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광주...선암사지 삼층탑

임병기(선과) 2009. 8. 31.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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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 주차하고 터벅터벅 골목길 들어 섰다. 마을 끝가지 갔지만 보이지 않고 돌아나오다 만났다. 폐가옥 장독대 처럼 보이는 시멘트 기단위에 자리 했다. 인적이 끊긴 가옥 마당에는 고춧대 위의 잠자리, 옆집 대문 앞에 홀로 앉아 있는 병색이 완연한 할머니와  탑 모습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사람이 발길이 멈춘 을씨년스런 풍경, 녹이 짙어 흘러내리는 철책, 제멋대로 쌓아 올린 탑재.가을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탑동마을 선암사지 삼층석탑, 선암사? 두어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우선, 구전에 의하면, [원래 이곳은 선암사가 있던 곳인데 조선시대 연산군 즉위초에 빈대가 극성을 부려 스님들이 살 수 없게 되자 절을 버리고 순천으로 옮겨 갔으며, 동네 가운데 있는 노거수(수령 400여년 이상)도 선암사가 옮겨갈 때 주지 스님이 심은 나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빈대로 인해 폐사되었다는 소위 ‘빈대절터’라는 유형의 구전은 조선초기의 강력한 억불책으로 인해 폐사된 사찰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구전의 형태이다. 삼층탑이 있었던 사찰이 조선초의 억불정책과 함께 폐사되고 정리되는 과정에서 승주 선암사로 합사되었는 설이다.

 

다음으로 행정구역의 명칭과 관련으로, 이곳 선암사 434번지는 조선시대 선암역이 위치했던 곳으로,  이 역이 있었기 때문에 역말․역촌․선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탑동리․중보리 일부지역을 합쳐 ‘선암리’라 하였다. 이를 근거로 탑이 있는 곳의 행정구역 명칭은 1914년 이전에는 ‘탑동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암탑’이란 명칭도 1914년 선암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된 이후에 붙여진 명칭이라는 설이다.

 

 

얼핏 옥개석 4개로 추측하면 5층탑이다. 찬찬히 바라보면 동일 탑 옥개석 3개와 탑신 노반이 한 기 탑 부재로보인다. 마치 2층 옥개석 처럼 보이는 1.2층 옥개 사이의 부재는 기단 부재(?)인지 다른탑 부재인지 모호하다. 한편에서는 5층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나는 3층이라 생각한다. 옥개석 사진을 유심히 보자. 맨아래 옥개 받침은 3개, 기단 부재(?), 2층 옥개 뱓침은 2개, 3층 옥개받침은 1개이다. 이렇게 줄어든 옥개받침도 처음 접하지만 탑층수와 층급받침에 맞춘 의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늘고 긴 초층옥신에 비해 두터워진 옥개석, 그리고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짧은 옥개석 층급받침에 비해 길어진 낙수면과 반전이 심한 추녀끝은 이 탑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잃고 산만하며 세장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와같은 간략화되고 퇴화된 조형수법이나 안정감의 결여는 이 탑이 조성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탑은 불교가 쇠퇴하고 사회 또한 매우 혼란하였던 고려말기에 조성된 작품이라 추정되며, 늦어도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불교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조선초기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탑에서 특이한 것은 초층 옥개석 위에 있는 직경 5cm․깊이 8cm 정도의 긴혈공이다. 이것은 지석묘나 입석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성혈로서 그 속에 곡식이나 달걀 등을 담아 놓고 부인네들이 득남을 기원하는 곳으로서 민간의 기자신앙과 구복적 성격의 배탑 의식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광주시청

 

200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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