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울주군

[스크랩] 울산 / 청송사지, 망해사지

임병기(선과) 2008. 6. 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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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라를 속이고 젊은 처자들과 화려한 답사를 하였기에 완전범죄를 위해 간월사를 
벗어나면서 달구지에 기름을 가득 채웠다. 
여시 같은 마누라 집으로 날아온 카드 결재 청구서를 보면서 울 순하고 착한 남편 
직장동료들과 영취산 등반했구나 하구선 고개 끄떡이겠지.... 
청송사지 역시 사적이 남아있지 않아 내력을 알 수 없지만 신륵사에 있는 나옹화상 
(?)부도로 시작된 석종형 부도를 답사하는 것만으로도 발품을 팔만 한 가치가 충분한 
절터이다(물론 울산 학성공원에 있는 12신상이 새겨진 신라의 태화사지 부도도 석종형 
이라 석종형 부도의 시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안내간판이 골짜기까지 아주 잘되어 있어 쉽게 찾은 청송사지에는 신라말의 3층탑이 
댓잎의 간지럼을 즐기며, 오동을 떠나간 봉황을 기다리며 흘러간 시절의 영화를 
되새김하고 있다. 
상륜부가 멸실 되었고 줄어든 받침기둥 등 하대작품임을 알 수 있으나 유독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하게 보이는 것은 짧은 처마 때문이겠지 라고 생각하는 귓가에 동행한 
님들의 도란거림이 귀에 들려온다. 
"간월사지 탑이 더 좋은데 왜 청송사지 탑은 국보이고 간월사지 탑은 보물일까?" 
"그것은 청송사지 탑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간월사지 탑은 보수를 했기 때문이겠지" 
그럼요! 
성형미인이 천연미인보다 아름다움이 더 하겠습니까? 더구나 세월이 흐른 후에는... 
흙냄새 맡으며 얕은 야산의 부도전으로 올라서니 모두들 입에서 감탄사가 나온다. 
3기의 석종형 부도와 무너진 부재들... 
키가 큰 좌측의 부도는 앙, 복련이 맞보고 있는 간주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전,후면 기단에 보이는 신장상은 마치 실상사의 벅수를 보는 듯하여 감히 조선조의 
작품이라 쉬이 생각이 들고, 좌우 기단의 연꽃은 통도사, 범어사 대웅전 기단의 
꽃과 흡사하여 천년 세월이 지나도 면면이 석수쟁이의 흐름은 이어져 왔음을 일러 
준다. 
받침만 남은 좌대위에 비석이 있다면 가운데의 신흡대사 이름표를 단 스님 시절의 
가람의 사세와 사회상을 맛 볼 수 있을텐데... 
그냥 어지럽다. 저 산 위를 지나가는 철탑의 송전선로가 아니라도... 

망해사지 부도1

문수 축구장을 돌아 나와 망해사지로 길을 잡아 구산 선문과 함께 이 땅에 유입된 부도의 초기 형식인 팔각원등의 잘 생긴 부도에 이른다. 실상사, 봉암사, 태안사, 보림사에서 볼 수 있는 부도의 모습으로 지리산 연곡사 부도를 본 사람이면 아름다움과 조형미가 다소 뒤진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크기에 있어 연곡사 부도보다 크며 두기의 부도가 한치의 차이도 보이지 않아 부도의 주인공이 퍽이나 궁금하다.

