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장성군

장성...필암서원

임병기(선과) 2009. 9. 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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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 답사에서는 자주 만나는 서원이지만 호남지방에서는 그렇게 흔치 않다. 장성 답사 동선에서 필암서원을 건너 뛰면 장성 답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암서원은 선조 23년(1590)에 호남유교의 종조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1510∼1560)와 양산보의 아들이며 하서의  사위 고암 양자징(1523-1594) 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도 호남에서 유일하게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다. 

 
˚ 연 혁
선조 23년(1590) : 기효간, 변성온, 변이중 등 호남 유생의 발의로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
선조 30년(1597) : 정유재란때 병화로 소실
인조 2년(1624) : 황룡면 증산동에 복설
효종 10년(1659) : 사액(賜額)
현종 3년(1662) : 선액(宣額)
현종 13년(1672) : 수해로 인해 현 필암리로 이건(移建)
정조 10년(1786) : 고암 양자징 추배

 

홍살문.서원목.외삼문

 

하서 김인후 자료를 검색하면 담양 가사문학권 답사.정자 답사에서 익히 알고 있는 당대의 호남 거유들과  교분이 깊었다. 기묘사화 후 화순으로 유배온 정암을 따라 내려와 소쇄원을 짓고 두문불출한 양산보, 우리에게 미암일기로 널리 알려진 미암 유희춘과는 사돈지간이며, 송강 정철의 스승이기도 했다. 또한 하서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하서 김인후...출처/다음

조선 왕조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호는 하서(河西), 담재(澹齋) 등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박수량과는 같은 장성출신으로 박수량의 생가터인 아곡리로 들어가는 길복 필암사람이다. 기하(畿下)의 김안국(金安國), 호남의 김인후(金麟厚), 조광조(趙光祖), 영남의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조식(曺植)등을 이 시대 사림(사림)의 우두머리로 꼽는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42년에 홍문관 저작(著作),1543년(중종 38)에는 장차 인종이 될 세자와 깊은 사제의 연(緣)을 맺게 됨으로서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弘文館博士兼世子侍講院設書)가 되어 세자 보도(補導)의 직분을 맡았다. 

이무렵 동궁 실화(失火)의 변고가 일어나자 하서는 분연히 차문(箚文)를 올려
사풍의 쇄신과 교화를 주창하고 아울러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기묘사림들의 신원(伸寃)을 호소하였다. 하서는 34세때(1543. 중종38년)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그해 12월에 옥과 현령(玉果縣令)을 제수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제술관으로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듬해 1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하서는 병을 이유로 옥과현감마저 사퇴하였다.그후 매년 인종의 기일이 되면 문득 집 남쪽의 산중에 들어가 종일토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평생 한결같이 하여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다. 죽은 후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는 <하서집>, <주역 관상편>, <서명사천도> 등이 있다. 김인후는 조선12대 임금 인종(1515~1545)과 군신지간이란 각별한 인연으로
묵죽도를 하사 받기도 했다. 그 묵죽도 판각이 필암서원 경장각에 보관돼 있다.


 

 

장성군청 홈페이지에서 상세 자료를 가져왔다. 답사시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하서는 도학의 정통을 이은 사람의 영수라 할 수 있다. 도학자의 행동원칙은 나아가 겸선천하(兼善天下)를 하며 물러가 독선기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권력의 기회를 등지고 독선기신에 전념할 때 산림파(山林派)내지 사림파(士林派)의 성격을 갖게 된다.

기하(畿下)의 김안국(金安國), 조광조(趙光祖), 호남의 김인후, 영남의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조식(曺植)등이 이 시대 사림의 영수였다. 송시열(宋時烈)은 하서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유한 인물로서 하서는 하늘이 도와 우리나라에 내려 주신 분」이라고 극찬하였다. 하서는 34세때(1543. 중종38년)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한 나라가 넓다고 해도 오직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있고, 일이 번거롭고 많다고 하더라도 오직 한 마음이 주체할 수 있으니 임금의 일심은 교화의 근원이요 기강이 서는 근거이다.」 어진 인재를 친하게 하고 사습을 바로 잡는데 힘쓰도록 강조하면서 중종 자신이 저지른 을묘사화가 바른 선비들을 희생 시킨 원옥임을 깨달아 뉘우치고 신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서가 정사를 밝게 분별하고 직간(直諫)에 과감함이 이 한편의 차자에 절실하고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시강원 설서로 원자보양청에 나아 갔었다. 그후 인종이 즉위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옥과현감에 있다가 제술관으로 불려왔으나 인종은 계모 문정대비와 척족들의 압력에 불안하였다. 하서는 이때 인종의 의약에 참여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거절되었고 또 문정대비와 다른 궁에서 인종이 치료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난산비...장성군청

