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나주시

[스크랩] 천년 목사 고을 / 나주읍내에서

임병기(선과) 2008. 6. 6. 08:16
728x90
728x90
시장이 반찬이라 했던가?
늦은 점심을 먹고 나주향교로 향했지만 외삼문 입구의 하마비에서 바라본 큰 규모에 놀랄틈도 없이 문이 잠긴 향교의 돌담길 만 무심히 바라보았다.
밖에서 바라보아도 평지향교의 전형인 전묘후학의 배치양식에 충실한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향교중 나주 향교가 가장 크다.


조선의 건국이 1392년인데,나주향교가 1407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니 조선 초기 건국이념에 충실한 배치임은 분명할 것인데, 나주향교가 그렇게 빨리 건립된 까닭이 뭘까?
"천년 목사 고을 나주"라는 나주민의 자긍심이 담긴 구절처럼 나주는 고려 983년(고려의 건국은 918년) 이래 조선말까지 호남의 중심 고을이었으며,이는 후삼국 궁예의 졸개였던 왕건의 위상과 고려 건국의 중심에 나주호족 오다련의 딸과 퍽이나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완사천은 전설을 담은 샘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시대 견훤을 공략하고자 나주에 진출해 있을 때 이 샘가에서 한 처녀를 만나 인연을 맺었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목포(지금의 송월동 나주역사 부근 둥구나루)에 정박했을 때 상류쪽에 오색구름이 자욱하여 이를 보고 찾아가니 이 완사천에서 한 처녀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처녀는 나주지방의 호족인 오씨 집안의 딸로 후에 태조의 제2비인 장화왕후가 되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려 2대왕 혜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부터 혜종이 태어난 마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불렀고, 이 샘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샘옆에는 나주오씨문중에서 세운 장화왕후기념비가 서 있다.


여기까지는 야사 같지만 정사에 가까운 태양 아래의 이야기이고, 재미있는 달빛 아래의 '왕골 돗자리' 내력이 전해 내려져오니....

함평 돗자리를 “왕골 돗자리”라 부르는데는 한 편의 설화가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 수하에서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나주로 출정하였 는데 하루는 심한 갈증을 느껴 우물에서 물을 깃는 처녀(오씨)에게 물을 청했다.

그 처녀가 우물가에 늘어진 수양버들잎을 물에 듸어준 것을 후후 불어가며 마신 왕건은 갈증에 물을 급히 마시다 체할 것을 염려한 처녀의 지혜에 반해 집으로 따라가서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날 밤 둘의 잠자리 깔개가 돗자리였는데 어지나 사랑이 강렬했던지 그 일로 임신하여 낳은 아이의 얼굴에 돗자리 흔적이 생겼다.

그 후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창건하여 태조가 되자 오씨부인은 장화 황후가 되고 그 아이는 자라 2대 혜종이 되었다.
그 이후부터 왕의 얼굴에 골이 지게 한 돗자리를 “왕골 돗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ㅎㅎ
나주향교의 건립이 빠른 이유를 찾다가 이야기가 옐로우로 흘러가버렸구먼!!! 어쩔거나? 향교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안내문만 ---나주향교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드문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기에 서있는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입니다. 나주향교 노복이었던 김애남(金愛南)이 임진왜란때 대성전의 위패를 목숨을 걸고 지켰다고 하여 나라에서 충복사를 지어 주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유허비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박성건(朴成乾)의 금성별곡(錦城別曲) 시비(詩碑)입니다. 박성건이 1480년 이곳 나주향교 교수로 있으면서 생도 10명이 한꺼번에 생원.진사시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기체가인 ‘금성별곡'을 지어 남겼다고 합니다. 후대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비를 세운 것입니다---보았으니 엉뚱한 발상이나 챙겨봐야지!!



유현이 전주객사의 풍패지관의 글씨체와 나주객사인 금성관의 글씨체가 크고 장중하여, 같은 인물의 작품 같다고 객사인 금성관으로 돌아 가보잖다.
새로히 발굴,복원중인 금성관은 정랑만 남아 있고 양익헌은 멸실되었으나 향교 못지않게 규모가 매우 크다.

우리회원들은 익히 알겠지만 객사는 정부고관의 출장시 숙소로 활용도했으나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매월 두차례 예를 올리는 망궐례가 주목적이었던 고을의 중심 건물을 말한다.
그 외에도, 금성관 경내에는 많은 비석이 남아 있으며, 한켠에는 자그만한 탑이 있으나 제자리를 찾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유현과의 마지막 일정인 나주 석당간으로 향한다.
일반적으로 석당간은 사찰의 입구에서 사찰의 대내외적 행사를 알리는 당을 거는 목적이나 나주의 석당간은 나주시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거의 완전한 형태의 석당간의 조성 배경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고적조에 『나주의 주(州)를 설치할 때 나주의 지형이 행주형(行舟形:배모형)인 까닭에 그 안정을 빌기 위해 동문밖에 석장(石檣)을 동문안에는 목장(木檣)을 세웠다.』---풍수의 비보 목적임을 알 수 있으며 행주형 형국에서는 평양의 대동강 처럼 닻을 설치하거나, 우물을 팔때도 매우 신중해야 하는 것으로 언제 기회가 되면 우리님들에게 다양한 우리선조들의 풍수의 비보, 염승책을 재미나게 이야기해보겠다.


2005.03.22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728x90
728x90

'전라남도 > 나주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주...승걸산 복암사 삼층탑  (0) 2009.09.18
나주...금성산 심향사  (0) 2009.09.17
나주...동문밖 석당간  (0) 2009.09.16
나주...동사리 석등  (0) 2009.09.15
[스크랩] 남도.09년 여름...나주  (0) 2009.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