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장흥군

[스크랩] 가지산문을 들어서며... / 군자리 입석, 구산선문?

임병기(선과) 2008. 6. 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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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혼자 길 나서기를 좋아했는데,이럴 경우 답사길이 2~3일 소요되면 마지막날은 완전히
그로끼가 되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싶은 심정이 든다. 하지만 두어 명과 어울리면 피로감이 훨씬 
덜하며, 새로운 시각의 감상 어프로치 묘미를 알게되고,무엇보다 익숙치 않은 길을 찾는대는 그만이다.
물론 출발전 목적지의 동선을 계획하지만 가장 완벽했던 돌베게의 길잡이도 이제는 우회도로 확충으로
유효기간이 거의 소멸되었음을 알기에 일행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보림사를 향해서 달리는 중에 만난 군자리 입석도 본래 의도했던 토동 입석은 아니었지만 가외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익히 아시겠지만, 고택에서는 종손, 민속신앙물 답사시에는 동네의 어르신을 뵙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하면 책에서 배웠던 것은, 한낱 구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군자리
에서도 사람좋아 보이는 동리분에게 - "우암 송시열이 유배를 가면서 지세가 여러명의 군자가 배출
될수 있는  지형이라 마을이 君子里로 불리게 되었다고"-듣게 되었으니 여타의 선돌,장승,당산목은 
외부공간에서 내부로 유입되는 대상물의 차단임에 비해, 군자리 입석은 취락공간에서 외부로 유출되는 
지기방어가 일차적 목적으로 조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보림사 순례기에 앞서 예전에 나문답에서 구산선문을 패러디한 나의 건방진 글과, 석남사 부도 문제와 
관련, 幽玄이 언급했던 구산선문 내용을 옮겨 오니 일독하시기 바랍니다.
[구산선문 패러디]
 신라 후기 
일부왕족과, 기득권 세력,명문 대학 출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교종의 불교병원(사찰)을 
만들어 저것들만 맨날 숯불로 밥하고 고기묵고,사우나하고,해외관광 다니며 성인병에 
걸려 뒤뚱뒤뚱, 지방에서 유학온 학생들은 의과대학에 진학할 자격도 봉쇄하며 서민들
에게는 보험료 수가 인상하여 봉급쟁이 돈 다 앗아가던 시절...
멍청하고,똑똑한 학생(스님)들 도피성 유학을 중국으로 가서는 선종계 불교병원에서 공부
후 의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귀국하였지만, 기득권 세력은 권력 말기의 레임덕도 모르는 체 
인턴자리도 주지 않았다.
 술로서 날을 보내는 의사(스님)에게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부동산투기,소작농 
후려치기로 졸부가 된 호족들이 야! 울딸, 아파트 열쇠, 병원(사찰) 지어줄테니 오거라 
라고 추파를 던졌던 것이다.
그래서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9곳(장흥 보림사,남원 실상사,곡성 태안사,강릉 굴산사,창원 
봉림사, 영월 흥법사,문경 봉암사,보령 성주사,해주 광조사)의 호족들 병원(절) 개업 하였고,
그 병원(절)이 선종계 구산선문으로,  방문 진료, 극빈자 무상 진료, 등 기적 의료 서비스에 
환자가 구름 같이 모여 병원은 축재와, 타지역에 분원을 개원하였다.
돈이 좀 모이자 9곳의 병원장(주지)이 모여서 기존 병원(절)과 차별화 된 상징물이 없을까? 
궁리 끝에 철조 여래불을 병원에 모시기로 합의하여, 기존 병원의 상징이던 석불,목불 대신
9곳의 구산선문에는, 차별화된 의료서비스린 미명, 부의 상징으로 처음으로 철조불이 모셔졌다 .
세월이 흘러 호족도,창업의사도 입적 후 9곳 구산선문에서 서로 원조 선종계 병원(절)이라고 
요즘 안흥찐빵,현풍곰탕 원조 싸움하듯 난리 부루스를 치고 법정으로 비화되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해결 방안으로 지금까지 예가 없었던 창업의사(구산선문 개산조) 무덤자리를 만들었다.
그게 부도야!!! 
원조타령의 부산물이지,그 이후 온갖 병원들도 인술을 베푼의사 였다고 부도를 세웠던 것이며,
'살아서 이핑계 저수작으로 치부에 공로가 지대하여 후임 의사들 잘묵고 잘살고 있습니다.'라는
감사의 표시인 셈이지.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아이구 고승대덕님들 불쌍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유현의 글]
우리가 주시를 해야할 점은 
신라가 선불교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구산선문이 열릴 시점은 신라의 융성기였다. 
비록 망함의 징조는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막강한 국력이요 
의상 이래 죽 이어온 교종의 세력은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마당에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내세운 
선불교가 과연 얼마만큼 세력을 펼칠 수 있으며 
어떻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선불교는 중국에서 들어 왔다. 
중국과 손쉽게 왕래할 수 있었던 막강 세력은 누구인가? 
바로 청해진의 장보고였다. 
그렇다면 전라도 지역이 선불교를 수용하는데 
훨씬 유리할 수 있다. 
둘째, 왕실과 교종의 밀착 관계를 무시하여선 안된다. 
당시 경주는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교종 세력의 본거지라면 
선종은 변방 쪽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전남 장흥 가지산파 (보림사), 
전북 남원 실상사파 (지리산), 
경북 문경 희양산파 (봉암사), 
전남 곡성 동리산파 (태안사), 
경남 창원 봉림산파 (봉림사), 
충남 보령 성주산파 (성주사), 
강원 강릉 자굴산파 (굴산사), 
강원 영월 사자산파 (흥녕사), 
황해 해주 수미산파 (광조사). - 다 맞나? 
경주와 가장 가까운 곳이 경남 창원 봉림사나 
경북 문경의 봉암사이다. 
지리적으로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려웠다는 점일 것이다. 
셋째, 신라 왕실은 선불교를 수용하진 않았지만 
그 실체를 인정하고 있다. 
도의 - 염거 - 체징으로 이어지는 가지산문의 경우 
보조라는 시호와 창성이라는 탑명을 왕이 내린 것이요, 
실상산문의 경우도 홍척은 증각이라는 시호와 응료라는 탑명, 
수철이라는 시호와 능가보월이라는 탑명 등 
약간의 시일이 지나지만 왕실에서도 그 세력을 인정해주고 있다. 
즉 선불교라고 해서 완전히 왕실과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방에서 호족들이나 지방 관리들에 의해 자리를 잡고 
불교계에서 위명을 날리면 왕실에서 인정해주는 그런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가지산문의 개창자는 바로 보조 체징이라 하는데 
그 스승(염거)의 스승인 도의선사가 활동할만한 
지리적인 공간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결코 언양의 석남사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중국과 가까운 뱃길(전남이나 충남)도 아니며 
그보다 후대에 세워진 구산선문의 경우도 가장 가까운 곳이 
문경과 창원인데 어찌 그 절반의 지점인 언양에 도의선사가 
활동을 하고 부도를 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특히 도의선사는 선불교가 자리잡지 못해 설악의 
진전사에 들어가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언양 석남사의 부도는 형식상 당시의 부도가 아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고려시대라고 보아야 할 것같다. 
그렇다면 도의선사의 부도라는 점을 꼭 인정해야 한다면 
(우리가 인정해야할 근거는 하나도 없지만) 
분사리라고 할 경우 반박할 근거도 없으므로 
이 정도는 학문과 종교의 타협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0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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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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