 

[김인후 난산비는 김인후(1510∼1560)가 매년 인종의 기일(忌日)인 7월 1일 맥동마을 난산(卵山)에 올라 북망통곡(北望慟哭)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호패형의 일반형 석비로 전면 상단에 전서로 횡서로 ‘난산지비(卵山之碑)’, 첫줄에 종서로 ‘난산비(卵山碑)’라 제하고, 이어 찬자(윤행임)와 서자(이익회)를 쓰고 비문을 적고 있다. 비문은 비의 제목을 포함하여 모두 31행(전 10행, 좌 5행, 후 10행, 우 6행), 1행 26자이다. 비문은 석재 윤행임(1762∼1801)이 짓고, 이익회(1767∼1843)가 글씨를 썼다.

끝 부분에 추기가 있는데 ‘영력 사계묘 윤정현 근지(永曆 四癸卯 尹定鉉 謹識)’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헌종 9년(1843)에 윤정현(1793∼1874)이 추기하고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윤정현은 난산비의 원비문을 지은 윤행임의 아들이다. 장성 김인후 난산비는 김인후가 인종 승하시 망곡한 것[망곡단]을 기념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김인후의 행적과 정신을 알 수 있으며 국상(國喪)에 따른 당시 제도사를 알 수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다.]...문화재청
 결국 인종은 재위 8개월만에 석연치 않는 병사(1545)를 하고 문정대비의 소생인 경원대군(慶原大君) 이 명종(明宗)으로 즉위하였다. 하서는 인종(仁宗)승하를 듣고 실성 통곡하여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그는 해마다 인종의 기일(忌日)인 7월1일이 되면 집앞 란산에 올라 종일토록 음주통곡 하였다. 명종 재위중에 여러 차례 소명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교리로 부름을 받고 마지 못해 내키지 않는 길을 떠날 때 그는 술을 여러 말 준비해 가지고 떠났다. 길을 가면서 대나무 숲이나 꽃이 핀 곳이 있으면 쉬엄쉬엄 가다가 술이 떨어지자 집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이조초엽명현집선(李朝初葉名賢集選)〕 그는 언어로는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간신의 화를 입은 인종을 위한 절의를 지켰다. 심지어 임종 무렵에는 을사 이후의 관작은 사후에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뒷날 효종(孝宗)이 세자 현종(顯宗)에게 밖에서 보면 하서의 행동이 인종과 문정대비를 이간하려는 것으로 보이나 진실한 충성이었다고 깨우쳤다.

율곡은 출처의 의리가 바른점은 해동에 하서와 비길 사람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하서는 도학의 이론적 탐구에도 일가를 이루어 성리학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퇴계와 친교를 맺고 강학도 하였으며 그의 스승 모재 김안국에게서 받은 「소학」을 궁행하였다. 하서와 일제, 이항(1499∼1576)과의 학문적인 논변은 후일 퇴계, 고봉의 47논변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일제는 전북 태인에서 살았고 하서는 장성에서 살았으나 태인과 장성은 노령을 낀 이웃이었고 그들의 학설이 서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음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제의 학설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와 기가 혼연일물이라는 것이다. 곧 태극(理)와 음양(氣)이 일체라는 태극음양 일물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고봉에게 보낸 서간중에 「주역에서 말하기를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는다."하였는데 대개 양의가 아직 생겨나기 전에는 양의는 어디에 존재하며 양의가 이미 생겨난 후에는 태극의 이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별을 따라서 깊이 생각하여 판단하여 본다면 아마도 이기(理氣)란 흔연히 인물임을 깨달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태극이 양의를 낳기 전에는 양의는 본래 태극의 도수 안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의가 이미 생겨나지 않았거나 이미 생겨났거나 원래 태극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서로 떨어져 나갔다면 물이란 없는 셈이다. 사람의 지각운동에 따른 강약 청탁한 기가 일신 중에 충만한 자는 그것이 음양의 기인 것이다. 또 인의예지와 같은 것으로써 기중에 갖추어져 있는 자는 그것이 태극의 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마땅히 일신 안에 존재해야 할 것이니 이를 이물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다시금 체인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고봉에게 글을 계속하면서 「그대는 일찍이 내가 말하기를 형이상(形而上)은 도가 되고 형이하(形而下)는 기가 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태극과 음양은 일체라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도와 기는 비록 상하의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태극와 양의는 상하 정조가 원융무제하여 일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고봉의 도기설에 반대하였고 다시 이어서 「담제(湛齋, 김인후)도 또한 이 설에 기울어 도기의 상하 관계를 이물로 여기니 개탄스럽다」라 하여 고봉의 설과 하서의 설이 같음을 개탄하고 있다.

