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장흥군

장흥...천관산 천관사

임병기(선과) 2009. 10. 16.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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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사로 향하는 도중에 한계령님과 통화가 되었다. 천관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면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곳으로 귀농하셔서 위백규 선생의 강학공간이었던 장천재에 거주하며 문화유산 해설. 숲 해설도 하시며 대덕읍의 문화재와 전설에 해박하신 분이었다. 시간만 되었으면 하루 정도 머물면서 골골처처를 함께 동행하고 싶었지만 귀가 일정 때문에 훗날을 도모해야 했다. 천관사에서 꽃보살로 통한다고 진작에 알았으면 스님에게 인사를 올렸을텐데.

 

산위로 올라올수록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에는 많은 비가 온다고 했지만 다행이도 답사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산정상에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큰 가람으로 생각되었지만 예상 외로 사찰터에 비해 전각은 단촐하고 소박했지만 드러내지 않아도 품격이 있는 절집으로 느껴졌다.

 

 

창건설화와 김유신과 천관녀에 관한 이야기를 전통사찰정보에서 가져 왔다.

 

천관사 창건을 알려주는 기록은 고려시대 백련사의 제2세 정명 천인(靜明 天因, 1205~1248)이 지어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는 「천관산기(天冠山記)」와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1798)가 남긴 『지제지(支提誌)』가 전한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천관사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800~809) 때에 통령화상(通靈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얘기를 보면, “어느 날 통령화상이 꿈을 꾸는데, 북갑(北岬)이 땅속에서 솟아나고 가지고 있던 석장(錫杖)이 날아가 산봉우리를 넘어 북갑에 가서 꽂혔다. 꿈에서 깬 스님은 꿈에서 본 것과 비슷한 자리를 찾아 터를 닦아 천관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한편 통령화상은 천관사 외에도 보현사(普賢寺), 탑산사(塔山寺), 옥룡사(玉龍寺) 등 89개의 암자도 함께 창건하였다 전하는데 정확한 활동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기록에는 천관보살(天冠菩薩)을 이곳에 모셨기 때문에 천관사라 명명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는데, 이는 천관산의 별칭인 ‘지제산’이라는 이름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화엄경(華嚴經)』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서는 ‘지제산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보살이 머무르는 곳인데 현재 있는 보살을 천관보살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종합해보면, 천관사는 화엄경 사상에 입각해 천관보살의 진신상주처(眞身常住處)로써 창건된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장군이 사랑했던 기생 천관이 살던 집이 바로 천관사입니다. 기생 천관은 김유신장군과 사랑을 나누었던 일화의 여인이지만, 천관보살의 화신입니다. 천관보살은 기생으로 화현하여 김유신 장군이 화랑도로서 삼국통일을 이끌어낸 자질과 심지를 지니고 있음을 시험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경주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천관이 반대지역인 장흥으로 온 것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 후 천관을 위해 이곳에 천관사를 지었다는 이야기 속에는 화엄신앙의 지역 전파와 관련되었다고 봅니다.

 

 

극락보전 앞 석등.  

 

 

정방형 지대석 위로 귀꽂의 흔적이 남은 두 겹 팔엽 복련, 복련의 하대석 팔각이며 두 줄의 띠를 상하로 두르고 각 면에 안상을 새겼다.

 

하대석 위에는 팔 각 간주석, 그 위 상대석으로 한 겹의 8엽 앙련을 올렸다. 화사석.네면에 화창을 투각하고  팔각 옥개석을 올렸다. 옥개석은 아랫면은 수평으로 하고, 윗면에는 귀꽃 없이 추녀 끝을 완만하게 처리하였다. 

 

 

극락보전 앞에 위치한 오층탑. 탑은 4매의 장대석으로 짜여진 지대석위의 단층기단이다.  하대석은 호형과 각형의 2단 괴임을 하고 그 위로 4매 판석으로 면석을 구성했다.  갑석은 두꺼운 편이며 하면에 1단 괴임을 하고 상면 중앙에도 1단 괴임을 각출하여 몸체를 받치고 있다.  두터운 갑석에도 괴임이 보인다.
 

