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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가평군

가평...현등사

by 임병기(선과) 2009.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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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콘도에서 만찬은 집 떠난 사람에게는 과분했다. 간단한 찌게와 밑반찬 두어 가지로 만족했었는데 침향님과 우리님들의 정성 가득한 음식으로 마음의 포만감을 느꼈다. 금상첨화로 야관문주를 처음으로 접했으니 어제밤은 호접몽 호접몽인게야!!

 

숙소에서 늦지 않게 출발 했는데도 가평 까지는 제법 길이 멀다. 차창으로는 절경이 펼쳐지건만 사내 둘이는 씰데없는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풍광에는 무관심하다. 어쩌면 애초에 기대를 말았어야 했다. 보태면 탈 나니까!! 겁은 많아 옆에 앉아서는," 행님. 옆에 차 옵니다. 우측 이상 없음다. 가입시더."를 난무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스님이 계셨다.  차량으로 통과할려고 했더니 어~라! 산문이 잠겨져 있다. 월욜 새벽에 산문을 잠근 사찰도 짧지 않은 답사 경험에 처음 접한다. 경기도 금강이라 부르는 운악산 등산객 때문인가?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별 수 없이 안개 짙게 깔린 산길을 올랐다. 일주문 현판이 한글로 세로로 걸려 있어 이채롭다. 박대통령 필체 같은데... 

 

 

일주문 옆 담장으로 둘러쌓인 삼충단.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세 분 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당시 조병세선생은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 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으나 왜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최익현선생은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단식항거중 순국하였으며, 민영환선생은 시종무관(侍從武官)이었는데 대한문앞에 나가 석고대죄(席藁待罪)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다.

 

이 삼충단은 일제치하이던 1910년에 설단되었으며 1989년에 복원되었으며 매년 11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고한다.

 

 

현등사의 창건은 우리나라 불교사의 개막과 함께 시작되는데,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지 13년 후인 540년(법흥왕 27)에 창건되었다. 『봉선사본말사지』에 수록된「운악산현등사사적」에 의하면, 당시 인도승 마라가미가(摩羅訶彌)가 신라 땅에 들어와 불법의 전파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법흥왕이 그를 위해 운악산에 절을 짓고 포교에 힘쓰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절의 시작이다. 이때의 절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그저 운악산사(雲岳山寺), 곧"운악산에 있는 절"정도로만 알려지고 있다.

 

법흥왕대의 창건 이후 절에는 수차례의 중창이 있었다.

첫 번째 중창은, 898년(효공왕 2)에 도선국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도선국사는 고려의 도읍을 송악산 아래에 정하고 나무로 만든 학을 날려 세 곳을 택해 약사도량을 세웠는데, 아무래도 동쪽의 지기가 약해 이를 보완하고자 여러 곳을 탐색하였다. 이때 운악산에 이르러 그 빼어남에 반하여 절을 세우려고 하는데 마침 산중에 절터가 있었다. 바로 이 곳에 절을 중창하니, 이것이 운악산사의 첫 번째 중창이다.

 

절의 삼창은 1210년(고려 희종 6)에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때 비로소 절의 이름은 현등사라고 하였다. 보조국사가 망일산 원통암에 머물때였는데, 운악산을 바라보니 산 속에 삼일 동안 빛이 발하였다고 한다. 괴이히 여겨 그 곳을 찾아 갔더니 관음전이 우뚝하게 자리잡고 있고, 전각 남쪽 바위 위에 옥등(玉燈)이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

 

국사는 더욱 신기롭게 여겨 정성껏 예참하고 주변을 살피니 바로 옛날의 대가람터였다. 서둘러 조정에 아뢰고 승속에 널리 알려 재물을 모아 가람을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절의 이름이"옥등에 걸려 있는 절"이라는 뜻에서 현등사가 되었다고 한다....출처/전통사찰총람

 

 

일주문을 지나 명경지수 같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벗삼아 3~40분 산길을 걷다보면 절집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보인다. 108 번뇌를 소멸 시켜주는 극락으로 향하는 계단인가?

 

일주문부터 본절 까지는 크게 힘들지 않은 코스기도 하지만 사시사철 지루하지 않을 풍경이 길을 따라 전개되어 시각은 물론이고 청각.후각도 즐거울 듯하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여유로운 답사가 이제는 아득한 옛이야기로만 들리니 나도 이제는 타락(?)에 익숙해졌다. 무엇에 쫓기는 듯한 초조감, 장거리 답사로 깊이 보다는 처처에 더욱 관심을 두어 돌아오면 늘 후회하는 답사 포인터와 명소가 생긴다.

