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남해군

남해.. 호구산 용문사

임병기(선과) 2010. 1. 1.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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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고교 1 때 남해 바닷가 이동면 용소에서 멀리 대구까지 유학 온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해 여름방학을 이용 1주일을 용소에서 지내면서 난생 처음 접했던 섬마을 풍경과 살갑던 친구 가족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용소리에서 개울길을 따라 올라갔던 그 길이 이제는 넓게 포장되어 추억마져 묻혀버린 듯하다.

 

일주문 못 미쳐 이단으로 석축을 쌓은 부도전이 낮은 돌담 안에 가을빛을 즐기고 있다. 정확한 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도들이다.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가 많으며 화방사 부도 처럼 상대에 복련을 조각한 부도가  여러기 눈에 들어온다. 다른 지역에서는 드문 남해의 토착화된 형식으로 보이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표현이다.

 

 

 일주문

 

철원 심원사, 고창 선운사와 더불어 3대 지장도량으로 알려진 용문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금산에 창건한 보광사가 이건해왔다고 전하며, 당시 보광사에는 첨성각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 1660년(현종 1) 남해현의 남해 향교와 용문사 입구가 마주하고 있다 하여 유생들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백월(白月) 스님이 남쪽에 있는 용소마을 위에 터를 잡고 용문사라 하였다.

 

1661년(현종 2) 신운이 탐진당, 상운이 적묵당,1666년 대웅전과 봉서루를 새로 지었다. 뒤에도 명부전, 나한전, 향적전, 천왕각 등을 지었다. 그리고 1708년(숙종 34)에 염불암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든 승려들이 의승군 되어 왜병과 싸웠고, 숙종 때에는 이 절을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고 왕실의 축원당(祝願堂)을 세웠다고 한다.

 

호구산 용문사 편액은 동국진체의 완성자 원교 이광사의 제자 창암 이삼만의 필체라고 한다. 스승 원교가 해남 대흥사 편액으로 제주로 귀양가는 추사에게 악평을 당했듯이 호남에서 서예로 일가를 이루고 있던 창암도 기개가 넘치던 추사에게 혹평을 당했다고 알려진 서예가이다.(후에 추사는 해배되어 환도길에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사찰 목장승

 

역할 그역할을 다하고 은퇴하여 옛날을 회상하며 천왕 다리 옆 전각속에 모셔진 용문사 사찰벅수가 손을 내민다. 사악한 무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건만 세월 앞에 고개 숙이고, 한 시절 을 풍미했던 함양 벽송사 장승처럼 전각속에 보호되고 있다.  기왕 보호각을 세울려면 일주문 밖이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찰 장승은  벽사와 더불어 사찰의 경계를 구분하는 상징으로 일주문 밖이 제위치이기 때문이다.

 

 

천왕교를 건너면  조선 숙종 28년(1702) 처음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천왕문이 위치한다. 목조 사천왕은 동방 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북방 다문천왕으로 전각 좌우에 시립해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착용하였는데, 양쪽 어깨에서 발 아래까지 천의자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용문사 사천왕상은 가장 일반적인 배치로 좌측에 지국천을 중심으로  비파,  증장천은 보검, 시계방향으로 광목천은 용과 여의주, 북방은 삼지창을 지물로 들고 있다. 다른 사찰  지국천왕과 달리 비파를 손에 잡지 않고 무릎에 내려 놓은 구성도 재미 있다.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북방 다문천왕

 

무엇보다도 용문사 사천왕상이 주목받는 까닭은 목조 사천왕이 사천왕은 잡신을 밟고 있는 생령좌가 아니라 양반으로 보이는 인물을  밟고 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거의 유례가 없는 독특한 배치로 다양한 억측을 낳게 한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민초들의 편인 용문사 정신의 발로라는 해석도 있지만, 최하층 계급으로 대우받던 승려와 수탈과 핍박을 가했던 양반층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억불정책의 완화, 계급, 유교 질서, 권위가 무너진 조선 후기 이후에 조성된 생령좌로 절집을 찾는 민초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해학적인 표현은 아니었을까?

 

 

범종루 옆에 자리한 봉서루. 산지중정 가람의 누하 진입이 가능한 산지가람의 전형이다. 봉서루는 대구 동화사 처럼 봉황이 둥지를 튼 루대의 의미와 달리 용문사에 보관중인  ‘호구산용문사봉서루병서(虎丘山龍門寺鳳棲樓序)’에는 전각의 내력이 전해온다고 한다.