하서는 일제에게 보낸 서간중에서 「이(理)와 기(氣)가 서로 혼합하여 있다. 그런고로 천지간에 충만한 만물이 그 중으로 나오지 않는 자 없고 또한 이를 갖추지 않은 자도 없으니 태극이 음양에서 떨어져 있다고 이르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나 도기(道器)를 나누어 보되 그 사이에 한계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니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주자도 말하기를 "태극이 음양을 타고 있는 것은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결코 사람을 말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라고 하여 도기 또는 이기의 구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일제(1499)는 하서(1510)보다도 11년 수상으로서 '젊어서 유협(游俠)을 좋아하고 무업에 종사하더니 나이 거의 30에 이르러 비로서 경서를 공부하여 거유가 되었으나 그가 이보다도 음양(氣)속에서 태극의 이를 이해하려고 한 것은 그의 무부적 기질의 소이연이 아니었던가도 한다. 잠깐 논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비지식으로 용어 몇 가지를 해석하여 두고자 한다.

4단(四端) 맹자(孟子)가 성신을 말하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의의 단이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의 단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의 단인데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예를 들기를, 한 어린애가 잘못으로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누구라도 달려가서 구출하려는 것은 그 어린애의 부모와 친한 때문도 아니요, 동리 사람들에 칭찬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요. 자연히 중심에서 측은한 마음이 움직여서 차마 빠지는 어린애를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 측은지심을 확충하면 인이 되고 수악지심을 확충하면 예가되고 시비지심을 확충하면 지가 된다.

마치 불이 처음 타는 것과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다 하였다. 7정(七情) 예기에 「무엇을 인정이라 하는가, 희노, 애, 구, 애, 악, 욕, 7정은 배우지 아니하고 된다. 7정을 다스리고 의를 닦아야 한다」하였다. 이기(理氣) 주자는 말하기를 음양오행(陰陽五行)이 착종하여 수리를 잃지 아니하는 것이 곧 이이다. 만물의 일원을 말하면 이는 동하고 기는 다르다」고 하였다. 인심도심(人心道心) 주자는 말하기를 「심은 하나이다. 형기의 사에서 생하는 것은 안심이요. 성명의 정에서 원하는 것은 도심이다. 성인 형기가 있으므로 인심은 있고, 중인도 성명을 타고 났으므로 도심은 있다. 다만 인심이 도심을 따라야 한다」하였다.
 
성(性) 정자(程子)는 「성은 곧 이이다」하였다. 주자(朱子)는 「천하에 성외에 물이 없다」고 하였으며 중용(中庸)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다」라고 하였다. 또 장자(張子)는 「형이 생긴 후에 기질의 성이 있으니 잘 돌리면 천지의 성이 존한다」하였다. 하서는 성리학(性理學)의 실천적인 면을 귀감으로 하여 오직 성과 경(敬)에 치중했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에게 보낸 글에서 「마음은 이 한 몸의 주재이나 사람의 주재를 삼은 연후에 주재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가 잡하여 외물에 유혹하면 마음이 외부로 방출되어 몸에 문득 주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능히 경으로 바르게 한다면 마음이 문득 주재하기를 전과 같이 할 것이다」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로서 이름을 날려 신동으로 일컬으기에 이르렀고 호당에 들어가서는 퇴계(1501∼1570)와 친교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대극도설(大極圖說)을 덕성의 본령으로 삼고 서명(西銘)을 학문의 강기로 중시하여 주역관상편과 서명사천도를 저술하였으나 일실되어 전하지는 않는다. 그는 진리(眞理)에 뿌리 박은 「선비정신」으로 일관하였으며 인종의 죽음에 통곡을 한 것은 나약한 선비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그것은 개국공신 및 그후의 관료들이 이미 사대부가 아니라 귀족이 된것에 대한 반성의 소리였고 경고의 외침이었으며 끊어져가는 도학적 전통을 이어가려는 몸부림이었다. 국난을 겪을때마다 바로 이 몸부림이 민족을 수호하고 지켜온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하서는 고봉과 4단 7정, 인심도심의 문제를 논변(論辯)하였고 특히 퇴계와 고봉의 유명한 47논쟁(四七論爭)에서 고봉은 언제나 하서와 미리 토론하여 확신을 얻은 다음에 퇴계를 논박하였다 한다. 고봉의 학문은 뚜렷한 사승(師承)이 없는 독자적인 것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었고 32세때 하서, 일제 등 호남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태극(太極), 이기(理氣)등 성리설 그는 확보부동한 자신의 견해를 확립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퇴계가 교정한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보고 비평을 하고 퇴계를 찾아가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두사람의 만남은 조선 성리학사상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또한 두 사람 사이는 강학상마(講學相磨)하는 진지한 학문적 태도에서 만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 이른바 퇴계 고봉의 4단7정논변(四端七情論辯)은 서울에서 돌아온 다음 퇴계가 고봉에게 자신의 주장을 고쳐서 문의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시작된다.
 
