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울산광역시

울산...마골산 동축사

임병기(선과) 2010. 9. 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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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축사. 늘 곁에 있는 느낌의 절이다. 나를 아는 많은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으며 구태여 그 이유를 여기서는 밝히지 않겠다. 1984년 울산에 거주하면서 여러번 들렸지만 어떤 장면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동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울산은 신라 수도 경주로 통하는 무역항이었으며, 해외로부터 신사조와 문화가 유입되는 도시로 판단하면 

인도를 지칭하는 서축(西竺)과 반대 개념의 동축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는 않아 보인다.

 

동축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동축(東竺)이라는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동축사(東竺寺)는 573년(진흥왕 34)에 창건된 사찰로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편 황룡사장육상조(皇龍寺丈六像條)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연기가 전한다. 얼마 후 바다 남쪽에서 큰 배가 와서 하곡현(河曲縣)의 사포(沙浦:지금의 울주 谷浦)에 닿았다. 수색을 해 보니 공문이 있었는데, “서축(西竺)의 아육왕은 황철 5만7천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 장차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 도착하여 장육존상(丈六尊像)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 겸하여 1불, 2보살상의 모양을 싣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현사(縣吏)는 상황을 갖추어 임금님께 보고하니, 칙사가 그 현의 깨끗한 땅을 가려 573년(진흥왕 34)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고, 삼존을 맞이하여 모시도록 했다. 그 금과 철은 서울로 보내어 574년 장육존상을 완성했고, …皇龍寺에 안치했다. …장육존상이 완성된 뒤, 동축사의 삼존상 또한 황룡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

 

위의 기록에 따르면 동축사는 신라 진흥왕 34년에 창건되었으며, 창건목적은 아육왕이 보내준 석가삼존불의 모형을 봉안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점은 동축사(東竺寺)라는 절이름이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를 지칭하는 서축(西竺)과 대비되는 이름으로써 동축(東竺)이라 칭한 것은, 당시 신라가 자국의 영토를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와 대등하다고 여기는 신라 불국토사상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또한 현재의 미포(尾浦)가 당시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동축사가 위치한 지역이 해로를 통한 교역의 전진기지로서 외부로부터 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신라 불교문화의 교역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전통사찰관광정보

 

 

유월 보름 절집에서 열리는 법회에 참석하는 보살님들 이 많아 주차장은 여유가 없어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야 했다. 잠시후 자연스럽게 동행하게된 젊은 보살님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펼친다. 나지막한 목소리 때문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여야 했지만 동축사에 전해오는 전설과, 주변 경관, 울산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었다. 더운 날씨 혼자 였다면 다소 지루했을 산길이었건만 언변 좋은 보살님 덕에 가파른 308(?) 계단마져 즐거운 길이 되었다. 낯선 남정네에게  말 걸기가 쉽지 않을텐데 내 인상이 좋았던가?

 

동축사 삼층석탑. 석재의 질로 미루어 여러기 석탑 부재 조합으로 보인다. 담벽 나무 아래에도 석탑 부재가 놓여 있어 정확히 몇기의 석탑이 존재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신라 유형의 이기단으로 판단되며 하기단 부재는 멸실되었다. 상기단  면석과 갑석은 복원되었으며 기단 면석에는 탱주와 양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오랜 세월 지켜온 안방을 후처에게 내주고 뒷방으로 밀렸다가 최근에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개 돌이며,  몸돌에는 우주가 보이고 옥개받침은 1·2층은 5단, 3층은 3단이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개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전해온다. 투박한 외양이 오히려 수더분해 좋다. 기단에 비해 탑신부 몸돌이 지나치게 좁아 뻘쭘하여 어색하다.

 

 

탑 앞에 조성한 두꺼비 형상. 창원 성주사 처럼 대웅전 정면 산세가 뱀의 형국이라 상극인 두꺼비를 조성하여 기운을 염승하려는 목적이 아닐까? 창원 성주사는 돼지를 조성했다.

 

 

무량수전은 불사가 진행중이며 법당안도 법회가 열리고 있다.

