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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백제유민들의 혼을 달래는 비암사

임병기(선과) 2010. 3. 1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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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암사. 답사를 즐기는 사람에게 필수 코스인 줄 알면서도 참으로 늦게 찾았다. 비암사는 삼국 통일과 점령군인 신라와 당나라, 패망국 백제유민의 삶을 조명할수 있는 귀한 옛님이 발견된 절집이다. 깊은 지식 없이 일천한 글을 올리기는 부끄러워 자료 대부분을 옮겨 왔으니 우리님들 답사길에 도움이 되길 빈다.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전해지는 말로는 중국 한나라 무제 때인 오봉원년(B.C.57)에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1954년에 간행된 『전성지(全城誌)』라는 책에는 박혁거세 즉위년에 세워졌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삼국시대 창건된 사찰로 전하고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남북국시대 초기에 혜명법사(惠明法師)가 창건하였다고도 하나 역시 확실하지 않으며 현장의 안내문, 통일신라말 도선(道詵)국사가 창건 또는 중창한 사찰이라고도 하나 이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제의 북혈사(北穴寺)라고도 하며,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에 의해 건설했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현재 양력 4월 15일에 괘불을 걸고 백제대제를 거행하는데, 이 행사는 약 1,300년간 계속된 것이라 한다. 이는 비암사가 백제의 부흥을 위해 백제 역대 임금과 대신들의 영혼을 위한 천도사찰로서 지어진 백제의 마지막 사찰임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극락보전. 비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다포계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양식의 건축물물로 알려져있다.  막돌허튼층으로 쌓은 자연석 기단, 막돌초석, 두리기둥에는 배흘림이 보인다. 우주는 평주 비해 굵을 것을 사용하였다. 안정감과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구조가 아닐까?

 

 

극락보전의 창호도 재미있는 구성이다. 특히 협칸 창호가 특이하다.

 

"어칸은 쌍여닫이며, 협칸은 중앙 쌍여닫이와 사이에 문설주를 두어 별도로 구획된 외여닫이창으로 만들었고, 또한 하부에는 머름을 들여 쌍여닫이와는 호의 높이를 다르게 구성하였다. 이처럼 중앙에 쌍여닫이를 두고, 양쪽에 문설주로 구획된 외여닫이를 두는 것은 비교적 고식(古式)에 속하는 방식으로 여기에도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불전 건축에서 벗어난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다. 창살은 정자살이다."

 

 

극락보전 소조 아미타불 

 

연기 비암사 영산회괘불탱...문화재청

 

영산회상도는 길이는 863cm, 폭은 486cm 규모이다. 1657년(효종 8) 화원 신겸이 조성하였으며, 17세기 이후의 불화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군도 형식을 띠고 있다. 도상의 내용이 1652년 신겸이 조성한 안심사 괘불과 같으므로 이 불화를 모본으로 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비암사에서는 해마다 4월 15일에 이 불화를 봉안해놓고 백제대제를 거행하고 있다. 2007년 9월 20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으며 비암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복제품(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 기축명 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미륵보살반가석상)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계유명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출처/다음

 

"장방형 평면의 碑像으로 네 모서리에 원주를 새겨 불감형을 만들고 전후좌우 네 면에 불보살상을 새겼다. 상하에 각각 좌대와 옥개가 있었으나 소실되었으며, 하면에 돌출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별도의 좌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정면에는 2중으로 된 커다란 舟形光背를 두고 그 속 중앙에 설법인(說法印)의 아미타불좌상을 새기고, 좌우에 보살입상 각 1구, 그리고 다시 그 바깥으로 인왕입상 각 1구를 새겼다.

 

본존과 보살상, 보살상과 인왕상 사이에는 나한상 1구씩을 얼굴만 새겼다. 아미타불은 커다란 연화대좌 위에, 그리고 보살과 인왕상은 각각 그보다 작은 연화좌 위에 서있다. 이중의 광배에는 화불을 새겼는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화불이 연화좌 위에 앉아 있으며, 바깥 쪽 광배에는 주악상(奏樂像)이 각종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다시 광배 바깥 상단 모서리에는 인동문과 함께 비천(飛天)이 있다. 비천은 한 손에 천궁(天宮)을 들고 있으며, 천궁은 1간의 건물로 치미가 있는 우진각지붕의 형상이다. 아미타불의 대좌 좌우에는 사자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그 아래 커다란 복련의 연화좌를 두어 화면 전체를 받치고 있다. 양 측면에는 동일한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상하 두 단으로 화면을 나누어 각 2구씩의 낙천좌상(樂天坐像)이 연화좌 위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화면의 맨 아래에는 용두(龍頭)를 새겼다.


