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남해군

남해...망운산 화방사

임병기(선과) 2009. 12. 23.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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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남해 방문길에도 인연을 짓지 못했던 화방사였다. 금산 보리암. 호구산 용문사와 더불어 남해 3대 사찰로 전해지는 화방사는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창건하였으며,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이 연죽사를 현 위치의 서남쪽 400m에 옮기고 영장사(靈藏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영장사는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과 영철 두 선사가 현위치  풍수형국이 ‘연화형국’이어서 절 이름을 화방사로 지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근자에 조성한 일주문이지만 현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현판은 여초 김응현 (1927~2007)의 글씨로 그는 소전 손재형(1903~1981), 검여 유희강(1911~1976),  형 일중 김충현 (1921~2006) 선생과 함께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힌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현판,김천 직지사 영남제일문 현판 등 많은 글씨가 사찰에 남아 있다.

 

주차장에서 돌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두 기의 석등과  일주문은 어울리지 않은 구성이지만 일주문 건너 돌계단이 정겹게 다가온다. 사바의 번뇌를 끊고 걸음걸음 계단을 지나 빈 마음으로 대웅전 부처님께 참배하라는 암시이리라.  

 

 

그 길에 조선조 화방사 사격을 보여주는 이름 없는 석종형 부도가 슬며시 나타난다. 어느 고승의 부도인지 알려주는 것마져 사치였을까?  정방형 지대석 위에 석종형 탑신과 반원의 보주로 간결한하지만  탑신 상대를 소박하게 연꽃으로 장식한 부도이다.  

 

 

새로히 조성된 돌다리에서 바라본 채진루와 범종각.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2호인 채진루는 인조 16년(1638) 계원대사가 지었으나  임진왜란 소실되어 복원하였다.전면 5칸, 측면 2칸, 오량가, 2층. 익공계, 맞배지붕이다. 

 

평지가람에서는 누하를 낮게 조성하여 출입기능보다는 상징적 기능으로 우회통과를 하지만, 산지가람에서 금당에 오르는 진입동선은 누하 진입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채진루 진입 동선이 우회하여 오르도록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대웅전과 맞보는 배치의 채진루의 2층 마루는 대웅정 중정과 같은 높이다. 이러한 구조는  완주 불명산 화암사 우화루에도 나타나는 건축 구조로 좁은 산지중정 공간을 극대화하여  절마당을 누마루 까지 확대한 기법으로 절의 행사와 법회 등의 기능을 고려한 전각이다. 따라서 현재의 넓은 대웅전 마당은 채진루가 세워 질 당시와는 차이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화방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때 순국한 장병들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채진루에는 '이충무공 충렬묘비 목판비문'이 있다. 높이 3m, 폭 1.6m로 나무판 앞뒤에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1300여자의 글자를 새겨 놓았으며,  1981년에 일어난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탁본해 놓은 것을 가지고 1998년에 새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진출처...다음 카페 계명암

 

또한 화방사에는 옥종자가 유명한데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실 때 밝혔던 등잔으로 한번 불을 붙이면 그 불을 꺼뜨려서는 안되고 일단 꺼진 뒤에는 다시 불을 붙일 수 없다고 전해온다. 그래서 1234년 고려 고종 이전에 불을 붙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에 꺼진 후  다시 불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기회는 인연 맺지 못했지만 다음 방문시에는 꼭 확인해 보고 싶다.

 

 

대웅전이 건립되는 것은 1713년(숙종 39)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대관음법전이 화방사의 중심법당이었다.이후 1818년(순조 18)에 중창하면서 보광전으로 명명하여 최근에까지 사용되었으며 1981년 화재후 1984년 복원하면서사 대웅전 현판을 걸었다. 법당은 정.측면 3칸*2칸  겹처마,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다른 절집과 달리 고식으로 조성된 기단이 눈에 들어왔지만 너무 높아 정겨움이 떨어진다.  

 

법당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 석가여래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후불탱을 비롯하여 지장탱,중탱,현왕탱 등이 있다. 하지만 사시 예불중인 스님을 방해할 수는 없고 약속 시간은 다가와 아쉬움을 남기며 법당 내부 답사는 차후로 미루었다.

 

 

 

옛맛을 지닌 괘불대

 

 

 

대웅전 삼존불

 

 

화방사 주위 산자락에는 천연기념물인 산닥나무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산닥나무는 남해,진도,강화도 등 일부지역에만 자생하는 팥꽃나무과의 낙엽관목으로 7~8월에 노란색 꽃이 피고 10월 경에 성숙하며  나무껍질과 뿌리의 섬유질이 종이의 원료로 사용되는 희귀수목이다. 지금이야 보호종으로 대접 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사찰 주위에 심어 최하층 신분인 승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한지를 제조하였던 것이다. 화방사 주위에 군집한 산닥나무도 그런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사찰 승려의 노동력 착취와 수탈에 견디다 못한 노스님의 기지가 번쩍이는  재미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경남 고성 옥천사 스님들도 종이를 만들어 공급하라는 인근 문중과  세도가들에게 노예처럼 고역과 착취에 시달려스님들이  한 분 두 분 절을 떠나 폐사 직전이었다. 또다시 가까운 함안 조씨 문중에서 족보에 쓸 譜紙(보지)를 요구해오자 더이상  참다 못한 노스님이 종이가 없어서 못 주겠노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즉, “玉泉寺造紙, 盡入於 **趙氏譜紙中, 絶無餘力"(옥천사에서 만든 조지(造紙), 이미 조씨 문중 보지(譜紙)로 다 들어가서 여력이 없다)"  

 

 

고풍스런 분위기가 많이 퇴색된 화방사. 하지만 달맞이가 화방사 여행의 백미라고 하였으니, 보름달이 뜨락에 교교히 내려 앉은 어느 날 고운님 손잡고 달빛에 희롱당하고 싶다.

 

 

200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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