 

 

삼존불

 

 

산령사(山靈祠). 고성전(古聖殿). 독성각(獨聖閣)

 

산신각.칠성각. 독성각이 아니라. 현판의 한문이 독특하다. 산신각은 불교와 토착 신앙의 흡습으로 산신을 모신 전각이지만 동축사에서는 노골적으로 사(祠)로 표현하였다. 또한 칠성각도 고성(古聖)으로 표현하여 민속신앙을 불교와 동등 이상의 레벨로 업그레이드시켜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이 즐겁다.

 

 

산신탱과 칠성탱

 

 

 칠성탱과 나반존자

 

 

 관일대 향하는 길목 범종루

 

 

젊은 보살님이 알려준 울산 동면 8경의 하나인 촉산(?)에서 바라보는 절경. 촉산낙조(矗山落照)가 여기쯤일까? 8경은 이제 자취마져 아련하겠지만 현대중공압 산업현장 크레인 위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은 더욱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송림위로 솟아난 바위 위에 솥뚜껑 같은 바위가 하나 더 얹혀 있어 마치 솥에 밥을 짓는 모양같이 생겼다 해서 송급암으로 불리운다. 송급암(松給巖)은 소더방(솥뚜껑 바위)의 이두식 표현이라고 한다.

 

 관일대...부상효채 

 

동축사 뒷편 관일대. 두꺼비 형상이라 섬암(蟾岩)이라 불리는 바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의 아름다움을 앞서간 시인묵객들은 동면 팔경의 하나로 삼았다. 바위 우측에  ‘해뜨는 동쪽바다에 있다는 아름다운 빛을 내는 신성한 나무’

 

 를 의미하는 남목을 다스렸던 감목관 원유영(元有永)이 새긴 ‘부상효채(扶桑曉彩)’라는 글이 남아 있다.

 

울산 동면 8경

 

축암효종(竺岩曉鐘) : 마골산 등성이에 절경을 이룬 관일대(觀日臺)바위 언저리에 다소곳이 숨어있는 동축사에서 새벽예불을 드리기 위해 울리는 종소리를 말한다.

 

옥류춘장(玉流春張) : 옥류춘장은 동축사가 자리잡은 마석산과 쇠평마을을 잇는 동대산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너무 맑고 시원해 옥류(玉流)라 할 만큼 물맛 또한 일품이다

 

섬암상풍(蟾岩霜楓) : 섬암상풍은 마석산 정상에 마치 두꺼비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은 듯 육중한 바위가 있어 이곳에 올라 해뜨는 동해를 바라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경관이다.일찍이 시인묵객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며 이곳을 일컬어 관일대(觀日臺)라고 부른다.

 

만승폭포(萬勝瀑布) : 만승폭포는 현재 미포동 이주민들이 터를 잡고 사는 남목의 서쪽편에 있는 불당골이라 부르는 곳이다.

 

안산망해(案山望海) : 안산망해는 현재 현대여중이 있는 뒷산을 안산이라 불렀고산정에 올라서 미포만을 바라보면 아스라이 들을 가로질러 바라보이는 바다는 가히 절경을 이루었다.

 

낙화백사(落花白沙) : 미포동의 서편 입구에 있었던 낙화암 아래편의 백사장을 가르키는 곳이다

 

유정만선(愉亭晩蟬) : 미루나무의 줄기와 줄기 사이를 가로질러 막대를 걸쳐서 원두막을 짓고 때로는 참새를 쫓기도 하고, 장기를 두거나 수박과 참외서리를 하며 놀다보면 나뭇가지에 붙은 매미들이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순수한 자연만의 환경에서 고요를 훼방놓는 매미소리야말로 자연의 음악이며 자장가였다

 

촉산낙조(矗山落照) : 이 촉산이 그렇게 높이 솟은 산도 아니다. 들녘에 솟은 높은 언덕 정도로 해발 150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수려한 산세와 어울어져 저녁노을이 지는 무렵이면 석양빛에 어린 산자락은 가히 절경으로 바라보인다.

 

 

대부분 잊혀지고 사라진 동면 8경 경승지 보다 신라제일의 무역항이며, 세계로 향하는 전초기지였던 그자리에 위치한  한국근대 경제성장의 요람 현대중공업의 우뚝 선 골리앗 크레인이 아름답고 자랑스러워 보였다면  아전인수격의 해석일까? 그나저나 그시절 동축사 자리는 어디였을까? 

201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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