 

봉서루 현판은 1720년에 썼는데, 용문사는 1720년 이전 여러 차례 불이 나 전각이 전소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결국 스님들은 그 이유를 용문사의 풍수지리형국에 기인 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호거산 호랑이며, 용문사는 용이 들어선 절이기에 용호상박의 한 치 양보없는 형국으로  기운이 강해  화재가 빈번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용과 호랑이의 성정을 다스려 기를 누르려는 비보책으로 봉황을 설정하여 누각 이름을 봉서루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조성한 석주 아래에는 대형 목조 구시가 있다. 통나무 가운데를 파서 만든 구유형태의 구시는 임진왜란 때 대중들이 공양을 할 수 있도록 밥을 담아 두던 일종의 그릇으로 용문사의 사세와 승병의 규모를 대변하고 있다. 

 

 

 목조 구시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5호 용문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이다. 막돌 허튼층으로 쌓은 기단. 정.측면 3칸,  겹처마, 칸사이에 2구씩 공포를 배치한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처마에는 활주를 받쳤고 기둥에는 배흘림이 보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용문사 대웅전에는 지방장인의 솜씨 같지 않은 용조각이 많다.  절이름과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구성으로도 판단된다. 하지만 그런 사유보다는  임진왜란(1592) 때  승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절이라 하여 숙종 때 왕실의 보호를 받은 사찰임을 고려하면 왕실에 속한 도편수 작품으로도 여겨진다. 

대웅전 중정에는 야회 법회용 불화를 걸었던 2조 가 한 쌍인 괘불대와  야간 행사에 불을 밝혔던 노주석이 남아 있어 과거 용문사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노주석

삼존불

 

대웅전에 봉안된 금동 삼존불좌상은 석가여래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생각했는데 답사기를 준비하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대웅전 전각과는 다르게 아미타 수인의 아미타불과 관음. 대세지 보살로 보인다. 아미타불은  나발,  목에는 삼도가 있고, 어깨는 둥글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통견이며 조선 후기 다른 보살상에서 보이는 나비매듭이 아닌 평범한 매듭의 승각기도 보인다.  협시불은 관음과 대세지로 보이지만 정확하게 살피지를 못했다.  전체적인 크기 및 보관의 형태 등에서 서로 비슷하며  17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영산회상도

 

대웅전 후불탱은 영산회상도이다. 그림 하단에 있는 화기(畵記)를 통해 1897년(광무 1)에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의 구도는 화면 중앙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 보현, 미륵, 제화갈라, 관음, 지장의 6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사금강(四金剛) 등의 대중들을 3단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렇지만 석가여래를 화면의 반 이상 되게 커다랗게 표현하고 나머지 대중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나타내었다. 그리고 인물과 인물 사이에 서운(瑞雲)을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 자연스럽게 경계를 짓도록 하고 있으며, 바탕에 채색된 청색과의 대비로 마치 허공에 떠 있다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다. 각각의 인물 표현은 대체로 풍만한 모습이며, 음영(陰影)표현이 두드러진다. 또한 사천왕의 터럭과 같은 아주 세밀한 부분의 표현이 눈에 띤다.

 

전체적인 채색은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특징대로 적색과 녹색을 주로 하여 청색, 황토색, 백색 등이 주로 배색되었다. 그림을 그린 화원(畵員)은 근대에 있어서 호남과 영남에서 주로 활동한 대표적 인물인 문성(文性)이 출초(出草)하였고, 그밖에 연호 봉선(蓮湖奉宣), 서암 체린(瑞庵體?), 연파 화인(蓮波華印), 범해 두안(帆海斗岸), 장원(章元), 태일(太一), 문형(文炯), 영주(永柱), 상조(尙祚), 긍엽(亘燁), 성일(性一), 경수(敬秀), 경(徑律) 등이 참여하였다.

 

 

 

신장탱. 대웅전 후불탱과 마찬가지로 1897년에 그린 것으로 조성에 참여한 화원들도 문형(文泂)이 출초(出草), 곧 밑그림을 그리고 서암 예린 등이 공동작업 하였는 등 대체로 비슷한 인물들이다. 구도를 보면 하단에 무장(武裝)을 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12신이 배치되었고,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동·천녀가 협시하고 있다.

