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영광군

영광...도동리 장승. 도동리 홍교 그리고 시인 조운

임병기(선과) 2009. 8. 19.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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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에 당산나무와 장승이 남아 있다니 여간 고마웁지가 않다. 미신이라는 미명하에 한 순간에 우리 전통민속이  사라져간 개발독재 시절 새마을 운동을 어떻게 벗어 났을까? 괜히 또 흥분된다. 혹자는 정치 논리로 접근할 지 모르지만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것은 수천년 지켜온 정신 문화, 민속에 국한하는 것임을 주지하시기 바란다. 

 

 

당산거리, 당산거리라 했다. 누가 뭐래도 내게는 참 멋지고 흥이 나는 이름으로 어깨춤이 등실등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당산거리에 당산나무와 할아버지와 할머니 장승과  애기장승으로 불리는 자그만한 장승이  중간에  있다. 본래 장생 3기가 길 쪽을 향해 일렬로 서 있었으나 도로를 정비하면서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동방대장(東方大將) 이름표를 단 할아버지 장생은 북향, 서방대장(西方大將)은 도광 12년(道光十二年)이라고 이름표를 단 할머니 장생으로 남향을 하고 있다. 도광 12년은 조선 순조 32년(1832)으로 조성 절대연도을 알려준다.

 

 

 동방대장(東方大將) 할아버지 장생. 여느 장승 처럼  웃는 얼굴로 우리들 할아버지의 얼굴이다. 몸의 대부분을 차지한 얼굴, 겁많은 표정의 왕방울 눈, 뭉퉁하여 정이 가는 코, 둥글고 크게 묘사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이며 두줄로 선각한 수염이 이채롭다.

 

 

서방대장(西方大將) 할머니 장생. 긴 사다리꼴 몸매로 올라가다가 머리에서 광배 모양처럼 깎았다.  눈과 코는 할어버지 장승과 달리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게 표현했다. 사각의 입속에 이빨을 새겨 영감 장생을 무서워 않고 얕보는 사악한 무리를 퇴치하겠다는 표정이다. 지어미의 마음씨야 이해가지만 웃음이 실실 나오니 우짤꼬요? 

 

 

도동리 홍교.  조선 성종때 우리 문학사상 가사 작품의 효시인 상춘곡(賞春曲)을 쓴 불우헌 정극인(丁克仁)이 척불(斥彿)한 공을 기념하기 위해 사후 16년이 되는 해(1497년)에 건립했다고 전해온다. 우리세대이면 고교 국어 시간에 매 맞아가면서 줄줄 암기했던 상춘곡 아닌가? 이제는 정철의 장진주사와 더불어 술독이 비었으면 나에게 알려달라는 문구만 입가에 멤돌 뿐이지만 척불(斥彿)은 또 무슨 말인가?

 

자료를 검색해보니 척불의 사연은 알겠지만 그공로로 홍교를 건립한 연유가 궁금타. "선생의 평소 소신은 ‘숭유척불’이었는데 세종19년 홍천사 사리전을 창건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성균관 유생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는데 정극인이 앞장서서 권당(捲堂: 동맹휴학)을 하기로 하였다. 세종이 크게 노하여 정극인을 참형에 처하라하는 것을 영의정 황희가 황급히 간하여 사형을 면하고 북방으로 귀양을 갔다."

 

 

참 앙증맞고 소박하며 정감이 묻어나는 다리이며 우리 마누라 작은 손발이 문득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멋부리고 허우대 멀쩡한 인물 백 사람 이상의 역활을 수행하는 홍교로 아래자료는 영광군 홈에서 가져 왔다.


"홍교의 규모는 폭 184㎝ 반경 174㎝ 정도의 홍예구조(Arch Structure)이며, 13개의 부재로 결구되어 있으면서도 얼핏 9개의 부재로 결구된 것 같이 보인다. 홍예 부재로서 장대석의 크기는 평균 184×50㎝으로 부재의 평균 길이는 180㎝, 평균 굵기는 50㎝정도이다. 홍예 부재 쌓기는 하부에 장대석 크기의 절반 정도되는 석재가 2개씩 한 조가 되어 있는 양쪽 2단을 제외하고 모두 장대석으로 되어 있다. 가공기법(加功技法)으로 보면 세련된 정밀다듬보다 자연스레 격에 어울리는 거친 다듬의 부채가 아치를 이루어 홍교는 전체적으로 소작하게 어울림과 함께 구족적인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다."

 

홍교옆 큰 나무에는 "시인 조주현이 태어난 마을이며 그가 어린시 이나무 아래서 뛰어 놀았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생소한 조주현 시인이 누구인가? 아~~ 월북 작가 였구나!!!  조운은 일제시대 가람 이병기와 함께 시조부흥운동을 펼치며 한국 현대시의 기반을 다지는데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가람 이병기와 더불어 한국 시조시단의 최고 인물로 꼽히면서도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아 보통사람은 물론 문학사에서도 잊혀져 왔던 이름이었다.

 

영광군에서도 홍교 옆에 산뜻하고 홍교와 어울리는 조운에 관한 안내문과 시조비를 세워 역사의 피해자인 조운의 존재를 알렸으면 좋겠다.   

 

조운(曺雲:1900. 6. 26. 전남 영광∼?)

북한의 시인.

 

본명은 조주현(曺柱鉉), 자(字)는 중빈(重彬). 18세가 되던 해에 뒤늦게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립 목포상업학교 (지금의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0세에 졸업했다. 1921년에는 중등학교 과정인 사립 영광학원에서 박화성(朴花城)과 함께 미술·작문 교사로 재직했다. 시조창작에 정진하는 한편 <자유예원 自由藝苑>이라는 향토문예지를 발행했고, 시조 동우회인 추인회를 결성하여 매월 시조짓기대회를 가졌으며, 이병기(李秉岐)를 초대하여 강연회를 열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주로 고향에 거주하면서 향토문화진흥에 힘을 썼다.

 

1922년 <동아일보> 독자란에 시 <불살라주오>를 처음 발표했으며, 1924년 11월 <조선문단>에 <초승이 재 넘을 때> 등 자유시 3편을 발표함으로써 공식 등단했다. 이후 1940년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시편을 꾸준하게 발표한 조운은 1920년대 중반 국민문학파에 의해서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30년대 중엽에는 영광 금융조합에 근무하면서 민족자각운동의 일환으로 갑술독서회를 조직하여 이른바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반 정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영광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았고,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47년에 가족과 상경하여 동국대학교에 출강하며 시조론을 강의했고, 이 무렵 유일한 시조집인 <조운 시조집>을 출간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가족과 함께 월북하여 황해도 대표위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박태원과 함께 <조선구전민요집>과 <조선창극집>을 출간했으며 <인민시인 신재효>(1957), <아브로라의 포성>(1957), <평양판관>(1958) 등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단아한 정조가 돋보이며 시어를 섬세하게 조탁하여 전통적인 정한의 세계를 담아냈다.

 

구룡폭포...조운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두고

구름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 보느냐

 

200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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