 

 

계단을 올라서면 현등사 지진탑이 반긴다. 비보탑으로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현등사를 재건하면서 경내의 지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세웠다는 탑이다. 기단 갑석 아랫면에는 부연을 새기고 윗면에는 초층 탑신의 각형 2단의 받침이 뚜렷하다.

 

초층 몸돌과 상륜은 멸실되엇으며, 몸돌에는 우주가 보이고, 2.3층 몸돌에는 사방불을 모셨다. 옥개받침은 위로부터 3*4*4이다. 낙수면은 완만하고 추녀 반전은 심하다. 고려중기 이후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몸돌에 봉안된 사면불 

 

 

보광전. 선원을 겸하고 있어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스님들의 시계인 벽에 걸린 큰 목탁.

 

목탁 속에 산새가 둥지를 틀어 "세상에 이런일이"프로에 방영되었다고 한다.

 

산속 절집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에...

 

 

극락전. 현등사의 금당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1746년(영조 22)조성된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어칸 4분합, 협칸 3분함 띠살문 창살이며 벽면을 흙으로 마감하였다. 

 

 

극락전 목조아미타불 좌상. 불상 후불탱화 아미타회상도 화기에 건륭 24년인 1759년에"아미타불을 개금하고 후불 미타회상도 1부를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어 1759년 이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상은 나발, 방형 얼굴, 짧은 목에 삼도를 표현하였고 어깨는 다소 앞으로쏠렸으며, 제작년도가 확실해 영조 시대 이후 불상 연구에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하겠다. 

 

아미타탱은 아미타불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 협시들은 10대제자, 상단에는 팔부중이 배치되어 있다. 이런 구도는 조선 후기의 불화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극락전 주초의 그랭이도 오랜 세월를 비켜나지 못했다.

 

 

극락전 중정의 석등(?) 기단. 기단을 올리고 화사석에 초공양을 올렸으면 좋으련만

 

 

현등사 3층석탑. 원래는 5층탑으로 보인다. 아직도 1층 몸돌과 옥개석을 상기단 면석과 기단 갑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초층 탑신부로 생각한다. 다만 멸실된 탑신이 몇층인지는 모호하다. 

 

지붕돌은 모서리 반전은 심하며네 귀퉁이가 힘차게 들려 있다. 상륜은  비교적 양호하다. 1470년(세조 15) 현등사를 중수한 기록이 새겨진 사리용기가 발견된 바가 있어 15세기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기법의 기단. 중대 네면에는 대나무 모양의 둥근 기둥을 세우고, 상하대에는 복련과 앙련을 표현했다.  또한 상하대 면석에는 장방형 액자 속에 안상을 새겼다.

 

 

1층 옥개석에 핀 연꽃

 

     

 현등사 삼층석탑 사리호와 사리함...도굴되어 삼성문화재단 소장 중 현등사로 반환. 1470년 명 문이 있다.

 

 

지장전 청동지장보살좌상. 1790년에 모셨다는 글씨가 남아 있다. "동그란 얼굴에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화형의 귀거리를 단 늘어진 귀, 삼각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 등 어색한 웃음에 야무진 인상이다.

 

신체는 굴곡이 없이 평판한 모습이며, 두손은 무릎 위에서 오른손은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대고 있다. 이런 특징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까지 보이는 수법이다.

 

전체적으로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의 특징을 따르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은 청동을 재료로 사용하였다는 점, 그 조각승이 경기도의 유명한 불화승 관허당 설훈, 용봉당 경천이라는 점,'기계시주'와'연마'등의 연화질 기록에서 18세기 청동 불상의 주조기법과 제작과정을 살필 수 있다."

 

 

좌우 시왕을 창호지에 글로 모셨지만 오히려 정감이 더욱 간다..

 

응진전. 옛 독성각을 헐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불단 위로 석가여래좌상과 16나한을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옛 산신각 자리다. 

 

영원히 다시 찾을 길이 없을 것 같은데 답사 포인트인 탱화 사진을 놓쳤다. 

 

 

 대구에서 가평.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인데

 

이번 답사에서 인연 맺지 못한 동종.지장탱.산신.칠성.독성탱

 

그래서

 

다녀오고도 안다녀온 듯한 애닲음, 그리움...........

 

200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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