후면은 횡으로 3개의 구획선을 두어 화면을 4단으로 등분하였다. 각 단마다 5구, 총 20구의 좌상을 조각했다. 좌상은 모두 동일한 형태로 연화좌 위에 앉아있으며, 보주형 두광을 지니고 있다. 각 상(像)의 사이에는 상의 오른 쪽 상부에 1행(行)으로 관직명(官職名)과 인명(人名)을 새겼다. 석상의 조성을 발원한 향도(香徒) 중 중요한 인물 20명의 승속(僧俗)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은 전후좌우 네 면에 모두 해서로 새겨져 있다.


전면에는 하단에 각 行 4자씩 총 14행을 새겼다.


'全氏□□/述況□□/二號□□/同心敬造/阿彌陀佛/像觀音大/世至像□/道□□□/上爲□□/願敬□□/佛像□□/此石佛像/內外□□/十六□□'
 

좌우측면에는 좌우의 낙천좌상 사이에 2행으로 기명을 새겼다. 좌측면의 것은 缺字가 다수이며, 우측면의 것은 다음과 같다.


“癸酉年四月□□號□□道□□敬□□□□□□師□□□□□□乃末十人智識共國王大□/
七世父母含靈發願敬造寺知識銘記“


후면에는 인명과 신라의 관등인 乃末과 大舍, 惠明法師, 惠信師 등의 僧俗名이 보인다.명문은 全氏 일가의 발원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碑像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의 유력자인 全氏가 발원하여 이룩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완수 선생의 설명을 들어보자.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에 비암사(碑巖寺)라는 절이 있다. 1960년 9월10일 황수영 선생은 이 절에서 사방에 불보살이 새겨진 불비상(佛碑像) 3개를 확인하고, 이를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에 보고하여 국보로 지정케 한 다음 학계에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중 두 개의 불비상에는 연대가 기록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그 조성 연대와 조성 발원자 및 불보상의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면에 아미타삼존상이 새겨진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碑像)>이다. 현재 국보 106호로 지정된 이 불비상은 마멸이 심하여 명문의 전문 판독은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나 2단으로 이루어진 앞면 아래 테부터 새기기 시작하여 양쪽 측면의 화면 여백에 가득 새겨 놓은 명문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글자만 가지고 파악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전(全)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상과 관세음, 대세지 보살상을 석불로 삼가 조성한다. 계유년 4월15일에 내말(乃末) 전씨, 달솔(達率) 진차원(眞次願), 진무(眞武) 대사(大舍), 목(木)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과 7세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

 

이 명문 내용을 분석하면 우선 불비상의 주체가 아미타삼존상이라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협시로 하는 삼존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성 발원의 중심 인물은 내말 벼슬에 있는 전씨였고, 동심(同心) 발원자는 달솔 진차원, 대사 진무, 대사 목씨 등이라 하였다.

 

전씨(全氏)는 읽을 수 있는 글자 중에서 3자나 발견되어 이 불비상 조성의 주체가 전씨였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내말이라는 벼슬 이름은 신라의 관직이다. 대사 역시 신라 벼슬이다. 이로 보아 신라의 벼슬아치들이 이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겠는데, 그중에 달솔이라는 백제의 벼슬 이름이 나와 잠시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은 ‘삼국사기’ 권40 잡지(雜志) 제9의 백제인 직위 조의 내용으로 명쾌하게 해결된다. 그 내용을 옮겨보자.

 

“문무왕 13년(673)에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내외 관직을 주었는데 그 위차(位次, 지위의 차례)는 본국에 있을 때의 벼슬에 견주었다. 서울 벼슬 대내마(大奈麻, 신라 17관등 중 제10위)는 본래 달솔(達率, 백제 16관등 중 제2위), 내마(奈麻, 신라 17관등 중 제11위)는 본래 은솔(恩率, 백제 16관등 중 제3위), 대사(大舍, 신라 17관등 중 제12위)는 본래 덕솔(德率, 백제 16관등 중 제4위)이다.”

