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특별자치시/세종특별자치시

연기...대곡리 석탑.장승

임병기(선과) 2010. 3. 1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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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군 소종면 대곡리 대사동 즉 한절골. 이름으로 미루어 옛적에 큰가람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진은 한절골 마을 앞 洞藪(마을 숲)와 장승, 석탑이다. 마을에 작은 골짜기는 많으나 전체적 형태로 볼 때 수구를 막는 산이 없어 동구가 서북상으로 훤히 트여 수구막이를 해야 마을 주민이 번성한다고 하여 비보책으로 동구에 숲을 조성하고 성황당 산을 숭봉하게 되었고 장승도 만들어 세우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절골의 장승제는 전국에서 알려진 장승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연도 하였다고 한다. 장승을 새로 깍아 세우고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장승제는 음력 윤년 정월 14일에 성황당제와 더불어 성대하게 모시고 마을의 번영과 안녕, 사악한 기운을 퇴출을 기원하였다. 마을 제의가 아니라도 동구의 장승과 성황당은 주민 개개인의 기도처였으며 무병장수, 기자, 다산과 풍요을 내리는 영험한 신앙처였다. 한절골 장승은 나무장승으로 남장승은 사모를 쓰고 여장승은 족두리와 곤지를 찍었다.

 

 

한절골 마을 장승제와 관련 자료를 "사이버 충효체험관"에서 옮겨오니 답사시 참고하길 바란다.

 

연기 대곡리 장승제>는 충청남도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 마을에 전승되는 <서낭굿>이다. 대곡리(대사동) 마을은 천안 삼거리에서 대전, 공주와 전라도 방면으로 통하는 국도 1호선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연기군에 속하지만 천안에서 약 10km지점 소정삼거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1.5km 위치한 산골마을이다.대곡리 마을은 지금부터 약 4백년 전인 조선 중엽 이조판서, 대제학이던 박충원(호는 낙촌, 시호는 문경)의 장손부와 정경부인 창원황씨 묘소를 이곳에 안치하고, 둘째 아들인 연안도호부사공이 가족을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마을이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작은 골짜기는 많으나 지세가 서북쪽을 향하며 전체로 볼 때 수구를 막는 산이 없어 수구막이를 해야 마을이 번성한다고 하여 마을 입구에 숲을 조성하고 서낭신을 모시고 장승을 만들어 세웠으며, 마을에 해로운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장승도 만들어 세웠다. 그 뒤로 설과 정월 대보름 사이에 마을사람들은 <서낭제>를 지내왔으며, 윤년의 정월 열흘에는 규모가 큰 <장승제>를 지내왔다보통 서낭당 축원은 가정에 따라 음력 정초마다 개별로 치성을 드리고 수시로 축원을 올렸다.또마을에 이상한 일이 있거나 집안에 걱정거리가 생기면 조용한 저녁에 술과 떡, 돈을 놓고 정성껏 빌면 영험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곳을 지나던 사람이 돈과 떡을 얻으면 그 사람 또한 영험한 재수를 얻는다고 기뻐했다.마을 사람 모두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음 속으로 뜻하는 일이 성사되기를 기원했고 마을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도 감사를 드렸다이들 제의는 일제침략기와 군사정권 시절 미신타파 대상으로 수난을 당하면서도 주민들 사이에서 명맥을 이어왔다. 지금도 마을의 수호신으로 많은 영험을 보여주며 주민의 애환을 달래준 장승이 마을 초입을 지키고 마을의 안녕을 살핀다.

 

<장승제>를 올리는 제관과 축관, 공양주는 해마다 정초에 마을회의에서 생기복덕이 닿는 사람 세 명을 뽑는다.뽑힌 이들은 제일 이레 전부터 대문 양쪽에 황토 세 무더기씩 가지런히 놓고 금줄을 매고 날마다 냉수로 목욕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외지 출입은 물론 부정한 행위를 하지도 말고 보고 듣지도 말아야 하며, 부부 동침도 금하고 근신하여야 한다또한 마을 사람들도 외지 출입을 삼가며 마을 안에서는 사냥, 가축도살, 물고기잡이와 같은 살상행위를 금하고 마을 앞으로 상여도 통과시키지 않으며 부정한 외지인 출입을 막는다.만약 제일에 임박하여 마을 안에 상고 등 불상사가 발생하면 다음달로 연기하여 거행한다.

 

정월 열나흗날에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숲속에서 동쪽을 향해 자란 소나무를 베어 와 부정이 없고 부정한 말과 부정한 것을 보지 않은 사람을 골라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의 두 장승을 지상 6척 지하2척 정도 되게 만든다 천하대장군은 사모를 씌우고 부리부리한 눈, 치켜올린 눈꼬리, 이가 드러난 입, 콧수염과 턱수염까지 그린다. 귀는 눈꼬리부터 턱까지 삼자형으로 만들어 붙인다.

 

지하대장군은 한결 부드러운 얼굴 형상을 하게 하는데 이마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입술에는 븕은 칠을 한다. 필력있는 사람이 붓글씨를 쓰고 상을 그린다. 거의 준비를 끝낼 무렵 풍물을 치며 분위기를 복돋운다 장승이 완성되면 제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세운다. 그리고 기러기 솟대 한 쌍도 함께 다듬고 조각하여 세운다. 천하대장군은 마을 입구 오른쪽에, 지하대장군은 왼쪽에 세우고 솟대와 솟대사이를 새끼줄로 칸칸에 넣고 꽂는다.

 

해가 질 무렵 마을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서낭당 제단에 제수를 차려 놓고 순서를 따라 서낭굿 의식을 거행한다. 얇은 종이를 태우는 소지를 올리면서 개인의 소원을 빈다.

 

 

한절골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이 곳 옛절에는 승려가 만명 이상이 주석한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폐사지와 초석이 남아 있었으며, 석탑 추녀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큰 석탑이 세워져 있었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그런 옛영화를 품은 작은 삼층탑이 마을숲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 시도가 있었으며 부산에서 회수하였다고 전해온다.

 

 

석탑은 방형 지대석, 시멘트로 복원한 기단면석, 위에 복련이 희미하게 남은 갑석이 있다.을 찾을 수 있으며, 1층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겼다. 1층 옥개석과 2층 탑신, 2층 옥개석과 3층 탑신, 3층 옥개석과 상륜의 노반은 한 개 돌이다. 옥개석 층급 받침은 3개이며, 추녀는 약간 반전되었다. 위로 올라갈 수록 완만한 체감을 보인다. 상륜부는 파손되어 노반과 보주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며 조선시대 탑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둘 급속히 잊혀져가는 장승제가  보고싶다.

 

아~~ 우리나라에 거행되는 장승제. 동제 언제쯤 한 번 볼 수 있을런지...

 

201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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