 

상륜에는 보주(?)만 보인다. 양우주가 모각된 몸돌과 옥개석은 각 한 돌이며 옥개 받침은 1~5층이 3단이다. 지붕돌이 두껍고 낙수면 물매가 깊으며 전각의 반전도 급하다. 오층탑의 상승감이 약하고 무거운 느낌이 든다.고려시대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삼층탑. 신라 전형의 탑이다. 이중기단 상하에 양우주을 새겼다. 하층갑석은 2단 굄이 있다. 상층갑석의 밑면에는 부연이, 윗면에는 2단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에도 우주가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4단이다.  옥개석 낙수면은 아래로 향하면서 완만하게 흐르며 전각의 반전은 시원하다. 상륜에는 한 개 돌로 된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다.

 

 

이건 아니겠지요?

 

 

뽀얀 느낌. 비례감이 알맞아 안정감이 느껴지며 단아함을 풍긴다.상하기단의 탱주, 상기단 갑석 아래 부연 생략 옥개받침의 략화로 고려전기 탑으로 알려져 있다. 

 

 

 

장흥출신 소설가 한승원이 말하는 천관사의 옛모습을 옮겨 왔다. 작가가 1939년 출생이니 1960년 천관사 풍경이라 하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아홉살이던 해의 겨울. 그 무렵 문학병이 들어 있던 나는 핫바지에 털점퍼를 걸치고 천관사를 찾아갔다. 그 절 분위기가 마음에 들면 한달쯤 머무르면서 소설을 좀 써볼까 하고.


그 무렵 나는 나를 어디엔가 가두어놓고 부리고 싶었다. 자기를 가두고 마음대로 부린다는 것은 자기의 확실한 주인노릇을 하겠다는 것 아닌가. 열정이 지나치게 많으면서도 스스로의 재능과 운명에 절망하고 방황하는 나를 다잡아 나로 하여금 나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고 싶은 것
.

관산읍에서 버스를 내려 30리 길을 걸어서 그 절엘 찾아갔다. 용시동에 이르러 산 정상을 향해 나 있는 오불꼬불한 비탈진 길을 따라서
. 자드락길 구비구비마다 들솟아 있는 억새풀, 띠풀, 싸리풀들이 내 키를 재면서 겨울 찬바람에 몸무림치며 울어댔다. 내 몸 속에 그 억새숲의 울음이 절절히 스며들고 있었다.

산 중턱의 자그마한 분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아연해졌다. 폐허가 눈앞에 펼쳐졌다. 깨어진 기왓장들과 무너진 담벽과 거멓게 드러난 구들장들이 널려 있었다. 그 폐허 저쪽에 여느 여염집의 대문간만한 절 건물 한 채가 있었고, 그 옆에 황토로 지은 요사채 한 채가 움막처럼 엎드려 있었다. 방이 다섯 간이었다
.

요사채 머리에 서서 실례합시다 하고 말하자, 첫머리의 방에서 늙수그레한 보살님이 문을 열고 나와 댓돌 위의 짚새기 신을 신고 나를 향해 섰다. 주지스님을 뵈올 수 없느냐니까 마을에 내렸갔다고 했다
.

산 사람들이 불을 질러뿌렀는디 스님 혼자서 어떻게 절을 지어보실란다고…”보살님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절 구경을 좀 시켜달라고 하니까 보살님은 부처님이 혼자 계실 뿐이지라우하며 허름하고 자그마한 절간 문을 열어주었다. 요즘 큰 절의 산신각보다 더 작은 건물이었다.

그 안에는 자주빛 그늘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속에서 금빛 부처님이 반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분지 주위의 마른 억새풀숲이 으아아 우수수 하고 울었다. 그 소리가 절간 안으로 몰려들어갔고, 그것이 다시 나를 향해 되돌아 나왔다. 그 바람은 텅 비어 있는 내 가슴속을 맴돌았다
.

나는 두려워졌다. 그곳에 머물러 살게 되면 그 바람이 내 몸을 속속들이 갉아 먹어버릴것 같았다. 바람에 의해 요절이 나버린 몸은 한줄기 바람이 되어 이 세상을 떠돌게 될 것 같았다. 나는 그 절에 머무르면서 소설공부할 생각을 버리고 하산했다
.

그 바람소리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 머무르고 있다. 우리 부부가 광주 증심사 부처님 앞에서 혼례식을 올린 것, 소설 [아제아제바라아제]를 쓴 것, 서재 한복판에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다 그 바람 때문인 터이다
." 

 

200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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