 

이로 보면 내마 전씨는 본래 백제의 제3위에 해당하는 은솔 벼슬에 있던 백제 고관이었음을 알 수 있고, 진차원은 백제 제2위의 벼슬인 달솔의 지위에 있었고, 진무와 목씨는 백제 제4위 관등인 덕솔의 지위에 있어 모두 백제의 상층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가 포용정책을 펴면서 이들의 지위를 인정할 때 위와 같이 그 지위를 원래의 반 이하로 강등했으니 이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7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당나라 점령군의 주둔과 간섭을 청산하지 못했던 큰 원인이 이렇게 속좁은 승자의 우월주의로 백제와 고구려 유민 위에 군림하려 한 데 있지 않았나 한다. 그 이후 삼국 지역의 지방색이 서로 대립적인 양상을 띠며 계승되는 것도 원인을 따지자면 신라의 옹색한 통일방식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나라 주둔군과 신라군 양쪽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 했던 백제 유민들은 문무왕의 서찰을 받고 설인귀의 대군이 회군해 가자 이제는 복국(復國, 나라를 되찾음)의 희망을 버리고 불만스럽지만 신라의 회유책에 순응해가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문무왕 13년(673) 계유년에 백제 지배층에게 강등된 지위로 신라 벼슬을 내릴 때 이들은 그 벼슬을 그대로 수용하였던 듯, 바로 그 계유년(673) 4월15일에 이 불비상을 조성해 세우면서 강등된 신라 벼슬을 그대로 써놓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달솔 진차원만은 백제 벼슬을 고집하고 신라 벼슬을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 동참 발원한 인물들의 성씨도 전씨를 비롯해서 진(眞)씨, 목(木)씨 등 백제 최상층 지배 씨족의 성씨들이다. 진씨는 태안반도와 삽교천 유역인 내포 일대를 장악하고 해상활동을 주도하던 씨족이었고, 전씨는 온양과 천안 일대의 곡교천 유역을 세력 기반으로 삼던 지배 씨족이었다.

 

이로 보면 이들은 내포를 중심으로 한 태안반도 일대에서 부여 복신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다가 끝내 실패하자 이곳 전의로 밀려온 백제 유민들인 듯하다. 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은 이곳이 전씨들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온양과 천안, 목천에서 공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데다 증산(甑山)산성, 운주산(雲住山) 남북산성, 고산(高山)산성 등이 에워싸 외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의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이 비암치(碑岩峙)다. 그래서 그 길목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비암사를 세우고 그 절에 아미타삼존상을 새겨 놓은 불비상을 조성하여 봉안했던 것이다. 백제 부흥운동중에 전사한 무수한 생명들이 극락국토에 왕생할 것을 기원하고 그 동안에 돌아간 의자왕과 풍왕, 복신 등 국왕대신들의 영가도 극락에 왕생할 것을 빌며, 자신들의 일가 친척과 돌아간 선조들의 극락왕생도 아울러 기원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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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축명 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출처/다음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佛諸佛菩薩石像)은 전체 높이 56.9㎝로서, 비암사에서 발견된 3점의 비상(碑像) 가운데 가장 큰 석상인데, 다른 두 점과는 달리 위로 올라가면서 두께가 얇아지고 있다. 전체 형태는 마치 주형(舟形) 광배처럼 생겼는데, 4면 중 앞면에만 조각이 있고 뒷면에는 4줄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석상 역시 여러 불보살상을 전면 가득히 조각하였는데,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 설하고 있는 극락세계를 구현하려는 듯 보다 도상적(圖像的)으로 구성되어 마치 변상도(變相圖)와도 같다는 느낌을 준다. 석상 하단에는 단판(單瓣)의 연화좌가 돌려져 있고, 그 위에 난간과 계단, 다시 그 위에 연못이 있는데, 연못은 파상문(波狀紋)으로 수면을 표현했다.

 

그리고 난간 좌우에는 사자(獅子)가 마주보고 있고 보계(寶琦) 좌우에는 연꽃 위에서 합장하는 화생(化生)을 새겼다. 연못 중앙에는 연꽃이 솟아났는데 그 위 가지가 갈라진 곳 중앙에 본존이 앉아 있다. 중앙의 좌상은 비교적 크게 조성되었는데, 불의는 통견(通肩)이며 육계(肉琦)가 있고 가슴에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본존 좌우의 보살상은 보관을 썼고 장엄구가 세밀하게 조각되었으며, 본존과 보살상 사이에 상반신만 표현된 나한상(羅漢像) 1구씩이 있다. 불보살상 위로는 연화좌 위에 앉은 5위의 화불(化佛)이 있고, 다시 그 위로는 주연(周緣)을 따라서 불좌상 7위가 있다. 그리고 이 불상들 사이에는 나무의 가지와 잎 등이 표현되었으며, 연주(聯珠)와 영락(瓔珞)이 역시 장엄하게 장식되었다.

