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울주군

울산...문수산 문수사

임병기(선과) 2010. 9. 12.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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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산 문수사는 첫걸음이다. 산아래에서 바라보는 문수산은  폭염과 게으른 성정탓에 까마득해 보였다. 순간적으로 답사 동선에서 건너 뛰고 싶은 욕구가 치솟아 올랐지만 인연 짓지 못한 안타까움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 두 걸음 나뭇계단을 밟으며 또다시 잘못한 선택이라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지만 참배를 마치고 귀가하는 노보살님의 넉넉한 얼굴을 대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땅만 보고 걸었다. 숨이 차왔지만 "다왔다"는 보살님들의 격려에 숨을 고르며 즐거운 마음으로 멀리 산아래를 바라보며 결의(이거원. 전투에 나가는 병사 같구먼)를 다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 아닐까? 집에서 몇 분만 나가면 문화유산. 야생화. 계곡 등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이 즐비하게 어우르져 있는 국가가 흔치는 않을 것이며, 울산시민들에게도 문수산 주변은 문수사. 망해사지. 청송사지. 영축사지 등 많은 옛님이 분포된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문수사는 646년(신라 선덕왕 15) 자장(慈藏)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상세한 기록은 알 수 없다. 다만 문수사에 관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내용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피은(避隱)’편에 「연회도명문수점(緣會逃名文殊岾)」이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하여, 사찰의 창건을 짐작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신라 원성왕 때 영취산 주위 토굴에 연회(緣會) 스님이 은거하면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 지는 날이 없었다. 원성왕이 이 사연을 듣고 스님을 국사로 봉하려 하자, 스님은 이를 거절한 채 암자를 등지고 길을 떠나다가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변재천녀(辨財天女)를 만나게 되었다. 이에 인연을 어길 수 없음을 깨닫고 국사가 되었으며, 그 후 문수보살을 만났던 곳에 암자를 지어 문수암(文殊庵)이라 하고 변재천녀를 만났던 곳에 보현암(普賢庵)을 지어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문수사의 연혁을 전하는 기록을 살필 수 없으나, 조선시대 들어 1799년(조선 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으로 이안되어 있는 칠성탱이 1855년(철종 6)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전통사찰정보

 

 

문수산은 신라와 고려시대엔 영축산이라 불렸다.  조선조에 와서 문수산이라 불렸으며, 일명 청량산으로 불리어지는 산이지만 모두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문수산은 로부터 문수보살이 사는 영험한 산으로 알려져 왔고,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들면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보살님이 그러셨다. "처사님 공양간 문닫을 시간이니 빨리 가셔서 공양하세요" 사실 숫기 없는 중생이라 절집에서도 공양간 주위를 맴돌며 머뭇거리기만 할 뿐 공양을 한 적은 많지 않다. 그런 나에게 저런 말씀을 하는 사실로 미루어 밥 인심이 좋은 절집임을 직감했다. 이정도면 절집에서 새우젓을 얻어먹을 통밥인가?

 

 

"예쁜 버섯과 예쁜 여자에게는  독이 있다" 라는 우리 할머니의 구구절절 옳은 어록은 나의 삶에 경구로 남아 있다.

ㅎㅎㅎ

 

 

금강산 만물상 초입의 계단 처럼 보인다. 저위의 세상이 극락일까?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된 지금 이 계단은 극락으로 통하는 계단임에 분명해보여 발걸음에 힘이 더해진다.  실제로 저위 바위에서는  울산과 온양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문수사가 자리한 가람터가 거의 산정상이어서 빼어난 경관이 눈에 들어오며 가히 성지라 불러도 좋을 듯해 보였다.

 

 

탁월한 혜안을 지니신 보살님의 예상처럼 마지막 한 그릇 남은 공양이었다. 앞에 줄을 선 사람 뒤에 슬며시 다가갔더니 공양주 보살님께서 "마지막 입니다"라며 꾀고리 같은 고운 목소리로 말씀했다. 마음도 분명 천사이리라!!! 푸짐한 양만큼 맛도 그만이었다.

 

 

 

범종루는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2층 사모지붕 건물로 1층은 대웅전과 통하는 통로이다. 종루의 2층에는 ‘청량산문수사(淸凉山文殊寺)’, ‘범종루(梵鐘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1987년 L그릅의 보시로 조성한 범종을 봉안하였다. 범종루 외에도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L사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근자에 신축한 전각이다.  많은 참배객의 편의와 좁은 산지중정의 공간활용을  대웅전 앞에 구조물을 설치하였다.

 

 

보궁형 닫집 아래에 목조 석가여래를 주불로 문수ㆍ보현보살, 그리고 목조 관음ㆍ지장보살입상을 협시불로 봉안하였으며 모두 목불이다.

 

 

 

문수사 3층석탑. 명부전 옆에 자리하고 있다. 탑신은 백제계열 석탑 같이 초층이 길어 신라탑의 안정감은 결여되었지만 상승감은 있다. 있지만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하기단에 묻혀 있는지 불문명하지만 외관상으로는 단층 방형 기단이다.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겼다. 낙수면 기울기가 급하며, 풍탁공이 남아 있다. 옥개받침 모두 3단이며 상륜에는 노반과 보주가 보인다.  조선시대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명부전

 지정보살을 모신것은 여느 사찰과 같았다.

 

그러나 측면 벽화를 보는 순간 더위가 절로 가셨다. 섬뜩한 지옥도가 벽면에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칠곡 송림사, 장흥 보림사 등 일부 가람 명부전 외벽에만 있었다. 

 

 

 

명부전 뒷편. 강도가 약한 암반에 바위속에서 나투신 마애불로 생각했다. 광배와 불신이 한 몸인 석불좌상이었다.석조여래좌상은  청송사지 삼층석탑 부근에 있었으며 청하스님이 발견하여 문수사로 모셔왔다고 한다.

 

 

비지정 석조여래좌상은 풍파에 멸실이 심하여 복스런 상호에 입과 눈은 형체를 알 수 없었다. 두텁고 긴 귀는 어께에 닿고 삼도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텁고, 수인은 멸실이 심하여 불분명하다. 이런 모습으로 봉안하는 것이 좋은 사례일련가?

 

 

문수암...이양오(1737~1811년)


옛 부처가 날아온 곳에
신라 때부터 세월이 이어지네.
나그네는 붉은 수풀을 뚫고 들어오는데
승려는 흰 구름 속에서 잠자네.
돌은 늙어서 살펴보니 그림 같은데
누각은 높아서 앉으니 배인 듯하네. 

동해 봉래산(蓬萊山)이 가까이 있으니
참으로 날아다니는 신선을 옆에 끼고 싶네.

古佛飛來地 新羅歲月綿
客穿紅樹入 僧臥白楢
石老看如畫 樓危坐似船
東臨蓬海近 政欲挾飛仙

 

201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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