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장흥군

장흥...존재(存齋) 고택

임병기(선과) 2009. 10. 17.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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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간채

 

천관사 아래서 기다리던 한계령님과 만났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맛보는 큰 보람의 하나가 각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과 현지에서 만나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계령 님 역시 출발전부터 방촌리 탑 도난. 석불의 존재 등을 알려주셨으며 위백규 선생 고택으로 안내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장흥위계환가옥(長興魏桂煥家屋)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의 고택으로 장흥 위씨의 집성촌에 위치하고 있어, 그 호를 따라 ‘장흥 존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고택은  장흥 위씨 동족부락인 방촌마을 안쪽에 위치한 고택이다. 집 배치와 관련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왔다. "고택에는바깥마당에는 연못이 조성되었고,  집 뒤로 대나무 숲이 우거진 앞에 안채가 서남향하여 높직이 자리하고 안마당 맞은편으로 대문간을 배치했다. 안마당 서쪽에는 헛간채를 두고 마당 동쪽으로는 서재가 놓였다. 안채 동북쪽에는 여러단의 계단을 올라서서 사당채가 배치되었는데 나무들에 가려서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안채


사랑채가 보이지 않는다. 우측에 보이는 건물은 서재이다. 아마 서재와 이어져 사랑채가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밖에 없다. 상량문으로 1937년에 보수했음을 알수 있으며 서재는 약간 손질을 했지만 고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18세기 건물로 추측되며 사당채도 19세기 말 정도의 건축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연석 바른층 쌓기 기단, 덤벙주초위에 방형기둥을 세웠다. 안채는 5칸. 앞좌우퇴집으로 서쪽으로부터 앞칸에 부엌, 뒷칸에는 광,  안방, 대청을,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재

 

납돌이집 서재는 특이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단칸집인데 남쪽과 동쪽에 퇴를 둬서 안마당으로 부터 돌아 앉았으며 남쪽면에는 팔작지붕을 만들었는데 북쪽면은 맞배지붕으로 박공으로 처리했다. 살림집의 구조도 아니며 공부방으로 이용되는 당옥(堂屋)으로서도 격식을 갖추지 못했다. 간살이는 단칸 구들을 만들고 남 ·동쪽퇴에는 툇마루를 시설했다.서재가 튀어나와 있는 것도 대문 밖의 연못을 내다보기 위한 구조로 생각된다.

 

위백규 선생의 호는 존재(存齋)이고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났다.1754년(영조 30)에 증광(增廣)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세때 글을 해독하고 9세때 천관산에 올라 시를 읊어 세상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경학(經學)에 심형을 쏟다가 문사(文辭)만 하는 학문은 필요없다고 하여 천문.지리.율력.복서.병도.산수로부터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25세때 이미 거유(巨儒)로 이름을 높았으며 1764년(영조40) 38세때 동양삼국 및 세계지도와 지지(地誌)를 기술한 『환영지』와 『고금서(古琴書)』, 당시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의 개역방안을 제시한 『정현신보(政弦新譜)』를 지었다. 다음해 생원복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기 않고 후진육성에 전력하는 한편『사성록(思成錄)』『자회가(自悔哥)』『경서조대(經書條對)』『독사차록(讀史箚錄)』등 1백여권에 가까운 저술을 하였다.

1974(정조18)68세때 호남지방의 해일로 위유사 서영보(慰諭使 徐榮輔)가 내려와 공이 저술한 여러 책들을 보고 임금께 등용할 것을 소청하게 되는 다음해 부사용(副司勇)의 군직을 내림과 함께 도백(道佰)으로 하여금 그 저서를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던 차 1796(정조29) 또다시 선공감 부봉사(線工監 副奉事)를 내렸지만 또한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 봄 여러 차례 소명을 받고 입궐하여 당시의 폐단을 논한 만언 상소문을 바치고 노환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옥과현감(玉果縣監)에 부임되어 선정을 펴다 1798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헛간채 

안채 대청 

 

안채 후원 굴뚝. 뒤안 가운데 축조된 안채 굴뚝은 벽을 기와로 쌓고 골기와를 얹었다.

 

 

후원 

 

만덕사...위백규


동백꽃 떨어져 푸른 잔디를 덮자
山茶花落綠莎
금모래 위 게으른 걸음으로 명승지 찾았네
懶步金沙選勝遊
한 곡조 뱃노래에 강위 해가 저물자
一曲漁歌江日晩
사람들 홀연히 동정루(洞庭樓)에 오르네
忽然人上洞庭樓

 

다산이 귀양오기 3년전에 세상을 떠난 존재의 시다. 다산과 혜장스님도 존재를 흠모하지는 않았을까?

 

 사당

 연지

 

대문 바깥에는 작은 연지. 방형 연못 중앙에 방형 석가산을 조성 대나무를 심었다. 기왕 조성하려면 천원지방이었으면 좋을텐데 입지가 여의치 않아 방형으로 만든것 같다. 존재 선생이 어린시절 공부에 열중할 때 연못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방해가 되자 부적을 던져 개구리를 물러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현재도 개구리가 서식하지 않는다고 한계령님이 부연 설명하셨다.

 

방촌마을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의해 꼭 지켜야할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전통문화마을 마을이다. 존재고택. 유물전시관. 고인돌. 석장승. 장천재를 답사하는 동선을 수립하면 좋을 것이다.

 

200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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