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진도군

진도...용장사 석불좌상

임병기(선과) 2009. 10. 5.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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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 남도 석성과 더불어 삼별초의 몽고항쟁 근거지에 근자에 세운듯한 작은 절집이다. 삼별초가 패전후 제주도로 이동후 용장산성에 있었던 용장사가 폐사되었고 오직 석불좌상만 전해오는 지도 모르겠다. 석불을 뵙고작은 화단을 손질하던 비구니 스님께 석불 느낌을 말하였더니 정진 끊임없이 정진하면 '선과'를 얻을 거라며 웃으신다. 내 법명이 선과인 줄 아셨을까?

 

용장사 바로 옆 용장산성에 관한  자료를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다.

 

"도 동북방의 벽파 나루와 서낭산의 주변에 솟은 산지와 안부(鞍部)를 따라 연장 12km이상의 거대한 도성지가 있다. 용장리와 벽파리의 거의 전체를 감싼 고려 시대의 석축과 토축으로 된 나성(羅城) 형식의 산성으로, 현재 해발 264m의 용장산 좌우의 능선을 따라 약간씩의 석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에 용장사지(龍藏寺址)와 행궁지(行宮址)가 남아 있다.

성벽은 서벽이 망바위를 지나 토성으로 이어져 벽파진 북쪽의 바다에까지 닿아 있다. 축성 연대는 1270년 6월 이후이며 몽고칩입시에 강화도에 있다가 몽고와 화해하고 개경으로 천도하는 정부에 대항하여, 휘하의 삼별초군을 이끌고 진도로 옮긴 배중손(裵仲遜)이 이끄는 삼별초(三別抄) 정부의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다. 삼별초는 이곳에서 부서(部署)를 정하고 관부(官府)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군과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고, 승화후 온(承和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는데 이때 쌓은 성이 용장성이다.

 

그러나 삼별초군은 제주도로 이동하였고, 이후 1350년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여지자 진도군 전체의 주민이 세종 초까지 육지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용장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뒤 세종 초기에 다시 주민들이 귀향하게 됨으로써 기록이 보이게 되는데, 이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3만 8,741척, 높이 5척이라 나와 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석축된 성터는 자갈이 섞인 지면을 고른 다음 두께가 10cm로 얇은 판석을 깔고 큰돌을 되도록 아래에 축조하였다. 토성의 부분은 아랫부분의 너비가 약 3m이고, 높이가 2.1m의 규모로 남았으며, 자갈 섞인 흙과 잡석을 성심(城心)에 넣고, 판축처럼 다짐한 것이다. 행궁터라 부르는 건물터는 1989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삼별초가 이곳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불찰(佛刹)이 있었다고 여겨지며, 경사진 대지에 석축을 여러 단으로 구성하고 남북 방향을 축으로 하여 회랑을 가진 여러 개의 건물이 배치된 것이 마치 재경의 만월대와 유사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용장성 안에는 해발 215m의 성황산이 있으며, 이 산에도 산성을 축조한 흔적이 있다."

 

 

용장사 약사전 약사여래좌상. 복련을 새긴 대좌, 흔치 않은 등받이 모습의 방형 광배이다. 육계가 없는 소발 머리칼이 지장보살의 두건 같다. 방형 얼굴. 짙은 눈썹, 작은 눈, 긴 코, 알맞은 입 등으로 안정되고 후덕한 모습이다. 삼도가 보이고 법의는 통견이며 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항마촉지 수인이며 왼손은 무릎에 올려 약합 들고 있다. 결가부좌의 무릎은 불신에 비하여 크고 높다.

좌우로 서 있는 두 보살상은 약사여래의 협시불인 일광.월광보살인지 알 수 없지만 본존과 같은 분위기며, 상체를 벗고 하체는 군의를 착용했다.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한다. 

 

 약사여래

 우협시불

 좌협시불

 

눈빛이 고운 스님.

나직하게 자근자근 물으시고, 답해주시던 모습

밀짚모자와 타올로 얼굴을 가리셨지만

 

저는 보았습니다.

능소화 보다 더 고운 얼굴을...

 

2009.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