망해사지 부도2

내가 망해사지를 찾은 첫 번째의 목적은 삼국유사의 현장답사 이기에 부도전에서 저 멀리 처용이 놀았던 개운포를 보았지만 부곡동 석유화학단지 굴뚝만 보여 눈감고 삼국유사의 현장으로 빠져볼 수밖에... .............................................................................................................................................................................. [불교 신문사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개운포(開雲浦)로 가는 길은 ‘개운’치 않다. 울산의 ‘처용로’에 들어서면 온산공단에서 퍼져나온 매캐한 화공약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게다가 간밤에 귀가한 남편의 눈앞에서 역신이 아내를 범하는 모습이 펼쳐졌다는 향가 ‘처용가’는 신라의 망국을 부른 타락한 사회상을 대변해줄 뿐 아닌가. 귀족들의 호화와 사치가 판치고 농민폭동으로 나라정세가 불안했던 당시인데도 불구하고, 개운포에 나들이 나온 신라 49대 헌강왕의 ‘여유’는 더더욱 개운치 않은 대목이다. 경주의 외항, 지금의 울산시 황성동 세죽마을에 들어섰다. 개포만 끝으로 저 멀리 큰 화물선박이 정박해 있다. 천년 전 서역과 중동, 일본과 중국의 문물이 드나들었던 국제무역항이었음이 실감났다. 가까이 가보니 그러나 영 딴판이다. 거대규모의 포크레인이 포구를 가로막고 서서 콘크리트로 바닷물을 메워가고 있었다. 신라 헌강왕이 이곳에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뒤덮여 길을 잃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지만, 현재는 시멘트 먼지와 돌 깨는 굉음으로 요란하기 짝이 없다. 개운포가 준 ‘실망’에 고개를 돌리면 가까이에 처용암(巖)이 앉아 있다. 울산 공업단지 앞바다에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는 처용암은, 뭍을 향한 그리움에 서라벌로 머리를 튼 거북의 형상이다. 자욱한 구름안개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자 동해용이 변괴를 일으켰다고 믿은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했다. 영축산 망해사(望海寺). 품이 넉넉하고 숲이 깊은 영축산의 망해사 대웅전에 들면 헌강왕이 망해사를 짓겠다고 동해용과 약속하는 형상이 연기설화로 그려져 있다. 망해사엔 또 60년대까지만도 용 형상의 귀면도가 출토됐고 용왕당도 있었다고 한다. 솔나무·밤나무가 우거진 절 뒤뜰에 오르면 석조부도 몇 기만이 무심히 처용암 개운포를 바라보고 있다. 처용(處容)은 누굴까. 처용암을 서성이고 망해사에 오르면서 천년 전 처용을 상상한다. 사람인가, 귀신인가, 신라인인가, 이슬람 상인인가. 처용의 존재부터 그의 노래까지 수백편의 논문이 학계에서 쏟아져 나온다지만, 아직도 분분하다.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를 보면 처용이 동해용의 아들로 묘사됐다. 처용은 왕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되고 왕은 그를 미인에게 장가들이고 벼슬까지 내줬다고 한다. 그런데 처용 아내의 미모를 탐낸 역신이 그녀와 통정하다가 그 현장을 처용에게 들키고, 처용은 노래부르고 춤추면서 물러갔다. 역신이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미덕에 감복했고, 이후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서 나쁜 귀신을 쫓고 경사스런 일을 맞아들였다 전한다. 두 남녀의 타락과 그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과 좌절로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 사유를 후세의 신라인에게 경계시키기 위해 만든 노래. 그것이 처용가라고 ‘유사’는 전한다. 망해암을 거쳐 다시 처용암을 향했다. 처용이 나왔다는 바윗덩이가 처음에 만날때완 다르다. ‘서라벌 밝히는 달이여/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사 자리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해였고/ 둘은 뉘 해인고// 본래 내 해이지마는/ 빼앗음을 어찌 하리오…… ’ ‘내 해’라는 나의 집착과 ‘뉘 해’라는 다른 누구의 집착이 부딪치다 결국, ‘빼앗음을 어찌하리오’란 초탈로 이어지는 처용은 번뇌의 원인을 스스로 소멸하는 중생의 지혜를 발휘한다. 그래선가, 차라리 춤추고 노래 부르는 처용은 아내의 불륜을 이끈 세계에 대한 강렬한 항의로 보인다. 용으로 상징화한 비불교 신앙세력이었다가 불법에 귀의하여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자가 바로 처용이라는 국내의 한 국문학자의 처용론도 귀기울여 볼만하다. 총명하고 후덕한 왕으로 알려졌었던 당시의 헌강왕이 왕권에 맞서는 귀족세력에 힘이 부치면서도 개운포에 놀러와 동해용을 만난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가 구름 쌓이고 안개가 자욱한 개운포에서 동해용의 변괴를 겪지 못했다면, 망해사를 짓지 않고, 처용을 못만났다면, 울산은 폐탑과 폐불 속에 희뿌연 매연만이 남아 있었을 게다. 울산=하정은 기자 jung75@buddhism.or.kr 2003.07.17

사진...반야낙조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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