고봉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비판할때의 퇴계의 입장은 「4단(四端)은 이(理)의 발(發)이오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發)」이라 하여 4단(四端, 이(理), 7정(七情), 기(氣)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2원적 존재로 파악되었던 것인데, 고봉은 이에 대하여 「대개 인심은 발하지 아니하면 성이라 이르고 이미 발하면 정이라 이르는 것인데 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정은 선악이 있는 것이 정론이다.

이제 자사(子思)는 그 전체를 가리켜 말했고 맹자는 부분적을 발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까닭에 4단(四端)과 칠정(七情)의 구분이 있었을 따름이었으니 7정 밖에 4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만일 4단이 이(理)에서 말한다 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고 7정의 발(發)이 기(氣)를 겸한 까닭에 선악이 있다고 하여 이를 고치면 비록 전설(前說)보다는 조금 났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타당하지 못하다.

왜 그러냐 하면 성이 갓 발할때에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못하고 본연의 직수한다고 한다면 이는 맹자가 이른바 4단인데 이 4단이 물론 천리(天理)의 발한 자이기는 하지만 능히 7정 밖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즉 4단과 7정을 서로 대거호언하여 순리(純理)다 겸기(兼氣)라 나누어 말하는 것은 잘못인 까닭이다.」하여 이기(理氣)를 둘로 나누어 절대적 2원론을 반대한후 이어서 「대개 이(理)는 기(氣)의 주제(主帝)요 기(氣)는 이(理)의 재료(材料)니 둘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사물 안에 있을때는 혼륜(混倫)하여 분개(分開)하지 못할 것이다.

다못 이약기강(理弱氣强)하여 이(理)는 무궁(無窮)하고 기(氣)는 유적(有跡)한 까닭에 그가 유행하면서 발견될 때는 능히 과(過) 불급의 차가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은 7정(七情)의 발이 혹 선(善)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본체(本體)가 능히 완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善)한자는 곧 천명의 본연한 모습이 약한 자는 곧 과(過), 불급(不及)한 자니 4단7정이 본래 처음부터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이기(理氣)는 비록 주재자와 그의 재료로서의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이 둘은 나누어져서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이를 나눌 수도 없다는 것을 주장하여 소위 율곡의 이기일이이론(理氣一而二論)의 선하(先下)를 이루었다

여기에서 퇴계는 고봉에 의하여 호발설(互發說)을 추출했기 때문에 성리학사상 최고봉의 위치를 자부해도 좋을 만하다. 또한 고봉은 퇴계의 덕망과 학문의 정밀함을 사모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나 권위에 억압되지 않은 탐구정신의 학문적 태도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논변은 퇴계, 고봉이 이 세상을 떠난 몇해 뒤에 율곡이 고봉의 전설(前說)을 들고 나와서 퇴계의 설을 논박하여 퇴계의 설(說)을 따르려 하던 우계, 성휘와 누차의 서간으로 논변하여 마침내 성정논(性情論)은 성리학의 기본 문제로 계승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조 성리학은 중국의 영향을 극복한 자기 발전을 이루었고 또한 인성논적(人性論的)특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실로 이 논변 없이는 퇴계와 고봉 뿐만 아니라 조선조 성리학도 그 양상을 달리 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고봉과 퇴계의 8년에 걸쳐 계속되는 논변의 왕복 서한이 양선생 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 두권의 책으로 남길 만큼 진지했고 고봉의 예리하고 명확한 논리에 따라 학문 발전의 길을 밟았다. 고봉은 정통 사림의 뒤를 이어받았으며 정치사상은 민본사상에 입각한 왕도 정치였다.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다스려진 것」이라고 전제하고서 「역대 조종조(祖宗朝)에는 문향 장관이 모두 책임을 다하여 결단을 내린 다음에 임금에게 상달해 왔으나 지금에는 장관이 독단해 가지고 죄를 얻을까 봐 두려워서 문서상으로 책임만 피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먼저 일일이 임금에게 고하게 되니 이것이 어찌 올바른 일이 되겠읍니까?」라고 경연에서 임금에게 현인을 임용해 그 들이 책임지고 일하도록 할 것을 제안했다. 농촌에서 가난하게 살아온 그는 탐관오리의 축출과 중세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실례를 들어가며 진언했고 「임금이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소인의 거짓말을 달게 여기고, 임금이 허물 듣기를 부끄럽게 여기면 곧 말로 간(諫)함을 꺼려할 것이고, 임금이 스스로 총명하다고 자부하면 대신이 거짓말을 하게 된다<논사록(論思錄)>는 것을 강의하기도 했다....장성군청  
 