 

뒷면에는 '己丑年二月十五日 此爲七世父母及□□□阿彌陀佛諸佛菩薩像敬造'의 명문이 있어, 제작시기를 통일신라 직후인 689년(신문왕 9)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367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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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반가석상...출처/다음

 

"상부를 비석의 이수처럼 넓게 만들었다. 정면은 양측에 원주를 새긴 감실형으로 만들고 그 중앙에 방형의 좌대 위에 앉은 사유형(思惟形)의 미륵보살반가상을 조각했다. 원주 상부에는 주두가 간략히 표현되어 있으며, 화엽경형(蓮葉莖形)의 천개(天蓋)를 이루도록 했다. 미륵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목걸이와 두광 등의 장엄구를 갖추고 있다. 하면에는 향로를 중심으로 앉은 자세의 공양상이 마주보고 있다.

 

양 측면은 제형(梯形)을 이루며, 각 1구씩의 보살입상이 양 손으로 보주(寶珠)를 받들고 정면을 향하고 있다. 정면의 반가상을 주존으로 한 3존 형식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아래는 방형의 구획 안에 공양자 좌상을 새겼다. 후면은 원만한 곡면에 보탑(寶塔) 1개를 가득히 천각(淺刻)했다. 보탑은 두 단의 기단 위에 타원형 탑신을 올려놓은 모습이며, 탑신 위에는 평판을 놓아 대소 3柱의 상륜을 장식하였다. 미래불로서의 미륵보살의 표상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간송박물관 최완수 선생의 설명을 들어보자

 

비암사에서 발견된 3개의 불비상 중에는 <미륵보살사유반가비상(彌勒菩薩思惟半跏碑像)>도 있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비상>과 <기축명 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보물 367호)이 모두 아미타불상이라는 명호와 조성 연대 및 조성자를 밝힌 명문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 <미륵보살사유반가비상>(보물 368호)은 어떤 명문도 새겨져 있지 않고 그 규모도 가장 작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당시 신앙 형태를 짐작케 해주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니, 백제 유민들은 아직까지도 무왕(武王, 580년 경∼641년)과 같은 미륵보살이 백제 땅에 다시 내려와 신라와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미륵 불국토를 재건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신라적인 의중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규모도 작게 하고 명문도 새기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만드는 정성만은 가장 절실하고 간절했을 듯하다.

 

그래서 비첨(碑; 비석의 처마, 즉 비석 덮개)과 비좌(碑座; 비석의 좌대)를 한 돌에 새기는 완벽성을 과시하면서, 비신(碑身; 비석의 몸돌) 정면에 미륵보살사유반가상 1구를 단독으로 돋을새김해 놓는 과감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미륵반가상 양식은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사유반가상>에서 <방형대좌금동미륵보살사유반가상(方形臺座金銅彌勒菩薩思惟半跏像)>으로 이어지는 양식 기법을 보이고 있다.

 

 

대웅전 근자에 세운듯 하다.

 

 

비암사 극락보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 1982년에 다른 곳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기단은 복원되었으며 갑석은 본래부재이다. 1층 몸돌에 비해 2.3층 몸돌 체감이 심하다.1층에서 3층까지의 몸돌에는 우주만 보이고 다른 조식은 없다. 옥개석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옥개석 하부는 직선, 추녀 반전은 완만하다. 옥개석 상부에는 윗층 탑신괴임 두 단을 설치하였다. 상륜부는 노반만 본디 부재로 보인다.


신라계 유형의 탑으로  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 이 탑 꼭대기에서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제106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보물 제367호), 미륵반가사유석상(보물 제368호)을 발견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입구 개울 건너 부도

 

좌측부도 청한당성정탑(淸閑堂性淨塔)에는 “강희갑오입탑(康熙甲午立塔)”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강희갑오년은 1714년(숙종40년)이다. 두 개의 부도 중 남쪽에 위치한 것은 탑신에 '淸閑堂性淨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부도의 주인과 부도의 이름을 알 수 있다. 화강석을 이용하여 비교적 잘 치석되어 있으며, 지대석과 하대석, 탑신, 그리고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부도는 비암사 극락보전과 괘불탱의 편년을 추측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겠다.

 

우측 부도. 탑신은 기본적으로 종형(鐘形)인데, 가운데 부분에 비해 위와 아래의 직경을 작게 한 배흘림이 보이며 치석 수법이 매우 소박하다. 중앙부에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면에 두 마리의 동물이 기어오르고 있다.

 

 세호?

 

극락전 앞마당의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안내문에는 "흉년에는 잎이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해 위쪽으로 올라가고, 풍년에는 위에서 피기 시작해 아래쪽으로 내려간다"고 설명하였다. 비암사의 사적을 함께 품고 있는 수령 810여년의 어르신이다. 4월 15일 백제대제에 꼭 참석하고 싶은데, 하루 이틀전에 근처에 머물건만 인연은 다음에 지어야겠다.

2010.02.07 

 

한국전통사찰정보, 문화재청, 신동아 글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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