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인 새벽 청정한 기운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상쾌하다. 낯선 이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사람들도 정겹다. 이모습이 벌교의 본디 모습으로 믿고 싶다. 어제저녁 늦게 도착하여 묵은 모텔의 열악하고 정갈하지 못한 환경, 에어컨. 냉장고의 굉음. 식당의 불친절하고 비싸며 맛이 떨어진 벌교의 대명사 꼬막 정식에 실망을 넘어 불쾌한 기분이었었다.
벌교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이전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읍이었다. 가까운 낙안읍성, 선암사, 보성 차밭,대원사 동선이 답사 코스였으나 지금은 문학기행의 필수 답사처로 부상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벌교를 소설속에서 가져 왔다.
"벌교는 한 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 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목포가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 내는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면,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이 벌교에는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처럼 문화유산 답사가 주목적이 아니고 문학기행을 즐기는 우리님들을 위해 벌교읍 홈페이지에서 태백산맥 무대가 된 명소를 옮겨왔다.
홍교 아래 용의 아들 '공하'가 먼저 반긴다. 물을 통해 접근하는 사악한 잡귀를 막아주는 상징을 가지며 선암사 승선교를 비롯 홍교에 조성된다. 예전에는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했는데 고증을 거쳐 복원하면 벌교의 또다른 볼거리가 되리라 믿는다.
벌교홍교. 벌교筏橋지명의 유래가 된 뗏목다리가 있었던 자리에 영조(英祖) 5년(1729) 선암사(仙岩寺)의 초안선사(楚安禪師)에 의하여 석교로 건립되었다 한다. 그후 영조 13년(1737)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로 만들어졌고,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하니 벌교민들에게 홍교는 생명체이며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홍교는 승선교 처럼 조선시대에 천장가구인 이른바 궁륭형穹隆形 구조로 무지개 모양으로 석재를 맞추고 사이사이에 방형 면석을 쌓았다. 그 위에 멍엣돌을 걸쳐 돌출시키고 난간석과 판석을 깔았다. 홍예와 공하를 제외하고는 복원한 모습이다.
월천공덕越川功德. 월천공덕이라고 했다. 속세의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또는 공덕을 쌓기 위해 울 조상들은 개울에 정성들여 돌다리를 놓았다. 선암사 스님들도 해마다 떠내려가는 뗏목다리는 민초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어 지켜보던 스님은 팔을 걷고 공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다리를 외형상의 연결 의미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로도 여겼다. 그러기에 다리는 만남과 이어짐 뿐만 아니라 생사를 초월한 시공을 넘나더는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다.
도마다리
홍교에서 주민들에게 도마교의 위치를 물었지만 위치는 고사하고 의사소통마져 힘들었다. 내가 어제 저녁 율어에서 밤에 내려오면서 변전소 근처에서 안내문을 보았다고 말씀드리자 그제서야 도맷다리라며 정확한 소재지를 알려주었다.
독(돌)다리, 도맷다리, 도마다리로 불려지는 도마교는 가까이 있는 부용산이 약마부정躍馬浮定(도약하려는 말의 자세)의 형세란 속칭에 기인하여, 도마逃馬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옛날에는 사람은 물론 물자의 이동이 빈번한 주요한 간선도로에 위치한 교량이었겠지만 지금은 교량의 기능은 다한듯 하다.
도마교비와 중수비. 비문에 의하면 인조 25년(1645) 현지(낙안군 고읍면) 읍인 정창락·장선용 등에 의해 처음 설치되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왔다.
"도마교는 벌교읍 전동리의 벌교와 광주간 도로에서 100여m 정도 초지마을 쪽으로 떨어진 전동제 저수지의 물 길상에 위치하면서 초지들과 편촌들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숙종 8년(1682) 중수한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기록이 거의 없어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본래의 다리 길이는 약 5.7m에 이르는 것이었으나 1989년 여름 홍수로 절반정도가 파손되어 부재들이 유실되고 9개의 부재로 결구된 반정도만 남아 있다. 이곳에 사용된 재료는 낙안산 백석재(화강암)이며 거칠게 다듬은 각석재를 이용하여 결구시킨 지극히 원초적인 가구식 구조(Post Linrel Structure)이다.
이 다리는 농사일은 물론 20여년 전까지 마을 동제의 의식대상 일부였으나 마을의 전통적인 공동체 해체와 함께 그 의식들은 사라지고 농사일을 돕는 다리로 존속되어 왔다. 그러나 전동제 저수지 공사에 따라 수로를 확장 개조시켜 도마교 입구의 수로형식이 곡자형으로 빚어져 홍수가 나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주민들은 다리의 파손이 마을의 불행을 야기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리는 원형이 파손되고 잔존원구만 남아 있지만 각석재를 결구시킨 원초적인 가구식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이나 창설 중수의 절대 연대를 알려 주는 기록이 담긴 비석이 함께 있어 석조교량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6년 북한 신문의 보도로 알게된 안성현의 죽음. 이전까지 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엄마야누나야" 작곡가. 월북 음악가였다. 당시 우리 카페에도 구경꾼님이 음악과 사연을 올렸던 올렸던 "부용산" 그 부용산이 도마다리 근처 였다. 그 때 올렸던 안치환이 노래한 부용산을 다시 들어보자. 사상과 이념과는 아무른 관계가 없는 애절하고 아름다운 노래 부용산 노래 사연은 벌교읍 홈에서 옮겨왔다.
2009.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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