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특별자치시/세종특별자치시

연기...송룡리 마애불

임병기(선과) 2010. 3. 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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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군 동면 송룡리(松龍里). ‘솔올마을’로도 불리던 송룡리는 결성장씨(結城張氏)의 종족마을이며 화가 장욱진의 안태고향이다. 마애불은 내판리 철도와 연접한 얕은 구릉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는 도로가 개설되어 흔적 조차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불가령 즉 절이 있었던 고갯마루였음을 알 수 있다.

 

내판 지역에 있었다고 알려진 마애불은 문화재자료 제43호이다. 모든 자료에 마애불로 기록되어 있지만, 오히려 거신주형 광배 모습의 하나의 돌에 새긴 석불 입상으로 보인다. 하부가 매몰되어 더욱 그런 느낌이다. 왜 마애불로 명명되었을까?

 

 

주형광배형 화강암에 돋을 새김된 석불로 소발에 육계가 보이지만, 오른쪽 눈 윗부분이 결실되었다. 눈, 코, 입의 윤곽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법의는 통견으로 양쪽 어깨로 부터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쪽, 왼손은 오른손보다 약간 아래에 있다. 일부 자료에는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아미타 수인의 아미타 여래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석불로 알려져 있다.

 

 

좌측의 뒷부분이 약간 파손되었는데 1880년경 큰 뱀이 올라 앉아 있는 것을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때려 뱀을 죽이면서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떨어져 나간 파편은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열녀 장응헌의 처 숙인 언양김씨 정려

 

 

마애불 위 보호각의 언양김씨 정려. 아래 자료는 연기군청 홈에서 가져왔다.

 

장응헌(호조좌랑.승훈랑 )의 처 언양 김씨는김씨는 정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남편에게 공대하고 대소 모든 절차에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우연히 시아버지가 병을 얻었는데, 며느리가 지성으로 달여 드리는 시탕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끝내는 기력을 잃고 자리에 누운 채 거동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상투속의 머리는 오랫동안 빗질을 못하여 보리알만한 이가 득실거려 병석의 노인을 더욱 괴롭혔다. 이때 김씨는 자기의 머리에 참기름을 듬뿍 바르고 80고령의 시아버님 옆에서 머리를 맞대고 밤낮을 보내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은 이들이 김씨의 머리로 옮겨오게 하여 시아버지의 머리에 있는 이들을 없앴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씨는 83살 된 늙은 시아버지와 어린 아이들을 거느리고 피난을 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 이때 김씨는 “늙고 병든 시아버님과 두 자식들을 무사하고 안전하게 피난시키되 만약에 온 가족이 모두 무사하지 못하게 되면 두 자식은 버리더라도 꼭 시아버님만은 편안하게 모셔야 합니다.” 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하면서 가족들을 뒷문으로 피신하게 하고 자신은 앞문으로 나아갔다.

 

이에 오랑캐들은 젊은 김씨의 미모에 매혹되어 다른 가족은 쫓지 않고 김씨만을 따르니 다른 가족들은 무사히 난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계속 강가로 달아나다가 드디어 오랑캐에게 잡히게 되자 두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오랑캐들을 꾸짖고는 황단이 나루(진목나루,주목나루 라고도 불림. 지금의 연기군 동면 예양리 북쪽 미호천 중류)의 푸르고 깊은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하니 강산이 모두 김씨의 열행에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

 

이를 본 청나라장수가 그녀의 정절을 의롭게 생각하여 시신을 거두어 묘를 쓰고 표목을 세워주고 돌아갔으며, 이후에 다시 쳐들어온 청의 군사들도 그 표목의 글씨를 보고 그 마을에는 침입하지 않아 온 마을 사람들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다. 전란이 끝나자 남편 장응헌은 의식을 갖추어 부인의 장례를 다시 잘 지내 주었다고 기록되어있다. 

 

201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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