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울산광역시

울산...불당골 마애불. 착호비

임병기(선과) 2010. 9. 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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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목 1구 주민자치센터(참 어렵다)

 

남목 고개 아래 남목초교 주변마을이 불당골이었다. 마애불은 그간 관련 인사와 일부 매니아들에게 알려졌지만 찾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동축사에서 만난 노보살님에게 여쭈었더니 예전부터 그자리에 있었는데 요즘와서 난리라며 위치를 알려주었고, 불당골에서 만난 노신사는 직접 남목 1구 동사무소 까지 상세하게 안내해주었다.

 

 

불당골 마애불은 남목 초교 뒤편으로 진입하지 말고 남목 고개변에 위치한 남목 1구 동사무사무소 뒷편 주차장에 파킹 후 이정표를 따라 산길을 오르면 된다.

 

 

완만한 경사가 이어진다.

 

 

약 20분 경과하면 묘소 앞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 만난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에게 문의하였더니 계속 내려가서 나무 다리를 건너면 보인다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삼거리 이정표에서 완만한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오면 나무다리가 보인다. 나무다리 건너기 직전에 착호비와 거북바위가 위치한다.

 

 

나무다리 건너면 바로 마애불이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준다. 마애불은 예전에 절이 있었던 마을을 의미하는 불당골 산자락에 마치 주형거신광배 모습의 바위에 계신다.  오랜 세월 풍상을 감내한 흔적을 품었지만 은은한 미소가 흐르는 듯하여 온몸은 땀에 젖었지만 삼배후에 찾아오는 마음의 평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울산지역에는 어물동 마애불과 더불어 두 곳에만 전해오는 마애불로 8세기 후반의 불상으로 추측한다.  마음 탁한 내눈엔 화중지병인가? 착하고 선행을 베푸는 가람들에게는 시무외인, 여원인의 수인으로 보인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풍화와 낮은 부조로 인하여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통인의 수인에서 약합을 어떻게 들고 있는지 약사여래불이란 자료가 곳곳에 보여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불당골 마애불 역시 비지정의 서러움을 받고 있다. 동구청에서 마련한 눈물겹도록 고마운 짧은 문장의 안내문에 천년 세월을 맡겨버렸다. 모든 중생의 예배처가 되어도 부족한 상황일텐데 설상가상으로 무속의 경배 대상이 된듯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을...

 

참고로 마애불을 참배후에는 오던 길을 되돌아 가는 길과 진행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하산해야 한다. 하루 동선을 단축하려고 골짜기로 내려왔다가  철조망 울타리에 길이 차단되어 죽을 고생을 하였다. 철조망 개구멍으로진입하였더니 철옹성 같은 개인 집의  맹견주의 문구와 CC TV에 혼비백산하여 개구멍으로 되돌아 나와야 했다.

 

 

나무다리 건너기 직전에 위치한 착호비와 거북바위 안내문

 

 

착호비는 호랑이를 잡은 공으로 세워진 비석으로 짐작하였는데 전후장의 묘비였다. 전후장은 조선 영조조에 군사용 군마를 사육하는 목장관리였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목장에도 호환이 빈번했고  피해가 특히 심각한 상황에서 전후장은 호랑이 5마리를 포획하여 그 공로로  조정으로 부터 절충장군(折衝將軍.조선시대 정3품 당상관의 무관에게 주던 관직)의 직을 받았다고 한다.  

 

 

 

착호비 전면.  전후장은 영조 33년(1757년)에도 다시 호랑이를 잡아 가선대부(嘉善大夫.조선시대 종2품 아래 관직)로 승진했다. 시인묵객이 전국 명산 절경에 글을 새긴 것이 오늘의 관점에서는 자연 훼손의 몰지각한 행동이듯이 지금은 한반도에서 멸종된 호랑이 포획으로 승진을 하였다니 불과 한 두 세기 전의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아이러니하고 안타깝다.

 

 

 

전후장의 착호비 후면 자료.

본관이 옥산인 전후장은 자가 군장(君章)이다. 강희 을유년 (1705년) 3월17일에 태어났다. 건륭 병인년(1746년)에 호랑이 다섯 마리를 잡은 공이 있어 ‘절충(折衝)’에 가자(加資)되었다. 또한 정축년(1757)년에 또 호랑이를 잡은 공이 있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다. 37년 (1772년) 10월 초 8일에 서거(逝去)하셨다. 같은 해 1월6일 울산 동면 남옥(南玉)에서 서쪽으로 거리가 3리쯤 되는 서쪽 능선에 묘를 잡았다. 부인 김씨는 ‘절충’ 광려(光麗)의 딸로써 1남을 두었는데, 성택(性澤)이라고 한다. 손자를 얻었는데 이름은 창복(昌福)이다. 1녀는 박만일(朴萬逸)에게 시집을 갔다. 이후 아들 성득(性得)이 태어났다. 같은 달 27일 날 이 비석을 세운다.’  

 

 

 

전후장 묘 바로 위에 위치한 거북바위. 눈을 꺼벙이면서 슬금슬금 마을을 향해 기어내려오는 형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거북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장수의 상징이지만 울산 동구 방어진에서는 다복과 부를 가져다주는 영물로 모셔야 할 것 같다. 거북이 직시하며 내려오는 그 곳에 불야성의 공업단지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마애여래가 지켜주고 거북이 바라보는 아랫 마을 전경

 

201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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