 

 

 

삼장탱. 삼장탱(三藏幀)은 그림의 중앙에 천장(天藏)보살을 놓고 그 좌우에 지지(持地)보살과 지장보살을 각각 배치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불화로 알려져 있다. 삼장탱의 연원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대체로 지장보살 신앙이 보다 확대되고 널리 유행하면서 발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용문사 삼장탱의 구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 보살을 화면의 상단에 중심되게 커다랗게 그리고, 보살의 주위와 하단에 여러 신중과 권속(眷屬)이 표현되었다. 권속이라는 것은 시자(侍者)의 일종으로 보아도 좋은데, 특정한 불보살에 각각 소속되어 표현되기 마련이다.

 

이 그림에서 본다면 지장보살의 권속은 도명존자 및 무독귀왕, 명부계의 대중들이다. 지지보살은 용수(龍樹)보살과 다라니(陀羅尼)보살, 그리고 천장보살은 진주(眞珠)보살과 대진주(大眞珠)보살을 각각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림의 하단에 배치된 팔금강과 같은 신중들은 대부분 지지보살의 권속들이다. 인물 표현이 얼굴을 갸름하게 나타내고 음영법이 보이는 등 대웅전 영산회상도와  비슷한 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린 금어는 출초(出草)한 문성을 비롯하여 연호 봉선 등이 참여하였다.

 

출처..문화재청

 

괘불탱. 본존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만을 배치시켜 삼존도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중앙의 본존불상을 위시하여 좌측(向右)에는 정면을 향한 채 똑바로 서서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 보살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向左)에는 좌협시보살상과 동일한 자세로 서서 연꽃가지를 받쳐 든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본존불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오른손을 길게 내려뜨리고 왼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린 채 두 발을 좌·우로 벌려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으로, 둥글넓적해진 형태에 눈·코·입이 작게 묘사되고 미소가 잘 보이지 않는 경직된 표정의 얼굴은 수평으로 들어올려 각이 진 어깨와 더불어 18세기 후반 이후 불화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 특징이다.

좌협시보살상은 보관을 쓰고서 여의를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석가모니불의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이라 추정된다. 머리 크기에 비하여 어깨가 좁아지고 작아진 발로 인하여 위축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팔에 걸쳐 흘러내린 길고 굵은 천의자락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우협시보살상 또한 좌협시보살상과 표현이 유사하다. 그림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이 괘불탱은 인물의 형태 및 표정, 신체 비례 등에 있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의 전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듯 조화롭고 세련된 표현기법을 보여주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 연구의 자료적 가치가 크다.

 

위에 기술한  탱화 설명은 문화재청과 한국전통사찰정보에서 가져 왔다.  그외에도 용문사에는 산신탱,독성탱, 칠성탱 등의 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를 모시고 있지만 살펴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용문사 괘불도 해남 미황사 괘불처럼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이 괘불을 걸고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용화전에 봉안된 미륵보살.  약 300년 전에 경내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보관을 착용한 방형의 얼굴, 코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눈과 입,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법의는 긴 상체에  흘러 내린 통견이다. 오른손은 가슴에 두고 왼손에는 병을 들고 있다. 불신은 호분으로 채색되어 있다.

 

 

약병으로 보면 약사여래불로 보이지만 보관으로 미루어 보살임에 분명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정병이 지물인 경우는 거의 대부분 관음보살이나,  중국 석불에서는 미륵불이 정병을 지물로 들고 있는 사례가 전해오고 있지만 용문사 용화전 보살을 미륵보살로 확신하는 이유가 무척 궁금하다.

 

단체로 움직여야 하는 문학기행 특성상 용문사에서 오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서너 차례 다녀왔지만 보고 싶었던 탱화와 임진왜란 관련 유품과 인연 짓지 못했고, 암자 기행도 하지 못했다. 또다시 발걸음 하라는 뜻으로 받아드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산문을 내려 왔다. 마지막으로 고두현 시인의 시 '늦게 온 소포'를 음미하며  '고두현 시인과 함께 떠나는 남해 문학기행'에 동참한 모든 분과 인사를 나누어야 겠다.

 

늦게 온 소포...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일행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지족 바닷가.

 

200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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