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함평군

함평...대원군 척화비. 해보리 석불입상

임병기(선과) 2009. 9. 3. 10:54
728x90
728x90

 

 

함평 척화비...문화재청

 

함평읍내를 헤매고 다녔지만 네비양의 안내도 통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위치를 수소문 했지만 오리무중이다. 기각리 906-7번지가 척화비의 현위치인지, 함평공원 주소지인지 나는 알수 없다. 호남지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척화비 촬영을 실패하여 전국 모든 척화비 사진을 모으려는 계획은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화룡점정의 기회는 이제 다른 사람의 몫이 되리라는 막연한 예감이 든다.

 

자료는 문화재청에 가져오니 님들의 답사길에 참조하길 바란다.

 

함평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서양의 침범을 막고자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강화 하는 뜻에서 전국 각지에 세웠던 비들 중 하나이다.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은 중국과 일본에 뒤이어 우리 나라에도 세차게 밀려들어 통상요구와 무력침략을 기도해 왔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를 제외한 모든 외국과의 국교단절을 시행하였다. 특히 천주교사상과 양이(洋夷)를 배격하고 동양전래의 사상과 검소한 생활을 주장하는 관료 지식인들의 주장이 드높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하에서 고종 3년(1866) 병인양요를 계기로 몇 차례 외국군을 물리치고 외국인의 침략도발을 겨우 모면하였다. 대원군은 그 힘을 과시하여 전국 각처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외국 통상이 실시되면서 철거되었고 현재는 서울 경복궁 근정전 앞뜰, 전북 고창, 부산 등 몇 곳에만 남아 있다. 이러한 척화비(斥和碑)는 대체로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많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함평 척화비의 건립 당시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하는 말로는 함평읍 석성리 구주포 부근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다만, 함평군청 뒷뜰에 있었던 것을 함평 공원을 정비하면서 역대 함평현감, 전라도관찰사 등의 공적, 선정비 19기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척화비는 호패형으로 높이 135㎝, 너비 52㎝, 두께 20㎝, 자경은 8∼10㎝(대) 4∼5㎝(소)이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사람들이 침범을 하면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 이를 만세자손에게 일깨워야 한다. 병인년(1866)에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척화비의 역사적 성격이나 시대상의 반영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없이 중요하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척화비의 전국적인 수는 많지만 전라도 지방에서 그 예가 유일한 점에 함평척화비의 가치가 있다.

 

 

척화비를 포기하고 해보리 석불입상을 찾아 군민회관을 탐문했다. 근처에 계시는 할머니에게 여쭈었더니 분명 알고 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 ㅎㅎ 할머니는 군민회관을 등지고 계셨다.

 

동정심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다가오더라. 어쩌면 해보리 석불 입상의 모델이 되었던 그옛날 함평의 이름 없는 촌로의 얼굴이 바로 저모습 아니었을까?

 

 

석불은 함평군민회관 앞에 있으나 원래는 해보면 해보리 산 61번지에 있었다. 이곳은 해발 200m되는 야산으로 파평윤씨 종중산인데 종중의 묘역 앞에 있던 석불을 현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광배와 대좌를 갖춘 서 있는 상으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먼저 상체를 보면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다. 얼굴은 타원형인 계란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며 얼굴 세부표현이 사실성을 견지하고 있다. 더구나 양볼에 나타난 양감이나 턱밑으로 내려오는 알맞은 피부감은 지방 작가의 기법으로는 수준급이라 하겠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 위에 멎었으며 목에는 3도가 보이고 법의는 우견편단인데 어깨를 걸쳐 내려오는 옷주름은 다소 도식적이다. 수인은 두팔을 구부려 가슴 앞에서 역V자형으로 모아졌는데 이러한 겉모양은 화순 운주사 석불군에서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주목된다. 광배는 배모양의 거신광으로 두광에는 두줄의 원형 띠를 두르고 그 주위로는 불꽃무늬가 장식되었다.

 

 

 

대좌는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상면에 위를 향해 되어 있는 연꽃을 장식하였으며 전면에는 몸체와 연결되는 발 등을 조각하여 신체 부분과 별석으로 처리하였다. 

 

 

 

두광이나 화염문, 상호에서 보인 온화한 분위기, 양감과 입체감을 적절히 살려낸 각 부분의 조형미는 이 석불의 연대를 참고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도 하체로 내려와 도식적인 천의의 옷주름이라든지 거의 직선으로 뻗은 몸체의 모습 등은 고려적인 요소를 떨칠 수 없다.

함평지역에서 석불의 예가 거의 없다싶이한 현 시점에서 이 석불이 차지한 의미는 매우 큰 것이라 하겠다. 만든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측된다...문화재청

2009.07.26

728x90
728x90

'전라남도 > 함평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평...노송마을 동자석  (0) 2015.05.03
함평...보광사 동종  (0) 2015.05.02
함평...대원군 척화비  (0) 2013.01.01
함평...고막천 석교(똑다리)  (0) 2009.09.02
함평...모악산 용천사  (0) 200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