 

2층 확연루. 외삼문이다. 태극문양은 길상을 상징하는 것인가? 동입서출 안내글이 누하 기둥에 표시되었고, 문월대도 은근하다.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청절당. 서원에서 강당은 팔작건물이 보편적이지만 맞배 지붕이었던 진원현 객사건물을 옮겨 건축한 강학공간이다.  ‘필암서원’현판은 윤봉구의 글이며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글에서 가져왔다.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라고 한다. 

 

객사건물을 옮겨온 탓에 강당건물로는 흔치않은 배치다. 즉 묘와 맞보는 구조로 일반적으로 등지는 배치와는 다르다. 관청 건물을 헐어 서원 강당을 건축했다는 사실이 유쾌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평지 서원의 전형인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다른 서원과 구별 되는 특별한 배치가 눈에 띈다. 즉 산을 등지고 묘.당.동서재의 구성이 아니고 제향공간 우동사 정면 좌우에 동재(진덕재),서재(숭의재)를 두고 강학공간인 청절당은 우면사를 맞보고 선 배치이다. 다른 서원 배치에서 볼 수 없는 경장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전학후묘.전묘후학.일자형 배치와는 또다른 유형이다.

 

 

경장각. 서원 배치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전각이다. 어쩌면 경장각으로 말미암아 서원 전형 배치가 무너졌을 것이다.  편액은 정조대왕의 어필이며 인종이 하사하신 묵죽도(墨竹圖)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묵죽도는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필암서원의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원장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보강안』, 강회 참가자의 명단인『문계안』, 필암서원 소속 유생들의 명단인『서재유안서』, 필암서원의 재산을 기록한『필암서원원적』, 장성부사가 필암서원에 내려준『장성부사하첩』등을 보관한 전각이다.  

 

장판각 

 

신도비. 물론 비각이 없어 의아스러웠지만 신도비로 알았다. 신도비는 묘소앞이 원안이지만 회재를 배향하는 옥산서원. 한강을 모시는 회연서원에도 신도비는 자리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파워펄한 계생비繫牲碑였다. 도산서원의 생단. 도동서원의 희생단 처럼 제향에 바칠 짐승을 묶어두는 비였다. 물론 그 상징성은 경건 엄숙 정성으로 대변되는 유교철학이었을 것이다.

 

 

낮은 담장으로 경계를 설정한 제향공간 우동사(祐東祠). 매년 4월에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춘향제, 9월에는 추향제가 열린다. 편액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집자하였다고 한다. 문이 개방되어 있어 고마웠다. 영남지방 서원 향교는 거의 100% 순례객의 발길을 거부하며 철옹성 같은 자물쇠로 스스로 닫힌 공간을 자처하기에 열린 서원은 흥겨웠다.

 

우리에게 익히 회자되는 한 번 쯤  읊조려 본 시조. 하서 김인후의 자연가로 알려져 있다. 이제 나도 꿈 꾸어야 할 세대일까? 멈추지 않고 질주해오는 시간이 가끔 두려움으로 느껴지더라.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 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푸른 산도 자연 그대로  숲속을 흐르는 맑은 물도 자연 그대로

산도 그대로이고 물도 그대로이니, 자연 속에 묻혀 있는 나 역시 자연 그대로이다.

자연 속에서 저절로 자란 몸이니, 몸이 늙어가는 것도 자연의 뜻대로 따라 가리라.

 

200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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