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은 아니지만 전국 각고을을 심도있게 답사는 못했어도 거의 발걸음은 했었다. 하지만 진도는 이번이 처녀지이다. 기실 진도는 섭렵할 지방이 아니라 하루 이틀 숙박을 하면서 체험 위주로 진행하여야 진정한 답사라고 할것이다. "그림과 노래와 민속이 살아 숨쉬는 보배로운 섬" 진도군청 홈페이지를 장식한 짧은 문구가 진도를 상징한다면 나의 여정은 그 어느 하나도 경험하지 못한 답사였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다가온다.
석성 남문과 복원된 여장위에 담쟁이가 한창이었다. 문루 앞쪽은 옹성이며 성안 주민들의 주통로인 듯 했다. 삼국시대부터 성이 있었다고 추측하며 고려 원종(재위 1259∼1274)때 강화도에서 남하한 배중손의 삼별초군은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이곳 진도에서 성을 쌓고(보수) 몽골과 항쟁을 벌였다. 그 전장의 중심이 남도석성으로 전해오며 최후 전투에서 패전한 삼별초군은 제주로 남하한다.
더욱더 슬픈 역사는 몽골군의 2차례 일본 원정 실패후 진도민들에게 들이 닥친다. 몽골군과 전투에서 승리로 기고만장한 왜는 진도를 포함 남도 전역에 걸쳐 침략과 노략질을 계속하게 되어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 관청과 민초들은 고향을 떠나 영암땅으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무능한 왕조 때문에 왜의 노략질을 피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타향으로 옮겨 간 것인지, 고려왕조에서 삼별초의 진지가 주둔했었고 그 잔류 세력을 두려워하여 진도민 불신으로 강제 이주시켰는지 판단할 근거가 내게는 없다. 그후 조선이 개국되고 나라가 사회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고, 왜의 본거지 대마도를 점령후 자신감과 국정을 완전히 장악한 세종은 이주민들을 진도로 복귀시킨다.
고향에 돌아온 진도민들은 척박한 환경과 힘든 생활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성을 복원하고 삶의 터전을 꾸려 나갔을 것이다. 그런저런 애환이 하나하나 응집되어 석성의 석축으로 태어 났으며, 그런 역사적 아픔이 오늘 진도 문화의 원천인 줄도 모르겠다.
복원된 석성은 남문과 문루 옹성 치성, 성내 관아가 있었지만 본래 부터 인공 해자가 없었는지 아니면 단운교 쌍운교가 걸린 개천이 성을 두른 자연 해자였을까? 대표적인 읍성인 낙안읍성과의 차이가 인공미가 덜하며, 저자거리 같은 분잡한 분위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이런 느낌이 지속될지 알 수 없지만 더이상의 개발과 개방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과욕을 부려본다.
푸르름이 주는 맑고 신선한 기운, 친숙한 스레트 지붕, 정겨운 돌담, 옹기종기 살아가는 사람들, 내눈에 비친 성안은 그랬다. 상업적인 냄새가 없고 마을 슈퍼 평상에 계신 할머니의 질박한 사투리도 흥겹다. 생활하는 주민들에게 외람된 이야기지만 그냥 마냥 좋다. 유년 동네 골목에서 뛰놀 때 귀가 시간을 알려주던 굴뚝에 저녁밥 짓는 연기가 싫었었다. 오랫만에 기억저편 흐릿한 추억 한편을 들쳐주는 남도석성 안 풍경이었다.
아이들이 건너는 풍경이 정겹다. 누구든 동화 한편 머리속에 그려질 듯 하다. 바라보는 엄마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보이고 아이들 노랫소리는 티없이 맑다.
얘들아!!
진도 남도석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2개의 무지개 다리이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왔다.
사찰 입구를 비롯 장대석 화강암 홍예는 인공미가 강하고 귀족적이며 당당한 자태이지만 석성밖 단운교 쌍운교는 질박하고 투박하며 끈질긴 생명력을 품은 꿋꿋한 모습이다. 어쩌면 남도 석성을 배경으로 살아간 민초들과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함께한 생명체가 아니겠는가?
가을이 두렵다. 차라리 겨울이 바로 왔으면 좋겠다.
2009.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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