화재청
 

불상의 양식에 자주 인용되는 서라벌 감산사지 아미타불 입상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는 큼직하며 얼굴은 근엄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쳤으며, 상체에서 반원을 그리다가 하체에 이르러 두 다리에 각각 타원을 그리며 늘어져 있다. 이것은 곧 통일신라불상 옷주름의 양식인 동심(同心) 타원형 의(衣)무늬의 선구가 되는 것이다.

 

법의의 왼쪽과 아래 끝에 옷주름을 잡아 낡은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나,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려 설법인(說法印:부처 손의 한 형식)을 나타냈다대좌는 각면에 안상(眼象) 1좌씩을 새겼고, 그 위에 겹꽃잎의 연꽃을 크게 조각하였다. 온몸을 싼 광배는 2가닥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둘레는 화염무늬로 처리하였다.

 

 

멀리 울산항이 보인다. 지리산 실상사 약사여래불이 한반도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비보 불상으로 회자되듯이 미타암 아미타여래 입상도 대마도로 흘러가는 기운을 차단하기 위하여 조성했다는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자리에 서면 설화가 허구만은 아닌듯 여겨진다.

 

 

양산 덕계 방향인가?

 

 

힘은 들었지만 여간 즐겁지 않다. 산행의 기쁨 못지 않게 어렵게 뵌 옛님들은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다. 올라올때 나를 격려하셨던 세분의 노보살님을  참배를 마치고 내려가는 도중에 다시 뵈었다. 올라오든 걸음을 잠시 멈추고 쉬고 계시던 한 분이 "지금의 마음으로 살면 세상복을 다 받을거라며" 덕담을 건내셨다. 과연 그리 살 수 있을런지, 내마음도 하늘 빛깔을 닮았으면 좋으련만.

 

201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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